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술에 취해 몽롱해서 그런지 무기력함을 느낀다.
“후우, 하늘아, 하늘아... 내가 지켜 줄게.”
웅얼거리며 내 몸 위에 들러붙은 그녀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불 대신 나체의 여인이 몸을 휘감아 오는 상
황에 조금 갑갑함을 느껴 꿈틀거렸지만, 그 반동으로 꽉 껴안아 버리니 힘으로 풀어낼 수 없었다. 취기도
오르고 쥐어 짜여서 피곤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힘을 빼고 누웠다.
“하늘아, 누나만 미덩...”
중얼거리는 소희의 목소리. 용사의 감각이라면 내가 밖에 싸돌아 다니는 것쯤은 잘 알았겠지. 지하 도시
에 향했다던가, 거기서 여자랑 놀아 재꼈다는 사실은 모르겠지만 중간 중간 기척이 사라졌음은 알고 있
었을 것이다.
그녀가 평범한 세상의 여성이라면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녀?’ 라고 의심했겠지.
하지만 이 세상은 남녀 역전 세상에, 히어로와 빌런이 버무려진 세상이다. 소희는 나보다 연상이며, 근본
있는 금수저 히어로 집안에서 자란 체육계 여성. 나고 자란 배경부터 성장 과정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남자는 지켜줘야 할 존재’ 라는 명제를 머리에 집어넣기 충분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마초적 사고를
지녀 ‘남자는 집에서 빨래나 해!’ 같은 마인드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연상이 연하를, 여자가 남자를, 체육인이 민간인을, 히어로가 피해자를.
이런 관계 속에서 그녀는 나를 사랑함과 동시에 보호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모성애라 봐도 좋았고, 보호
욕구라 봐도 상관없었다. 동정심에 가까운 보호 욕구가 어우러진 사랑. 조금은 일그러졌다 보여도 ‘용
사’인 소희에게는 직빵인 감정.
애당초 지하 도시에서 흡혈귀라는 사실때문에 강간당한 척 피해자 연기를 내가 했으니까 말이지.
첫 살인때도 그랬다. 아무리 학교에 테러리스트들이 쳐들어왔다지만, 초능력자의 전투를 처음 하는 소희
는 온갖 능력으로 적을 찢어 죽였었다. 빛의 능력으로 건물 천장을 뜯어버렸을 때 놀라지 않았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니던가. 마주치는 사람을 반쯤 이성을 잃고 죽이다가, 화를 참고 건물만 부술 수 있게 되었
으니까.
아마 용사로 선택된 사람의 내적 갈등이 아닐까.
왜, 맨날 히어로는 어둠의 유혹에 시달리고 그러잖아. 그녀에게 있어서 갈등은 나, 이하늘이라는 남자애
다. 사실 존나 강하고, 어지간한 히어로는 문자 그대로 잡아먹을 수 있는 괴물이지만 그녀 앞에서는 가녀
린 모습만 보여줬으니까.
믿고 자립시켜야 한다는 선한 의지와, 접근하는 새끼들은 다 죽여버린다는 과보호의 악한 의지. 대충 그
런 내적 갈등에 시달리니까 친구라고는 거의 없는 아싸 쉐끼가 야밤에 혼자 싸돌아 다녀도 그냥 다녀오라
고 냅두는게 아닐까. 물론 다 뇌피셜이지만.
그렇게 쌓아 둔 감정이 지금 흘러 넘치고 있었다.
“하늘아...”
“알겠어요, 누나.”
고량주를 베이스로 온갖 약재를 달여, 마법적 처리까지 한 독주 반 병. 고작해야 몇 잔으로 용사를 취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안사불성이 되어서 축 늘어졌다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취기를 느끼며
뽈뽈 돌아다니니 문제.
풀어 헤쳐진 한푸인지 쿵푸인지 하는 복장이 반쯤 찢기면서 더 벌려진다. 이제는 정말 찢긴 옷 위에 드러
누워 있는 상태. 그 상태에서 소희가 굴러서 다가오니 젖은 피부에 옷이 들러붙으며 소희에게 돌돌 말린
다.
옷 하나가 사람 둘을 휘감는 상황이니 벌려지다 못해 찌지직 소리를 내지만 이미 취해버린 그녀는 그런
사소한 일 따위는 생각치도 않으며 그대로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언제 느껴도 즐거운 풍만한 가슴의 감
촉을 즐기다 숨을 쉬기 위해 몸을 비비적거리니 간지러운 듯 살짝 힘을 풀어주었다.
마음 깊숙히 가라앉은 감정의 찌꺼기가 술기운을 타고 둥실 떠오른 것이 지금의 상황. 하지만 그닥 불쾌
하지는 않았다. 만약 술에 취한 남자가 내게 ‘남동생아, 너를 지켜줄게’ 라면서 알몸으로 엉겨 붙으면 다
리 사이를 발로 차버리겠지만.
알몸의 여자가 자신의 몸을 엉켜오는데 어느 남자가 싫어할까?
아니, 이쪽 세계 남자들은 싫어하려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드러누워 있으니 기분 좋은 감촉이 계속해서 느껴진다. 푹신하기 그지없는 침
대 위에서 매끈한 나신이 이리저리 몸을 부비니 그 풍만한 가슴이 내 팔뚝과 가슴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
고 있는 것이다.
