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189)

새로운 이벤트

1리터짜리 커다란 컵에 든 딸기 바나나와 초코 바나나 슬러쉬를 쪽쪽 빨며 우리는 골목을 걸었다. 과일

주스 아저씨의 넉살을 제외하더라도 우리를 반겨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반겨주면서 선거 유세 나온 정치인과 악수하는 것 마냥 손을 맞잡고 껴안고...

‘그럴 만 한가?’

드라마 잘 보았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거리로 뛰쳐나왔던 천사들을 막아줘서 고맙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기 딸이 그 회사에 일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인신매매단에 잡혀 있던(사실은 사기를 치기 위해 모였던)

남자의 가족도 있었다.

“어이구, 참말로 고마워...”

“뭔 일 난 것도 아닌데 나랏일 하는 사람 붙잡고... 여편네가 늙으니까 눈물만 많아져서는.”

주름살이 가득해 쪼글쪼글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울먹거리는 노파가 손을 잡아오자 다친 곳 하나 없는

데 무에 우냐며 곱게 늙은 노인이 면박을 준다. 두 노부부는 자신들의 손자가 독서실에서 돌아오다 휘말

렸다고 굳게 믿고 있어서, 문득 니 아들 내미는 남창이고 독서실이 아니라 침대 위에서 모범생일 거라고

말하려다 꾹 참았다.

1L짜리 과일 쥬스를 들고, 다른 손에는 떡이니 사과니 시금치니 하는 온갖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들고 골

목 순찰을 마친다. 양 손이 가득 찼음에도 직접 기른 야채다, 손수 찐 떡이다 하면서 자꾸 챙겨주려는 골

목 상인들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그림자 늑대를 불러 아가리에 장바구니를 들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공간 속에 전부 집어넣거나 집에 보내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순 없었다. 골목 순찰이 끝나

고 협회 빌딩으로 복귀하는 그 순간까지 사람들의 카메라 렌즈가 내려가질 않았으니까. 악마들에게 능력

이 공개되었다 하더라도 온 세상에 떠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가진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싫었으니까.

“누나, 드라마 인기 엄청 좋던데 또 출연 안 해?”

“국내 촬영 몇 개 잡혀 있다던데 위치까지는 못 들었어.”

역시나 신기하게도 순찰이 끝나고 교대를 하니 사람들의 시선이 우르르 흩어졌다. 그림자 늑대에 들러붙

어 사진을 찍거나 올라타 보려고 했던 학생들부터 길 가던 노인들까지 전부.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라졌

으며 극히 일부, 서너 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만 남아 우리와 교대한 두 명의 히어로를 구경하였다.

“수고하십쇼~”

설렁설렁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두 명의 히어로의 모습을 등지고 협회 건물로 향하는 길은 퇴근 길을 맞

이하여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첨단 과학으로 자기부상 열차가 돌아다니고 뭐가 휙휙 날아다니는 세상이

되었지만 결국 출퇴근길에 사람 몰리는 것은 똑같다니.

교통수단이 발전했지만 인구도 엄청나게 늘어나서 그런지 여전히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지하 밑에

서 씽씽 달리고 있을 자기부상 지하철에도 콩나물 마냥 사람들이 가득 차 있겠지. 그런 점 또한 히어로가

인기 있는 직종이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일단 서류 처리로 들어가게 되면 근무지 근처의 아파트를 싸게 공급해 주니까. 나랑 소희도 그런 식으로

인근 아파트에 들어가 있는 거고. 아니면 점심쯤 출근해 오후 순찰 야간 서류업무 뒤 10시 넘어 퇴근하는

방식으로 지내는 사람도 있고. 그러고 보니 아파트를 습격했던 놈들은 뭐였지.

그렇게 사소하게 벌어졌지만 결과를 듣지 못한 이벤트를 떠올리고 있으니 옆에서 슬그머니 팔을 감아온

다. 옆 얼굴을 보니 발그레한 뺨을 숨기지 못하는 소희.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가 히죽거림을 필사적

으로 참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유, 그렇게 좋아?”

“그럼, 좋지.”

숨길 생각은 없었는지 대놓고 한 질문에 소희가 배시시 웃는다. 카메라 앞이라고 근엄한 표정을 연기라

도 한 걸까. 이제 인파 속에서 관심 주는 사람 하나 없으니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가는 소희의 표정

이 정말 행복해 보여서 용사가 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사실 20살 되자 마자 히어로가 되어서 빌런 전담반에 들어가고 싶었거든. 어린 마음에 경찰과 협력해서

범죄자들을 잡아들이는 초능력자들이 정말 멋져 보이기도 했고, 준비하고 있던 대회에 출전이 취소되어

서 목표가 필요하기도 했고...”

“그래요? 근데 나 만날 때에는 학교에서 초능력 공익...”

“근데 집안 어른들이 전부 반대해서 못했거든.”

웃는 얼굴이 기분 좋아 보여 가볍게 물었는데 훅 하고 생각보다 무거운 대답이 돌아온다. 어깨를 슬쩍 으

쓱거리는 그 가벼운 모습에서 한 점의 걱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집안 어른이라, 그때 그 S급 초능력자 할

머니?

아니, 그보다 분위기 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묵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던지는 걸까? 그냥 늦게라도 꿈은 이루어진다~ 같은 가벼운

대응을 한 다음 저녁에 맥주를 마실지 신제품 과일 막걸리를 마실지 고르게 할 생각이었는데. 슬그머니

옆모습을 계속 보아도 그녀의 말은 멈추질 않았다.

