새로운 이벤트
평균 나이로 치면 20대 중 후반인 5명의 여자가 아무리 이마를 맞대고 고민해 봐야 명확한 정답이 나오
지 않는다. 그 것도 절반 가량이 모태 솔로였고, 나머지 절반이 연애를 한 경험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아니 언니, 진짜 설명만 들으면 그냥 게임에 푹 빠진 20대 여학생이랑 다른 게 없는데요?”
“우리 20살때 뭐 받으면 좋아했지?”
“게임에 지를 상품권?”
용사의 육체로 인해 나는 취하지 않는다지만, 나머지 넷은 평균적인 초능력자들. 초능력자용으로 출시된
알콜 분해를 방지하는 음료를 곁들인 술자리라 그런지 자꾸 헛소리들을 하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멍청
한 머리들만 모였는데 술에 취하니 더더욱 답이 없었다.
“야이 씨, 니들은 남자친구 선물로 게임 상품권 종이 봉투에 담아서 주겠다고? 니들이 생각해도 이상하
지 않냐?”
“실용적인 거 좋아하면 괜찮... 죄송함다.”
김 모양(27세 여 / 남자친구 100일 선물 안 챙겨서 헤어짐)이 말을 하다 이 모양(28세 여 / 모태솔로)의
눈치를 받고 곱게 술잔에 머리를 박는다. 5명 전부 모아 평균 연애 횟수 1 아래로 내려가는 모임이라 그런
지 정답을 아는 년 하나 없이 이년 저년 헛소리만 나온다.
“근데 아직 20살이면 상품권 선물로 받아도 좋아할 것 같은데... 아니 씨, 상품권 ‘만’ 주는 게 아니라 상품
권 ‘도’ 주라는거지.”
“그런가? 그건 여자끼리 주고받을 때 편해서 그런 거 아니야? 애인이 주는 선물에 상품권이 껴 있으면 되
게 이상한 거 같은데.”
딱 봐도 ‘이런 년도 애인이 있었는데’와 ‘이러니까 모태솔로구나’ 하는 시선이 교차하여 뼈저리게 서로의
얼굴을 찌르고, 그 시선에 할 말 잃은 모두가 조용히 술자리에 고개를 처박는다. 서글프고도 찝찝한 침묵
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다.
“꽃다발은...”
“너무 줌마틱하지 않냐? 어디 졸업식도 아니고, 아니 그 전에 동거한다며? 꽃다발 어따 두려고.”
“그래도 이벤트 때는 한 번쯤 꽃을 준비하는 것도 좋지 않나?”
치킨에 맥주를 거쳐, 삼겹살에 소주를 지나, 편의점에서 캔 맥주와 과자 봉투를 까서 시시덕 거리는 상황
까지 와도 별 다른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연애 경험이 없는 이들이야 남자를 대하는 법을 잘 몰랐고, 있
는 년들이라 해도 10살 어린 겜돌이 남학생의 젊은 감성은 모르니까.
“차라리 우리 말고 다른 남자한테 상담하는 게...”
“내가 아는 남자애가 어디 있겠냐...”
여중 여고의 체육부. 히어로 공익에서 만난 남자들도 조금 있지만 정말 ‘얼굴만 아는 관계’로 같은 건물에
서 지나가다 목례만 하는 사이. 집안이 집안이다 보니 소개팅이나 맞선처럼 부모님이 남자를 소개시켜
주려 했지만, 히어로 활동을 막았다는 이유로 반항한답시고 연락조차 하지 않았는데.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봐 지는 것이 거슬려 나 또한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진다.
“뭘 그런 눈으로 보는데? 그럼 니들 지금 아는 남자애한테 물어보던가?”
다시 한 번 테이블에 침묵이 감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한 남자애가 있으면 이런 분위기가 되
지도 않았겠지. 그런데 갑자기 한 명이 자신만만하게 제 단말기를 손목에서 풀더니 테이블 위에 턱 올려
놓는다.
“뭐야, 아는 남자애 있어?”
“아뇨, 남동생...”
다시 한 번 달아오를 뻔했던 편의점 야외 테이블이 고요 속으로 가라앉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모두가
단말기를 노려본다. 그래, 평균 연령 20대 후반의 여자 다섯이 술 마시고 머리를 맞대는 것 보단, 20대 초
반 또래의 같은 남학생이 남자의 마음을 잘 알겠지.
고요 속에서 단말기에 메시지가 울린다.
※
술 냄새 풀풀 풍기지만 취하지는 않은 소희가 양 손 가득 무언가를 사 들고 왔다.
“그게 다 뭐야?”
“어, 음... 선물?”
왜 의문형인가 의아해하는 사이 내 앞에 다소곳하게 놓인 쇼핑백들. 이게 뭔가 싶어서 보니 길거리에서
자주 보이던 화장품 가게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로션과 핸드크림, 클렌징 폼처럼 알고 있는 것 부터 정체
를 알 수 없는 크림류의 화장품까지.
“갑자기 무슨 화장품?”
술에 꼴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취했는지 소희가 손을 이리 저리 흔들며 설명을 한다. 첨단 과학의 힘은
용사를 어느 정도 취하게 할 수는 있는지 가끔 말이 횡설수설했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
“그래서... 그런 걸로 내기를 한 거야?”
“엉... 아니, 그냥, 지들끼리 막 싸움이 났다니까?”
100일 남짓 사귀다 차인 것이 연애 경험의 전부지만 모태 솔로보다는 남자를 잘 안다고 주장하는 여성
과, 내가 모태 솔로여도 남동생이 있으니 너처럼 100일 까먹었다가 차인 멍청이보단 낫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
술자리다 보니 목소리가 커졌고, 둘이서 아웅다웅 다투다가 결과가 났다.
