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8/189)

새로운 이벤트

내 게임 캐릭터 앞에서 열심히 점프를 하는 쪼렙 캐릭터에게서 귓속말이 온다. 채팅으로 말하기는 할 말

이 너무 많으니 통화를 하자는 말과 함께 전달된 전화번호. 솔직히 말해서 딱히 할 말도 없었고 7대 군주

중 색욕을 담당하는 양반이 무슨 일인가 싶기는 했지만...

소희와 김샛별까지 얽혔으니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일 끝나고 얼마나 되었다고...’

고등학생 무렵에는 시간이 너무 안 흐른다고 투덜거렸던 것 같은데, 실제로 일이 너무 연속해서 닥쳐오

면 귀찮기 그지없었다. 중국에 가서 지반을 붕괴시키고 온 지 대략 한 달이 되어가면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다가오는데 일을 또 해야 하나?

-여보세요, 들리십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단말기로 걸려온 전화를 받자 저 편에서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물론, 남성의 목소리였다.

“네, 잘 들립니다.”

이 세상에서는 색욕의 아스모데우스가 남성 캐릭터구나. 어째서인지 조금 서글픈 기분이 들었지만 NPC

의 성별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애시당초 폭식도 여성인데 별로 아름답지도 않으니 전혀 상

관없는 이야기긴 한데.

- 우리 악마들과의 협력을 위해 동맹을 맺고 그 증명으로 우리들의 일을 돕는다고 들었는데요.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쪽 세계가 전뇌 세계던 정말 이세계라 차원 이동을 했던 간에 닭장 같은 현실 세계의 보급 주택에서 에

너지 팩 먹고 사는 것 보다 이쪽 세계에서 영웅의 남편으로 떠받들어지면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 이벤트가 닥쳐올 때 마다 귀찮다는 생각이 든다.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다니는 것도 취미보다는 레벨링에 가까운 거고, 안 죽여도 될 NPC까지 전부 몰살

시키는 것은 귀찮은 서브 이벤트가 발생할까 걱정되어서 그런 거고. 부족 단위를 멸망시키고 씨도 남기

지 않고 학살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고 해도 대부분 내게 돌아오는 이익 때문에 하던 방식이니까.

쉽고 빠르고 편한 소희라는 치트 캐릭터가 옆에 붙어서 전부 처리해줄 것을 생각해 보면 날뛸 마음도 들

지 않는다. 그저 더욱 편하고 더욱 즐겁게 이쪽 세상에 늘러 붙고 싶을 뿐이지. 식도락부터 문화 생활까지

완벽한 현대 배경의 모드인데 타임 어택을 하는 것도 아니고 좀 즐겨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시겠어요?”

- 저기, 중간부터는 못 알아듣겠는데요. 그래도 어느 정도 얼추 이해를 했습니다.

왜 갑자기 말이 술술 나오나 아까 전 생활 스킬을 반복 실행하게 놔두고 베란다에서 가져온 맥주캔을 살

펴보았다. 다른 맥주와 다를 바 없지만 바코드가 있어야 할 부분에 작게 기묘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무슨 지뢰 찾기도 아니고...’

술에 취한 것처럼 감정이 요동친다.

감정은커녕 심장도 요동치지 않는 냉혈 동물 비슷한 흡혈귀 캐릭터로 이렇게 흔들리다니, 악마 놈들이

술 하나는 참 잘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 스킬 노가다를 하면서 나뭇잎 뜯기나 시냇물 뜨기 같은 것이

실패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반 캔 정도 벌컥 들이켰더니 벌써 취한 건가.

술 마셨으니 취한 거 맞나?

화면 속에서는 멍청한 내 캐릭터가 풀을 뽑다 실패하는 꼬락서니를 본 고인물들이 우르르 몰려가다 말고

내 주변에 형형색색의 풀을 던져준다. 흙투성이의 초라한 풀뿌리부터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보석 꽃잎까

지 다양하게.

금의환향하는 영웅에게 꽃잎 세례를 뿌리는 것도 아니고 흩날리는 꽃잎 사이에서 채집 실패를 반복하며

꾸준히 경험치를 쌓아 올리는 내 캐릭터를 보니 괜사리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게 된다. 아무리 쪼렙이라

지만 실패 확률이 너무한 거 아니요 운영자 양반...

-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좆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딸각, 게임에 방해가 되는 전화를 끊었다.

인터넷을 이용한 간이(사기) 계약.

이게 뭐 존나 천재만 쓸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기술도 아니고, 그냥 머리 돌아가는 놈들은 다 하는 짓거리

다. 내가 쓰는 게임 사이트에서는 무슨 다단계 피라미드 방식으로 마력을 빨아들여서 마력이 희박한 현

대 판타지 모드에서 초능력자 사이비 교주가 되는 법 같은 것도 나왔는데 뭐.

유저가 심심하면 쓴다는 이야기는 NPC들 또한 따라서 쓸 수 있는 기술이라는 뜻이고, 어디서 누가 사용

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렇기에 색욕이 하는 짓거리도 이상할 게 없었다. 현대 배경이니까 컴퓨터 다룰 줄

알면 누구나 다 하지.

‘일곱 악마 중에서 최강자가 저 새끼 아니야?’

