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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하고, 눈이 아리는 섬광이 퍼져 나온다.
“저게 고작 A급이라고?”
“파괴력... 은 잘 모르니까. 아무튼 외형 하나는 끝내주네.”
“저 정도로 정밀한 능력 사용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데!”
소희가 날개를 펼치고 바닷가를 날고 있었다. 파괴력이 필요 없어서 날개와 레이저 빔에 온통 심혈을 기
울인 상태로. 그걸 해안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촬영진들이 열심히 감탄사를 외치고 있었다. 근데 저렇게 빛
나는데도 카메라에 잘 찍힐까.
부정적인 감정 하나 없는 순수한 감탄. 사람보다는 예술품을 대하는 것처럼 다들 카메라를 잡고 호들갑
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폭식과 김샛별이 불러 모은 촬영진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조금 멀리 떨어
진 나도 이렇게 번쩍거리는게 보이는데...
“저게 뭐지?”
“초능력자인 것 같아. 대단한 걸?”
조금은 어색한 번역체의 말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왁자지껄하게 들려오는 수십명의 중국어를 순
식간에 번역하고 있으니 성능은 좋다고 봐야겠지. 해안 도로가 있고, 인근에 해수욕장이 있다 보니 그 쪽
에서도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소희의 얼굴이나 촬영진은 볼 수 없지만 거대하게 뻗쳐 나간 백색 날개나, 바다 위를 가로지르며 궤적을
남기는 새하얀 레이저는 대낮에도 멀리서 보일 정도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으니까.
- 들리시나요?
“예, 잘 들려요.”
그렇게 화려한 드라마 조연 데뷔를 준비하는 소희를 등지고 나는 조금 더 내륙으로 향했다. 파도 소리와
사람들의 감탄사가 사라지고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자동차 소리와 퉁탕퉁탕 철근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
리.
“공사 현장만 보면 거의 도시 계발 계획 같은데요?”
- 그러니까 막아 달라는 거다. 우리 애들이 가면 깔끔하게 처리되지만 너무 오래 걸려.
- 저 정도 규모는 되니까 대악마들이 움직이는 겁니다.
내가 내뱉은 의문에 통역기 겸 통신기인 무선 이어폰에서 두 악마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공사 현장을
가득 메꾼 사람의 기척만 보아도 도시랑 다를 바 없는 수준. 하늘 높이 치솟은 공장의 뼈대만 보아도 이게
공장인지 빌딩인지 의문이 생긴다.
어느 쪽에서는 로봇이 자재를 옮기고 있지만, 결국 사람의 손이 필요하기도 한 것인지 공사장에는 인부
들이 잔뜩 있었다. 헐렁한 반팔 셔츠나 나시티가 땀에 푹 절어 있는 상태로 공사 자재 위에서 물을 마시며
쉬고 있는 여자들.
‘뭔가... 컨셉 AV 보는 것 같은데.’
모드를 만든답시고 고전 성인물을 들고 오는 녀석들이 보여줬던 것 중에 비슷한 광경을 봤었던 것 같다.
외형도 천차만별이라 반쯤 누드에 가까운 여자들이 가슴을 덜렁이며 돌아다니지만 그런 감상이 전부. 외
형이 꽤나 빼어난 여성이 헐렁한 나시티를 입고 잔근육이 붙은 팔뚝과 옆 가슴을 노출한 모습을 보니 조
금 꼴릿하기는 하지만...
“지도로 보는 거랑, 직접 보는 건 역시 다르단 말이죠.”
- 대국의 위엄 아니겠는가?
- 큰 만큼 빌어먹을 짓도 많이 하죠. 뒤처리를 하기 쉽다는 이점이 있긴 하지만.
눈 앞에 있는 공장단지도 어지간한 아파트 단지 마냥 거대하기 그지없는데, 그 뒤로 줄줄이 서 있는 건축
중인 건물들. 높게 뻗은 굴뚝 모양도 있고, 넓게 뻗은 창고도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아파트 서너 단지
는 되어 보일 방대한 양인데, GPS 화면에는 이 것이 일부분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대체 이게 뭡니까?”
- 대충 설명하자면, 해안과 내륙 사이의 어중간한 지역 하나를 통째로 공장단지로 삼으려는 거지. 관광지
로도, 거주 지역으로도 쓰기 애매하니 오염이 심각한 공장을 전부 모아 놓겠다는 심보로 말이야. 저게 완
공되어 서해로 오염물질이 흘러가게 된다면... 매일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오염물질의 1.7배만큼 오염 물
질을 추가 생산하겠군.
- 말이 대국이지, 통째로 폭싹 무너트려도 돈 있는 놈들이 슬금슬금 기어올라 오는 행위가 반복되니까 말
이죠. 지방 정부랑 손잡고 까부는 녀석들을 쓱싹 하고, 이익은 중앙 정부에 넘기면 탈이 없는 건 편하긴
하지만.
말만 들어보면 정체를 숨긴 정의의 사도가 따로 없었다. 본질은 어장에 폐수를 흘려보내는 공장에 불을
지르는 어부와 같은 꼬락서니지만, 결국 인류에게 이익이 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현대
아이돌 버전에서도, 현대 초능력자 버전에서도 중국은 늘 오염 물질로 지랄이 나는 국가네...
- 화려해도 상관없고, 얼굴을 노출해도 상관없습니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때려 부수세요. 인부를 전부 죽
여버려도 상관없네요. 솔직히 시체를 치우는 게 사람 입을 막는 것 보다 쉬우니까요. 살인 멸구 알죠? 범
위를 벗어날 것 같으면 다시 통신하겠습니다.