일단 선물을 사가서 반응을 직접 물어보면 되는 게 아닌가?
그 때문에 소희에 손에 들린 저 괴랄한 선물 세트가 완성된 것이다. 화장품만 있는 줄 알았더니 저 뒤의 쇼
핑백에는 게임에 캐쉬를 충전할 수 있는 바코드가 있었고, 또 그 뒤에는 드라이 플라워를 예쁘게 꾸며 만
든 꽃다발이 있었다.
그 외에도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단말기용 악세사리, 귀엽게 생긴 증강 현실 홀로그램의 질을 올려주는
보조 기구, 인형 모양의 방향제 등 남학생을 노린 것 같은 다양한 팬시 용품들이 잔뜩 있었고.
“아니 누나... 아이스크림은?”
“아, 맞다...”
문제가 있다면 온갖 잡동사니를 양 손 가득 사왔기 때문에 기다리던 아이스크림이 없다는 점? 그래서 야
밤에 산책이나 나갈 겸 운동화를 주섬주섬 챙겨 신으니 자연스럽게 소희가 옆에 따라붙는다.
현관 밖으로 나서니 밝게 빛나는 달이 우리를 반긴다. 밤바람이 서늘하게 몰아침에도 가벼운 반팔 반바
지 차림으로 길을 걸어가니 느껴지는 것은 따듯하다 못해 조금 뜨거운 소희의 손. 농담이 아니라 진짜 뜨
겁게 달아오른 게 술김 속에서 제 멋대로 돌아다니면서 또 강해진 모양이다.
“그래서 누나가 고른 건 뭔데?”
“아, 음? 어?”
“그러니까, 누나는 뭘 골랐냐고.”
밤이 깊었지만 과학으로 점칠된 도시의 불빛 아래에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무리 지어 다니는 학생들,
양복을 입고 술에 취한 직장인, 우리처럼 야밤에 데이트 나온 커플들. 고요하지만은 않은 밤거리를 걸어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으로 향한다.
“나는 그... 단말기 악세사리랑 팬시 용품들.”
조금 부끄러운지 벌겋게 얼굴이 익어서 빠르게 설명하는 그녀의 말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화장품을 추천한 것은 남동생이 있는 후배였다고 한다. 초능력자가 되어 외모 보정을 받아도 남자라는
생물은 늘상 꾸미는 것을 좋아하니 과한 화장이 아니라 피부 관리를 도와주는 영양 크림 류를 주로 골랐
다고 한다.
꽃을 선택한 것은 연애 경험이 있던 후배 중 하나. 뒤처리 이야기니 꽃은 실용적이지 못하다느니 반박하
는 말에 그래도 연애하는 사이인데 한 번쯤 은 꽃다발을 주고받아야 기억에 남지 않겠냐고 감성을 논했
고.
20살이고 게임 좋아하는 남자라면 귀여운 캐릭터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며 인형 모양 방향제와 캐릭터 상
품을 고른 후배, 그리고 어차피 동거하는 사이라면 실용성이 최고라며 상품권을 추천한 노빠꾸 모태솔로
후배까지.
“일단 누나 선물이 제일 마음에 드는데... 다른 것도 순위를 정해야 해?”
“어, 어? 비교를 해 주면 좋지?”
헤벌쭉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에 슬그머니 팔짱을 휘어 감으니 그녀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래도 자기가 정답을 골랐다는 생각에 기쁘기 그지없나 보다. 뭐, 애당초 그녀가 정답을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소희는 내가 씻고 나와서 화장품 따위를 바르지 않는 것을 안다. 애당초 용사의 피를 흡혈하는 것 만으로
피부 미용이 완벽하게 되고 있으니까. 꽃다발도 받으면 기쁘다기 보다는 이걸 어따 두지? 하는 미묘한 감
상. 평범한 남자라면 감동받았겠지만 내 감성에는 맞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상품권이나 증강현실용 보조 기기를 선물한 물욕적이고 실용적인 후배의 선물이 제일 괜
찮지만...
그런 쪽에는 이미 탐욕이 있었다.
증강현실 단말기는 악마의 기술이 떡칠 되어 있어서 시중에 판매하는 보조 기기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준
이고, 상품권이라 해도 천 만원짜리 수표 수십장을 선물이라고 보내오는 악마가 있는데 어찌하겠는가?
그 후배란 사람도 이런 기괴한 상황은 예측 못했겠지.
“사실 최고의 선물은 아이스크림 한 통이었겠지?”
“미안...”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시무룩해졌다 오락가락 하는 소희의 모습을 보며 로봇이 담아주는 아이스크림
을 구경한다. 다양한 색의 아이스크림이 로봇 팔에 의해 통 안에 가득 담기는 모습은 정말 별 것 아닌데 시
선이 집중 된단 말이지.
“그래서 누나, 근처에 이상한 거 느껴지는 게 없어?”
“...없어, 왜?”
순식간에 알딸딸한 기분에서 벗어난 소희가 눈매를 날카롭게 치켜 뜨며 되묻는다.
취한 모습으로 헬렐레 팔렐레 돌아다니면 가까이 올 줄 알았는데, 지하 도시에만 돌아다니나?
[작품후기]
대학교가 대면 강의다 선택이다 시끄러운 와중에 클럽 가서 빵뎅이 흔드는 무개념들 때문에 한바탕 난리
가 났네요. 누구는 1주일에 1, 2번 친구들 만나러 가는 것도 걱정되서 조심조심 다니는데 에혀...
슬슬 길거리에 마스크 안 쓴 사람들 늘어나던데 독자님들도 몸 조심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