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1/189)

새로운 이벤트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헐렁한 차림으로 가슴을 노출하던 여자들이 사라지지만 패션을 위해 맨살을

드러낸 남자들은 어중간한 추위를 견디는 계절. 사계절의 변화는커녕 남극 한 가운데에 던져 놔야 추위

를 느낄 수 있는 우리 커플은 순찰을 돌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고서야 계절이 바뀌었

음을 알아차렸다.

“이제야 슬슬 가을 같네.”

“하긴, 이제 슬슬 날이 풀릴 때가 되었지.”

날씨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둔감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롱 패딩을 입어도

더워서 땀이 질질 날 일이 없고, 반대로 한겨울 폭설 아래에서 반팔 반바지만 입고 눈싸움을 해도 추위로

피부가 얼어붙을 리 없으니 다른 사람들의 옷을 봐야 실감이 난다.

수줍게 맞잡아 오는 손바닥이 살짝 따끔거린다. 지난 번 문양이 두배가 되고 1주일의 강제 금욕을 거쳤음

에도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용사의 힘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녀가 자연스럽게 흘리

는 신성력에 조금이나마 적응했다는 것 정도.

이제 슬슬 대련이고 뭐고 나와 소희가 한 번 붙으면 5분 안에 제압당하게 생겼는데?

소희가 출연하던 드라마가 꽤 인기를 끌며 성공적으로 종영을 하였으며, 천사들의 개판이 났던 협회 본

부도 드디어 정상적으로 업무를 시작해 우리가 순찰 히어로에서 대 빌런 히어로로 진급하기까지 얼마 남

지 않았다.

물론 협회가 정상적으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던 이유는 악마들의 무분별한 방화 테러가 멈추었기 때문이

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천사고 협회고 존나 무능하게 보이는데 진짜 무능한 거라 할 말이 없지.

“여름에는 못 놀러 갔는데 가을에 어디 놀러 갈래?”

“나야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는데... 누나는? 사실 휴가 때 집에 틀어박혀도 나쁠 건 없는데.”

“어휴 우리 집돌이... 진짜 어디 놀러 가고 싶은 곳 없어?”

다정하게 지나가는 우리 커플을 보고 골목에 있던 가게 주인들이 인사를 해 와서 살짝 목례를 되돌려주며

대충 지나쳤다. 처음부터 이미지가 좋은 우리들이다 보니 순찰 코스만 돌아도 민원이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두 블럭 가서, 그때 그 과일 주스집에서 우회전. 날이 쌀쌀해지니 빙수 가게가 메뉴를 와플과 크레이프,

붕어빵 등 따끈따끈한 음식들로 바꾼 게 보인다. 계란빵과 피자 붕어빵을 구매해 봉투를 들고 가니 자연

스럽게 카페 아주머니가 나와 우리 손에 라떼를 쥐여준다.

“잘 마실게요~”

“어휴, 드라마 잘 봤어. 다른 드라마도 촬영 할 거야?”

“아뇨 아뇨, 아직 몰라요.”

아줌마와 수다를 떨며 적당히 끊어내는 소희를 보며 고민했다. 말하는 게 귀찮아서 응대를 소희에게 맡

겼더니 이렇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캐릭터 메이킹이 되어서 일석 이조라는 느낌. 남녀의 감성이 바뀌

었어도 성별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갬-성은 변한 게 없기 때문이다.

병약해 보이는 인상의 캐릭터가, 그림자(어둠)를 다루며, 말수가 없고 낯을 가리는 소심한 성격이지만 싸

울 때는 물러서지 않는다는 점. 반대로 강인한 인상의 근육질 캐릭터가, 빛을 다루며 친근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는 점.