- 화끈하게 부탁하네! 어중간하게 뼈대를 남기는 것도 철거 기간이 걸려서 좋긴 하지만, 다 때려 부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이어폰은 두 악마의 속마음이 듬뿍 담긴 말을 마지막으로 조용해졌고, 귓가에는 공사장 인부들의 푸념만
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젠장, 고철 덩어리들 때문에 몸값이 내려가는 게 말이나 되나.”
“뭐 어때. 지금 안 벌어 두면 이제 사람 쓰는 공사판은 사라질 겨.”
“요전에 들렀던 곳에 있는 사내놈 물건이 실하더라고.”
“또 술집에 탕진하니 공사판이나 돌아다니는거 아니우?”
막노동을 하는 인부들 답게 걸걸한 입담이 귓가에 파고든다. 아줌마들의 음담패설에 어색한 얼굴로 고개
를 돌리는 아가씨들의 얼굴. 평소라면 흥미를 느껴 엿듣거나 슬그머니 끼어들어 볼 생각이 있었겠지만...
‘이건 못 참지.’
지금은 눈요기 따위를 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가상현실은커녕 증강현실이 첫 발걸음을 떼기도 이전에도 게이머들은 폭력적
이고 파괴적인 게임에 매료되었었다. 의미도 없는 2D 그림 쪼가리와 픽셀로 이루어진 건물을 아무런 목
적 없이 부수는 것을 열중하기도 하였으니까.
차량을 폐차하고 건물을 부수고 도시를 붕괴시키는, 아무런 목적 의식 없는 파괴.
게이머라면, 남자라면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되는 행위였다. 증강현실이 나타나기 전 부터, 가상현실이 주
류를 이룬 지금까지 계속. 실제로도 가상현실 게임의 인기 순위에는 거대 괴수가 되어 도시를 때려 부수
거나 철거반이 되어 폭탄으로 빌딩을 무너트리는 미니 게임들이 은근히 순위에 올라와 있기도 하고.
나 또한 그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때려 부수는 미니 게임을 심심할 때 가끔 즐기기도 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지간한 도시 하나의 면적을 홀로 철거하게 생겼으니,
‘아 씨바, 폭탄으로 갈까, 부식성으로 갈까?’
문득 뒤처리가 어려우면 공사 재개가 힘들 거라는 말이 떠오르니 가슴이 두근대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사람들을 부려먹는 왕쑨(王孙) 소장은 재수가 없는 놈이고, 뺀질거리고 작업량도 자신보다 적지만 기계
자격증 하나로 돈을 더 많이 벌어가는 정(郑)씨 자매도 짜증나기 그지 없었다. 휴식 시간은 아니지만 슬
그머니 구석으로 빠져 쉬고 있으니 젊은 년들 몇이 자신 쪽으로 온다.
“하여간, 소장놈은 융통성이 없어.”
“사내놈이 공사판에 와서, 에휴... 기계 때문에 일자리도 줄어가는데 사람끼리 좋은 게 좋은 거지.”
담배를 피우며 소장을 씹으니 알랑방귀나 뀔 줄 아는 젊은것들이 같이 혀를 놀린다. 그 모습이 퍽 우스꽝
스러워 기분이 잠시나마 풀리지만, 정말 잠시일 뿐. 지금이야 커다란 공사판이 하나 열려서 지역 몇 개를
건너와서 푼돈이나 만지지. 이 일이 끝나면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한가득 차오른다.
“근데 저거... 조금 이상한데.”
“뭐가?”
“건물이 조금 낮아진 거 아니야?”
자신을 추켜세우던 젊은 것들이 하는 잡담에 기가 찬다. 현장을 감독하는 로봇과 실장의 눈을 피할 수 있
도록 자재 보관용 텐트로 만든 그늘을 알려줬더니 엉겨 붙는 년들이었지만, 대낮부터 술을 퍼먹기라도
한 걸까. 농땡이를 피우는 요령은 있어도 술을 마시면 로봇은커녕 왕쑨 소장의 눈을 피할 수 없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낮술은 마시지 말라... 했?”
역정을 내고 자리를 피하려 하는데 햇빛이 눈을 찌른다.
“이게 무슨...?”
눈 앞에서 우르릉 소리와 함께 건축 자재가 사라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텐트와 함께 아래로 내려앉
고 있었다. 가림막이 되어주던 텐트가 사라지니,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깡통 로봇들과 비명을 지르며 바
닥에 주저 앉은 소장놈이 보인다.
“이게, 이게 무슨?”
“아무튼 뛰어어엇!”
“나, 나 좀 꺼내줘어어!”
젊은 놈 하나가 황급히 자재 사이에서 뛰쳐나간다. 그 너머로, 자재를 옮기려다 함께 발이 묶였는지 지면
아래로 꿀렁꿀렁 삼켜지는 몇몇 인부들. 내륙 12구역에서 먼 길 왔다는 곽씨, 술이 남으면 빼돌려주는 양
씨. 아는 얼굴부터 모르는 얼굴까지 전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아줌마, 핸드폰! 영웅들 불러요 당장!”
얼굴만 간신히 아는 젊은 놈 하나한테 끌려가며 휴대폰을 누르지만 마치 이 모든 상황이 꿈처럼 느껴질
뿐. 통화음 너머에서 들려오는 히어로의 목소리가 멀어져가며, 시야가 점점 낮아짐을 느낀다.
[작품후기]
폐차 플래쉬 게임, 마크에서 TNT 터트리기, 건물 부수기.
의미 없이 때려부수는 거 참 가끔 하면 묘한 재미가 있죠.
계속 할 이유는 없지만 가끔 하면 재밌습니다.
솔직히 고질라나 킹콩이 되어서 도시를 부수는 가상현실 게임 나오면 무조건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