“공부도 포기하고, 친구들이랑 게임하는 것도 포기하고 운동만 죽어라 했는데 갑자기 초능력자가 된 거

야. 그래서 준비하고 있던 대회는 취소되었지, 철없는 어린 시절이라 나 때문에 학교 팀에 민폐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은 졸였지...”

“그래서요?”

마음은 가벼워 보이길래 추임새를 넣었다. 뜬금없는 묵직한 과거 고백에 머리가 핑핑 돌아가지만 유의미

한 대답은 돌아오질 않는다. 내가 미연시 마스터도 아니고, 외모와 정력과 마법으로 여자한테 호감을 샀

지 이런 대화로 호감도를 쌓아 본 적은 거의 없으니까.

더군다나 남녀 역전 세계잖아?

“뭐... 고등학생 때 초능력 훈련 받다가 스물 되자 마자 빌런 전담반으로 들어가려고 했었지. 그런데 이게

마음대로 하지는 못 하더라고.”

우글거리는 사람들을 지나쳐서 빌딩 내부로 들어온다. 고속 엘리베이터 속에서도 그녀는 평온하게, 마치

저녁 반찬으로 베이컨을 구울까 햄을 구울까 고민하는 말투로 이야기를 한다. 그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

도 잠시.

‘에이 씨, 그냥 말하게 냅두지 뭐.’

이게 미연시도 아니고 대화 한 번 잘못 했다고 연인 관계가 파탄 나겠냐는 생각에 마음을 편히 비웠다. 그

동안 같이 살아온 정이 있는데, 이런 대화에서 적당히 추임새만 넣는다고 난리가 나겠어. 연애 시뮬레이

션이면 호감도 -20 이런 게 박혀서 관계가 훅 사라질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근데 뭐... 우리 할머니 말고도 정치적으로 엮인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바로 빌런 전담팀에 들어갈 수 없

게 막더라고. 몰래 지원까지 했는데 시험 보기도 전에 탈락 공지가 문자로 오는 거 보고 전부 포기했지.”

그래서 그냥 이야기를 들었다.

순찰 철수 코스에서 협회 빌딩, 집에 돌아와서 식사를 할 때까지. 그녀는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속에 쌓

아 뒀던 말을 끝없이 뱉어냈다. 끝끝내 맥주를 마시다 냉장고 구석에 박아 둔 과일 막걸리까지 전부 마시

면서.

도수 10도 언저리로 취하지도 않을 텐데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

“누나, 취했어?”

“아니이~ 그건 아니고...”

취했네, 쉬벌.

코 끝을 찌르는 달달한 냄새. 늘 맥주만 마시고 가끔 과일 썰어서 와인 가득 담군 샹그리아로 마시는게 전

부인 우리집 냉장고에 왜 막걸리가 종류별로 있나 했더니, 한 장의 쪽지가 술에 취한 소희의 팔꿈치에 밀

려 팔랑팔랑 떨어진다.

[신제품으로 준비해본 술일세. 남자가 좋아하는 단 맛과 여성을 위한 정력을 모두 담았지]

기분 나쁘게 따봉 표시를 날리는 이모티콘이 짜증나 쪽지를 불태웠다. 우리 집 냉장고에 식재료를 처박

는 녀석이야 폭식 한 명 밖에 더 있겠는가. 김샛별은 명품 가구와 가전제품, 폭식은 먹거리와 술, 탐욕은

상품권과 돈.

‘이걸 좋다고 봐야 해, 말아야 해?’

문득 빠꾸 없이 나와 소희 계좌에 1억씩 꼬박꼬박 이체하는 미치광이 악마 때문에 세금 문제니 히어로의

자질이니 청문회니 별 이야기가 다 나오면서 소희가 뒤집어 엎으려던 사건이 떠올랐다. 역시 있는 집에

서 태어나서 그런지 통장에 억 단위 돈이 마구잡이로 박혀도 그런 걱정을 먼저 하다니.

“아무튼 대회도 못 나가고~ 선수도 못하고~ 히어로도 못하고~ 그냥 초능력자 전형으로 적당한 대학교

들어가서 적당히 지내다 적당히 몸만 만들고... 진짜 인생 대충 살았는데...”

소희의 술주정이 계속된다. 둘 다 취해서 침대에서 술내음 풍기며 엉겨 붙는 것은 기분 좋지만, 한 쪽만

일방적으로 취해서 술주정으로 웅얼거리는 일은 그닥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꾹 참고 견딜만 했던

이유는.

“하늘아, 누나가 너 믿는다... 알지? 누나가 너 지켜 줄게...”

소희가 대충이나마 숨겨왔던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다는 것일까.

‘그나저나 쉬벌, 지하 도시고 뭐고 다른 여자랑 잔거 빼고 다 들켰네.’

[작품후기]

지난학기때 교양 철학을 들었는데, 교수님 수업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교재도 없고, 그냥 고대 철

학자들 논리에 따라 'XX는 옳은가?' 같은 문장 서너개 던저주고, 원하는 사람이 각 문장에 따른 자신의 생

각을 3분 발표. 발표를 듣고 나서 학생들이 질문.

발표를 하면 추가 점수, 발표자에게 질문을 하면 추가 점수. 과제 없고 중간고사 없고 기말고사는 자신이

했던 발표를 정리해서 주장문으로 만들기. 공부 안해도 머리만 잘 굴렸더니 A+ 나오는 개꿀 과목이라 이

번 학기에도 그 교수님의 교양을 신청했는데...

지난 학기에는 단답형 문장을 던져주셨는데

이번 학기에는 고전 문학을 던져주시고 토론을 시킴...

꿀 연속 두번 빨려다 개박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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