어쩌다 보니 완벽하게 빛과 어둠 콤비로 캐릭터가 잡혀 버렸고 그 점을 이야기하는 인터넷 게시물이 넘쳐

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심지어 SNS에 물량 공세로 게시물을 계속 올리다 보니 할 말도 없고, 다른

남자들처럼 애교를 떨며 게시글을 올리는 건 싫어서 정보나 사진만 무성의 하게 달랑 올려도 그걸 ‘수줍

음’으로 받아들이니. 사람들이 얼마나 보고 싶은 것만 보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진짜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엉, 괜히 어디 놀러갔다가 사건 터질 것 같아.”

“그럴 리가 있... 나?”

소희가 허허 웃으며 말을 이으려다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지하 도시 출신 흡혈귀, 고등학교 입학하고 대련하겠다고 연예인이 교사로 전입(이하린),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 테러 일어나서 S급 히어로가 참전(소희네 할머님), 성인이 되자 마자 우리 건물에 방화범 출현, 협

회 요인 암살 사건, 협회 요인들 폭주 사건, 대악마들이랑 엮임, 중국 가서 뭔가 하고 옴, 아직도 지하 도시

랑 교류 하고 있음.

굵직한 것만 정리해도 이 정도고, 고등학교 무렵에 학생들이랑 엮였지만 귀찮아서 대충 넘긴 사건들까지

포함하면 술집에서 반 나절을 떠들어도 부족할 거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 반장 부반장 커플이

랑 저주 능력이 있던 왕따당하던 선배 같은 애들 말이지.

커플이긴 했었나? 삼각 관계였나? (피를)먹고 버린 여학생이 한 두명도 아니고 기억하기도 힘들다.

“뭐 악마들은 다 자기 영역이 있다며, 한국이나 중국 말고 다른 곳 놀러갔더니 거기에 다른 악마가 있는

거 아니야? 누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런 거 잘 엮이는 운명인데.”

“흡혈귀, 용사, 악마에 이어서 운명인가... 그런 것 치고는 내 어린 시절이 너무 평범했는데.”

“즈기요, 일평생 운동에 몸 담기로 했지만 시작부터 고위급 초능력자로 각성해서 자신의 꿈과 미래에 대

해 고민하다 집안과 정치적 갈등을 맺는 금수저 아가씨를 평범하다고 표현하진 않아요.”

“금수저 아가씨라니, 좀 오글거리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한여름 폭염 아래에서 10시간 촬영 강행을 해도 벌게지지 않는 얼굴이 세 글자에 바로 달아오르는 모습

을 보며 낄낄 웃는다. 고등학교처럼 의무적으로 시험을 보고 과제를 제출하는 상황이 아니니 사건이 터

지지 않을수록 평온하고 행복하다.

‘그나저나 지하도시에 왔던 그 새끼들은 어쩌지?’

한 가지 걱정이라면 김한나에게 은근 슬쩍 정신 간섭을 해 왔던 녀석. 내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다가왔다

는 은밀성은 매우 위험하지만, 고작해야 B급 초능력자에게 간파 당해서 스스로 파훼한 꼴을 보면 위력이

형편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냥 소희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지하 도시에 무슨 일이 터져도 내게 생길 손해는 크지 않으니까. 스트레스 해소야 악마들에게 부탁해도

상관없을 거고, 경매장이나 물질적인 부분은 탐욕이 이 쪽에 붙었기 때문에 걱정할 게 없다.

탐욕이 우리 두 명이 히어로 & 사이드 킥으로 이름을 날리면 자기 사업에 써먹으려고 준비하는 눈치긴 한

데, 관계 개선이랍시고 받은 게 얼마인데 고작 홍보 모델 하나를 거절할까?

우리한테 접근하면 뭐, 이제는 용사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진화한 소희가 알아서 할 거고. 그러

니까 내가 할 일은 이 피자 붕어빵이 식기 전에 먹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피자 붕어빵에 라떼는 어울리지 않긴 해.

10살 어린 연하의 미남을 애인 삼은, 나이가 이제 계란 한 판이 되어버린 전소희는 타인이 볼 때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평가될 것이다. 술자리에서 아는 누님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 부터 아는 동생

들과 최근 근황을 이야기할 때 부터 모두가 그리 평가하였으니까.

