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소희가 추천하는 초능력자가 가상의 괴물을 때려잡는 MMORPG를 플레이 하는 것은 생각보다 괜찮았
다. 증강현실 모바일 게임과 가상현실 게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딸각거리는 RPG가
순위권 이내에서 몇 년 동안이나 계속 버텨왔다는 것 자체만으로 재미의 보증 수표기도 하고.
완전한 오픈 월드 RPG라던가, 수백가지 초능력의 수만가지 조합이 고증되어 있다든가 하는 사소한 점도
있지만, 가장 마음에 든 것은 SNS에 올릴 거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지역별 이벤트가 끝물이라
귀찮아질 뻔했는데.
[파이로 vs 하이드로??]
게임을 시작해 봤는데 어느 쪽으로 전직할까요?
└ 대세는 파이로죠. 불찍누 딜찍누 모름?
└ 이것은 맞다. 불은 가장 강한 피해. 언제나 환영.
└ 전장 생각 안함? 백날 불지르면 뭐함 다 피하거나 에어로한테 카운터 맞는데
└ 어제 계정 만든 사람이 전장 명작까지 생각하고 만드냐?
└ 결국 엔드 컨텐츤데 봐야지 안보면 뭘 볼래?
한국 이벤트 끝났다고 일본이나 어디 동아시아 순방하면서 돌아다니는 것 보다, 시원한 맥주 한 캔 하면
서 소희랑 알콩 달콩 게임 하는게 낫지. 내가 야밤에 싸돌아 다니는 동안 소희가 꾸준히 해온 게 있어서 따
라잡으려면 좀 열심히 해야 하기도 하고.
지난번 중국 사태 이후로 어느 정도 잠잠해졌던 SNS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은근 슬쩍 자기 캐릭
터 스펙 자랑하는 놈 부터, 이 게임을 안 하는데 댓글을 달다가 들통이 난 녀석까지. 유명 방송인들이 몇
명 이 게임을 하는지 자기 방송인 테크를 추천 겸 홍보하다가 욕먹는 사람도 있고 참으로 다양한 인간들
이 와악 하고 몰려들었다.
한국인 특 : 게임 못한다는 소리에 눈 뒤집어 짐
“우와... 난리가 났네.”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 될 텐데 뭐 저리 싸운데...”
게임은 시간을 보내는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고 적당히 즐기기만 하는 소희의 입장에서는 0.1 프레임과
1DPS를 가지고 목숨 걸고 키보드 배틀을 펼치는 이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가 보다. 중간 중간 이미
지 댓글도 올라오는 게 자기 클랜 홍보인가.
어차피 댓글은 많으면 내게 좋으니까 어지간한 패드립, 섹드립이 아니면 잘라내지 않는 내 SNS의 특성
때문인지 자기 클랜이나 좋아하는 방송인 광고하러 오는 놈들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모바일 게임 이벤트
가 끝물이라 어느 정도 정체기에 멈춰 있던 방문객이 쭉쭉 올라가는 걸 보고 다시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
을 돌린다.
“그냥 얼음 테크 탈래.”
“그래, 게임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거 하면 되는 거지.”
상대방의 발 묶기를 기본으로, 상대방의 방어력을 올려주는 대신 속도를 느리게 만들고 타격 데미지의
배율을 뻥튀기 시키는 빙속성 테크트리를 선택하자, 소희가 무덤덤하게 말한다. 소희는 몇 년간 생각날
때나 이벤트 할 때만 잠깐 게임을 하는 라이트 유저라서 그런지 내게 훈수를 둘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
다.
캐릭터 주변을 감싸고 있던 반투명한 검은색으로 표현되던 염력(念力)이 새파란 색으로 변하며 염빙력
(念氷力)으로 변한다. 검은 양복 정장을 입은 여성 아바타 또한 머리카락 끝자락이 검푸른 색으로 변하
며 은은한 서리 안개를 발걸음 마다 뿌려 댄다.
색감과 아바타는 참 이쁘게 뽑아 놨네. 가상 현실 서버를 유지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로 컴퓨터 게임을 돌
리는 회사 다운 그래픽이었다. 얼음으로 적의 발을 묶고 외피를 얼리면 소희의 근접 캐릭터가 깨트리는
간략한 파티 플레이.
종합 순위에서 밀렸을 뿐이지 MMORPG 순위에서는 굳건하게 1위를 차지하는 게임 답게 사람이 참 많
았다. 사냥터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파티들, 마을 한복판에서 팬티 차림으로 제자리 점프를 하는 캐릭터
들, 대규모 전쟁이 열렸는지 화려한 이펙트를 남기며 우르르 몰려가는 고렙 아바타들.
[불건전한능력자명AS]님의 귓속말 : 님아
‘이건 또 뭐야?’
“슬슬 그만 할까?”
그러는 와중 귓속말이 왔지만 슬슬 게임을 종료하려는 소희의 모습에 무시하고 그대로 게임을 종료했다.
종료까지 10초 걸리는 것은 과거부터 미래까지 RPG 게임의 공통 사항인지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고 상
대방으로부터 계속 귓속말이 왔지만 그대로 컴퓨터 본체까지 꺼버리고 침대로 향했다.
게임이 아무리 재밌다 하더라도 내일 출근은 해야 하고...
침대에서 하는 게임이 더 좋은 건 둘 다 마찬가지니까.
※
게이머의 본능이라 해야 할까, 사람 천성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하늘아, 누나 촬영 다녀오는 동안 음... 잠은 자, 아닌가. 아무튼 적당히 몸 챙기면서 해. 밥은 굶지 말고,
알았지?”
“알았어. 세 끼 챙겨 먹으면서 할게.”