몽롱하게 들뜬 머리가 조금씩 식어가는 게 느껴진다. 말이 반 병이지, 내가 따라줬으니 더 많이 마신 것은
소희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멀쩡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취기가 가시고 몽롱함이 사라지자 그 빈
자리로 몰려오는 것은 피로와 졸림.
‘악마 새끼들의 술은 위험...’
뺨 위에 철퍽 얹어진 소희의 머리카락을 치운 기운도 없이, 나는 그저 밀려오는 잠기운에 몸을 맡겼다.
※
잠에서 깨어나 숙취 하나 없는 독주에 감탄하며 눈을 뜨니, 소희가 빛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누나, 그건 뭐야?”
무슨 소독제를 뿌리는 것 마냥, 덩그러니 놓은 샤워기 헤드를 이리 저리 흔들어 대면서 말이다. 어젯밤의
격렬한 흔적 따위 없이 샤워기 헤드만 달랑달랑 들고 다니는 모양새가 마치 PVP 대회때 다른 놈들이 입
은 아바타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묘한데.
“아? 화장실에 설치되어 있던데, 마력을 넣으면 정화시키는 에너지가 나온다고. 이거 봐, 진짜 닿으면 다
정화된다.”
온갖 게임 모드를 겪어왔지만 샤워기 헤드를 들고 손에 마력을 흘리니 빛이 방울져서 사람의 몸을 정화하
는 꼬락서니는 본 적이 없는데. 사제 놈들이 자기 지팡이에 외형 변경으로 온갖 물건, 구체적으로 귀이개
부터 형광색 딜도까지 휘두르고 다니는 건 봤었지만 진짜 샤워기 헤드는 처음 본다. 어중간하게 정상적
이어서 그런가?
문득 저 데이터도 수집가 애들한테 팔면 비싸게 팔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른 놈들은 이미 쓰고 있을지도.
나도 쓰겠다는 의미로 팔을 쭉 뻗어 펼치려다, 문득 내 마력색이 떠올랐다. 흡혈귀의 붉은색에 지옥 마법
의 유황불 색, 거기에 소희의 피를 빨고 천사를 한 마리 통째로 먹어 생긴 백색. 마법을 사용하는 위력은
훌륭하기 그지없지만, 순수하게 마력을 방출하면 외관상으로 좀 많이 그렇다.
까놓고 말해서 똥색이니까.
그대로 침대에 누워 팔다리를 쭉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뻐근한 시원함.
2% 부족한 느낌에 절로 칭얼거리듯 소희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뿌려줘...”
“그래. 어째 취했던 것 같은데 숙취는 없네. 고급 술은 숙취가 없다더니 진짜인가?”
“그냥 누나가 통째로 정화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가? 물리적 더러움 말고 육체의 피곤함 같은 것도 다 정화하면 사라지나?”
마력을 담으면 정화의 기운으로 변화시켜 흩뿌리는 마법진이 설치된 무선 샤워기. 빗질이라도 하듯 슥슥
뿌리면 엉망이던 소희의 머리카락이 빗질이라도 한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고, 술 처먹고 뒹구느라 주름
진 옷자락도 다림질한 것 마냥 펼쳐지는 게 성능은 확실하지만...
슬그머니 손에 맺혀진, 잿빛과 붉은 황토색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내 마력의 색을 보니 직접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색만 보면 아무리 잘 쳐봐야 머드팩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임프 토사물로 샤워하는 꼬
락서니니까.
룩도 성능이라더니, 그 말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어.
“그래, 그대로 누워 있어... 오, 침대 정리도 된다.”
습관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탈탈 털더니 머리카락이 찰랑이는 걸 보고 신기해 하던 소희가 샤워기를 붙잡
고 내게 다가온다. 넘쳐나는 마력이 공급되고 있는지 빛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상태 그대로. 그 때문
에 호텔 거실에서 침실까지 그녀가 걸어오는 길만 번쩍거리며 광이 나기 시작했다.
마룻바닥은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카페트는 먼지가 다 사라졌는지 뽀송뽀송하고 색감이 살아나며 난장
판이 된 이불은 햇살에 말린 냄새가 나며 주름이 쫙 펴졌다. 어째 누워서 샤워기 빛방울을 맞으니 목욕탕
에서 목욕을 당하는 대형견이 된 것 같았지만.
‘성능 하나는 끝내주네...’
천사를 통으로 삼켜서 그럴까, 용사의 신성력이 기분 좋게 온 몸으로 퍼진다.
“이대로 햇빛 아래에 널어줄까?”
“나 흡혈귀야 누나...”
“어차피 안통하잖아. 그게 뭐더라? 데이 워커?”
흡혈귀에 대해서 어디 인터넷에서 찾아봤는지 뜬금없는 단어를 꺼내는 그녀. 뭐, 낮에 걸어 다녀서 데이
워커인가. 사실 레벨이 오르고 스텟이 오르면 그냥 면역이 되는건데. 인간도 갓난애기때 먹으면 독이 되
는 음식을 어른들이 보양식이라고 먹는 것과 비슷한 이치.
“뭐, 그래도 햇빛 직접 받으면 뜨거~”
하지만 설명하긴 귀찮아서, 나를 이리 저리 뒤집으며 샤워기로 씻겨주는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작품후기]
대충 하루 두편 쓰는 작가들 존경한다는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