빌런과 싸우는 것을 극구 만류하던 가족들도 3년 전 고등학교 테러 사건 이후 말리는 일이 없었고, 여중

여고의 운동부로서 모태솔로 인생을 살다 노처녀로 늙어 죽을 줄 알았더니 10살 어린 애인과 운명적 만

남을 가졌다.

공익 히어로에서 공익 두 글자 뚝 떼고 히어로로 데뷔하자 마자 큰 사건이 일어나 제 능력을 전국에 방영

했으며 인기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해 초능력자 겸 배우로서 이름 석 자 널리 알렸다.

학교에서 친해진 이하린이 ‘이럴 거면 그냥 복귀 선언할까? 근데 너무 자존심 상해!’ 라며 찡얼거려도 대

련 한 번 뚝딱 겨뤄버리면 만족했다며 맥주 한 잔 걸치고 사라지니 불편할 게 뭐 있을까. 아마 불평 불만을

입 밖으로 내면 도둑년이 양심도 없다고 몰매나 맞겠지.

그래도 그녀에겐 고민이 있었다.

‘대체 좋아하는 게 뭐지...’

당연하게도 그녀를 도둑년으로 만든 10살 어린 애인에 대한 것이었다.

일주일에 같이 자지 않는 날이 더 적을 정도로 사이도 좋고, 입맛도 얼추 비슷해서 외식을 할 때 갈등도 없

다. 남자인데도 쉬는 날 같이 게임을 하는 걸 좋아해서 어디 먼 곳 놀러 나가지 않아도 만족해하며 100일

이다 키스 데이다 어정쩡한 기념일 챙길 마음도 없어 보여서 정말 중요한 날만 챙기면 되니 정신적으로

피곤할 날이 없다.

그래서, 그게 고민이었다.

“... 말만 들으면 걍 겜돌인데 애인 자랑하려고 나온 겁니까?”

“아이 씨발, 괜히 놀러왔네 진짜.”

집에서 저녁 레이드나 조지고 있겠다며 올 때 아이스크림이나 한 통 사오라며 배웅하던 하늘이에 대해 이

야기를 하니 술자리에 참가한 다른 동생들의 눈매가 짜게 식었다. 같은 20대면 고민을 해결할 수 있지 않

을까 술자리를 주선했더니 돌아오는 것은 쌍욕과 매몰찬 눈빛.

“아니... 그래도 애인인데 뭐라도 챙겨 주고 싶다, 이거지.”

“그 정도면 현실에서 이벤트를 하는 것 보다 20강 무기 하나 쥐어 주는 걸 더 기뻐하겠네. 술이나 먹어요

언니. 진짜 한 대 치기 전에.”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술잔을 탁 내려놓은 후배 초능력자(28세 여 / 처녀임)이 손등에 울끈불끈 힘줄을

일으키며 안주로 나온 닭다리를 우드득 깨물어 뼈 째로 부숴버리는 모습에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려 하자

오히려 잔소리만 엉망진창으로 들었다.

운동부 출신 녀석들과 연으로 맺어져서 그런가 다 험악하기만 하네.

하늘이한테 부탁해서 소개팅이라도 시켜줘야 하나.

“어우 언니, 언니가 왜 계산을 해. 우리가 상담도 제대로 못 해 줬는데 우리가 해야죠.”

[작품후기]

사랑니는 잘 뽑았고, 몸뚱이가 너무 튼튼한 나머지 아프지도 않네요.

의사 선생님이 '이 정도로 누워 있는 매복 사랑니면 수술하고 입원해야 하는데 너는 붓기도 없네~' 라면

서 신기해 할 정도. 실제로 잇몸을 째고 이빨을 뽑은 부분은 진통제를 안 먹어도 통증이 없네요.

근데 사랑니 뽑느라 기구로 눌러댄 아래턱과 입술이 오히려 아픔...

아 ㅋㅋ 튼튼한 돼지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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