고작 며칠뿐이지만 나는 RPG에 푹 빠졌다. SNS에 업로드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몇 시간 동안 모바
일 게임을 하며 주변 동네에 등장하는 몬스터를 수집하고 다니기는 했지만, 이벤트가 끝나고 할 게 없는
상황이라는 핑계를 대고 MMORPG를 쭉 플레이 한 것이다.
[불건전한능력자명AS]님의 쪽지 : 님아
[불건전한능력자명AS]님의 쪽지 : 제발 읽씹 말고 답장점... 김샛별이 연락 안했나?
[불건전한능력자명AS]님의 쪽지 : 저기요? 제가 지금 한국은 못 가서 그런데 답장이라도
중간 중간 날아오는 쪽지와 귓속말은 전부 무시한 상태로, 어느새 만렙을 찍고 유저들이 ‘숙제’ 라고 부르
는 다양한 컨텐츠를 즐기며 캐릭터의 스펙을 올리고 있었다. 스탯을 올려주는 악세사리부터 최첨단 공중
부양 바이크 같은 탈 것 파밍까지.
정말 재미있다! 라는 감상은 없었다.
그래픽이 참 좋은 독특한 컨셉의 RPG 게임이라고 느낄 뿐.
하지만 내가 빠진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꽤 잘 만들었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소희랑 같이 하다 보니 지
루한 작업도 어느 정도 할만 하다는 점, 그리고 RPG 답게 수집할 게 참 많았다는 점이였다.
명예부터 업적까지, 너무 많은 것들이 있었다.
깡- 깡- 깡! 쇠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내 캐릭터가 망치를 번쩍 들어올리며 환호성 모션을 취한다. 그와 동시
에 채팅창에 확성기로
[남자는여캐지 님이 대장장이 기술을 마스터 하셨습니다!]
라고 굵은 글씨가 적히며 허공에 빵빠레가 울린다.
팬티만 입고 제 갈 길 가던 고인물들이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날리며 우편함에 다양한 금속을 보내주는 모
습을 보며 이번에는 약초 캐는 호미를 장착했다. 소희의 캐릭터인 ‘여자는남캐지’는 시도도 하지 않은 짓
이지만 나는 다르다.
생활 컨텐츠 레벨링에 제한이 없다면 전부 마스터를 찍어야 하는게 골수 RPG 유저의 습관이니까. 왜 그
런 걸 하냐고 물어보는 소희의 말에, 그냥 수치 올라가서 꽉 차는 게 뿌듯하다고 대충 답하고 진행했다.
생활 컨텐츠를 전부 마스터 찍으면, 현질을 해서라도 장비를 맞추고 이계 전장에 나가 명적작을 해야지.
그 다음에는 업적 100% 정도 달성을 해야 아, 내가 이 게임을 어느 정도 즐겨봤구나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불건전한능력자명AS]님의 우편 : 칠죄종 아스모데우스입니다. [별빛 어린 주괴 x99]
[불건전한능력자명AS]님의 우편 : 전화가 차단된 것 같은데 [달빛 어린 주괴 x99]
[불건전한능력자명AS]님의 우편 : 지옥에서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햇빛 어린 주괴x99]
우편함에 들어온 다양한 재료 아이템을 창고에 쑤셔 박은 다음, 그대로 야산으로 향했다. 다양한 변종 짐
승을 사냥하는 캐릭터들 사이로 방어를 위한 얼음 갑옷을 입고 빠르게 산을 누비며 약초를 캔다.
“아니 씨발, 무슨 풀뿌리 뽑기도 아니고 잎사귀 하나 뜯는 걸 실패하고 자빠졌어?”
성공, 실패, 실패, 성공, 실패... 숙련도가 낮아서 그런지 자꾸 실패가 뜨길래 짜증나서 주방으로 향해 씹
을 것과 탄산 음료를 챙긴다. 그와 동시에 웅웅 거리며 울리는 손목의 단말기. 지금쯤 김샛별과 한참 드라
마를 촬영장이여야 하는 소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누나, 무슨 일이야?”
- 하늘아, 너 지금 게임 껐니?
“켜놓고 다른 짓 하는 중인데... 왜?”
슬쩍 모니터에 시선을 돌려보니 처음 보는 남캐가 팬티 바람으로 내 캐릭터 앞에서 제자리 점프를 하고
있었다. 고인물이 넘쳐나는 RPG 세상에서 마을에서 점프하면서 노는 사람이 한 두명 있는 것도 아니라
서 무시하긴 했는데.
- 아니, 자기가 대악마라고 하는 연락이 자꾸 와서 무시하고 있었는데 김샛별이 보증을 해 주네. 너한테
무시당한다고 나한테 하소연하는데... 혹시 따로 연락 받은 거 없어?
단말기로 통화를 유지하며 다시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으니 이제서야 왔냐는 듯 격렬하게 폴짝 폴짝 뛰는
캐릭터. 자세히 보니 불건전한 능력자명이지만 뒷자리 두 글자가 다르다. 본캐가 차단되었다고 생각하고
부캐까지 파서 온 걸까.
“어 누나, 불건전한능력자명? 누구 하나 와서 말 걸고 있긴 하네.”
- 뭐, 김샛별씨가 그 사람도 칠죄종 중 하나 맞으니까 대화 정도는 나눠보라고 연락하라 그러네.
[작품후기]
친구가 하자고 꼬셔서 마비노기를 잠깐 해봤을 때, 제 쪼렙 캐릭터가 물뜨기 실패하는 거 보고 심장발작
으로 뒤질 것 같아서 안한다고 접었습니다.
아무리 랭크가 낮다지만 풀뽑기도 나무베기도 아니고 컵으로 시냇물 뜨는걸 실패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