내가 SNS를 하듯이, 색욕 또한 웹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포르노 닷컴(porn.com), 이름에 빠꾸 따위 없이 직설적인 도메인은 이쪽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합법 야

동 사이트였다. 누군가가 댓글 입력 버튼과 추천 비추천 버튼을 누르면 내게 소량의 생명력을 바치는 것

처럼, 누군가가 그의 사이트에서 야동을 보고 즐기면 그대로 그녀의 실적이 되었다.

기술과 과학이 발전한 세상에서, 가장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은 식탐도 탐욕도 오만도 아닌 색욕이었다는

뜻이다. 전투력이야 조금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아마 계약 실적으로만 따지면 색욕을 이길 수 있는 악마

는 아무도 없지 않을까?

“아니 뭐 그런 미친 새끼가 다 있어?”

“누나, 피부 따가워.”

“아 미안해...”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소희가 맥주를 마시며 씩씩 화를 낸다. 그녀의 불쾌한 감정을 어느 정

도 받아들였는지 양쪽 손등이 밝게 빛나며 신성력을 은은하게 퍼트린다. 신성력에 적응하는 진화를 했는

데도 피부가 따끔거리는 위력.

아니 왜 양손이야?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대체 무슨 깨달음을 얻었기에 용사의 문양이 두 배로 늘어나서 저 짓거리를 하는

지 모르겠지만, OP 캐릭터의 성장에 의문을 가져봐야 내 손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에 말을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씨발 반나절 안 봤다고 MP통, 그러니까 신성력 게이지가 두배로 늘어나는 캐릭터는 양

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거 오늘 밤 잘못 건드리면 누나 내 쥬지가 이상해! 라고 외치게 되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거절했다니까?”

“아니, 우리 쪽 알 거 다 아는 사이라며. 그런데 그런 제안을 한다고? 악마의 윤리관이고 뭐고 인간 관계

를 알고서 제안한 게 더 나빠!”

맥주 캔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려 슬쩍 쳐다보니 정상적인 바코드. 취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화를 내

는 거구나. 나에 대한 독점욕과 보호 의지가 가득한 그녀가 흥분했는지 콧김이 훅훅 나오는 게 참으로 귀

엽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색욕은 내게 그라비아 화보집이나 포르노에 나올 것을 제안했으니까.

어차피 인터넷에서 어그로를 끌 거라면 포르노 남배우가 되는 것이 가장 크게 끌 수 있다. 그게 색욕의 논

리였다. 얼굴이 몇 번 공개되었기 때문에 SNS에서 나름 인지도가 높은 내가 포르노 배우로 데뷔하면 어

마어마한 이슈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영웅의 남편으로 알콩달콩 편안하게 떠받들어지면서 사는 것이지, 얼굴도 모르는 추녀

들의 딸감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색욕은 그저 자신으로 색욕을 발산하는 모든 이들을 긍정하였지만,

나는 외모와 인생이 밑바닥인 이름 모를 다수의 여성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 여자한테 엮일 거라면 그때 그 고등학생 조직원들 데리고 난교 파티를 했지.

그리고 솔직히,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이쪽 세계의 야동은 생리적으로 나와 맞지 않았다. 인간의 성적 취

향이 다양하듯 야동의 종류 또한 다양하기 그지없었지만 대다수의 기본적인 야동은 남성이 깔려서 으흠

앗흥 가냘픈 비음을 내지르는 종류니까.

“하여간, 색욕의 악마여서 그런지 별 이상한 소리를 하네.”

인덕션에서 대충 팬에 지진 쥐포와 육포를 마치 악마 살점 뜯어내는 것처럼 질겅 질겅 씹는 소희의 화를

풀기 위해 바로 옆 자리에 들러붙었다. 팔을 휘감고 딱 달라붙으니 상체에 절로 느껴지는 그녀의 풍만하

고 잘록한 몸.

“흠흠, 그렇게 화 난건 아니고. 아무튼 동맹이 많아지면 좋은 거니까 일을 같이 하진 않아도 불가침 동맹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향신료를 듬뿍 뿌려 코 끝을 훅 찌르는 육포를 길게 잘라 한 쪽 끝자락을 입에 물고 슬그머니 그녀의 얼굴

옆으로 다가간다. 헛기침을 하던 소희가 얼굴 표정을 유지하려 들지만 헤벌쭉 늘어나는 입꼬리는 어쩔

수 없었다.

입술 끝에서 느껴지던 따끈따끈한 육포가 사라지고 뜨뜻미지근한 입술이 슥 느껴진다.

“하여간 뭐... 색욕을 담당하는 악마니 자기 일에 충실했다고 치자고...”

눈은 있는 힘껏 찡그려서 화가 났음을 어필하고 있지만, 헤실헤실 입꼬리가 올라가고 광대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것은 용사도 막을 수 없었나 보다. 그 재미있는 모습에 다시 한 번 잘 구워진 쥐포를 입에 물고

반대쪽으로 그녀의 입가를 툭툭 건드린다.

슬그머니 내 허리를 감싸오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입에 문 쥐포를 툭 떨어트리며 외쳤다.

“아 따가 씨발!”

[작품후기]

낡은 노트북에 Webex랑 R-studio 동시에 돌리다가 죽었읍니다.

과제도 어느 정도 정리를 했고 새 노트북 때문에 지갑도 강제 정리가 되었으니 5월은 최대한 성실연재 해

보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