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89)

새로운 이벤트

인간 표지판처럼 호텔 곳곳에 서 있는 사람들. 어느 정도 발달한 A.I.가 서비스 산업을 슬슬 차지해 나가

는 이 최첨단 시대에서 우스꽝스러운 업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이야... 깍듯하네. 교육이 엄청 잘 되어있다.”

“깍듯한 정도가 아니지 않아?”

식사를 마치고 방을 내준다는 말에 두 악마와 헤어져 홀에서 전망 좋은 꼭대기 층까지 안내받는 와중에도

줄줄히 서 있는 종업원들을 보고 대화를 나눈다. 흡혈귀의 성능 좋은 눈에는 저 머나먼 복도에서 아무도

없는 와중에 마네킹처럼 각 잡힌 상태로 서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떻게 딴청을 피우는 사람이 하나 없지?’

이 정도 충성심은 광신도들이나 황제 직속으로 훈련받은 엄격한 요원들 정도에서나 보이는데. 소희 또한

용사의 육체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혀 흐트러짐 없는 것이 신기한지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호텔 복도에서, 그림처럼 미소 지은 상태로 뻣뻣히 서서 벽을 바라보고 있는 수십명

의 인간은 정중함 보다 오싹함을 느끼게 하기 충분하니까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방 하나는 좋네.”

“전세기를 운영하는 악마들인데 호텔 방 정도야 최고급으로 꾸며 놨겠지... 그런 호텔 방 가구가 우리 집

이랑 비슷한 건 좀 웃기긴 한데.”

소희가 툭 내뱉은 말에 슬쩍 호텔 방 가운데 있는 소파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이거 우리 집 소파랑 똑같은 거 아닌가?”

푹신푹신한 카페트 위에 떡하니 놓여 있는 고급 소파. 문제가 있다면 저 카페트와 소파가 우리 집 마루 위

에도 있다는 점일까?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우리 집의 편안함을 느끼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김샛별과 폭식, 별로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았으니까. 이런 명품 같은 거 거래도 하고 사는 걸까. 우리 집

에 초호화 호텔 가구가 있다고 봐야 하나, 초호화 호텔에 우리집 가구가 있다고 봐야 하나.”

“뭐 좋은 게 좋은거지 누나. 밤을 편하게 보낼 수 있겠네.”

슬쩍 침대쪽으로 향해 걸터 앉으니 소희의 얼굴이 붉게 변한다. 침대 또한 우리집의 것과 사이즈만 조금

다를 뿐, 전체적인 디자인이 비슷한 게 같은 회사에서 제조한 것 같았으니까. 침대 위에서 옆으로 한 바퀴

구르니 소희 또한 내 옆에 풀썩 드러눕는다.

푹신한 감촉을 만끽하며 나란히 드러 누워 있으니 뒤집힌 시야 너머로 옷장이 보여 자리에서 일어나니 때

마침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방에 들어 온지 10분이 지나질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

어보니 등장하는 부담스러운 쟁반.

“사장님께서 보내신 룸 서비스입니다.”

“...예, 잘 받았다고 전해주세요.”

말끔한 정장을 차려 입은 여성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자 남은 것은 트레이에 실린 은색 쟁반 하나.

사람 머리통 두개는 들어갈 법한 거대한 은색 쟁반의 뚜껑을 치우니 김이 모락 모락 올라오는 썰린 오리

고기가 있었다. 소스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무림 모드 플레이를 할 때 자주 본 북경 오리와 술병 하나.

“이야... 이건 또 뭐지? 또 이상한 음식은 아니겠지?”

“술은 모르겠지만 고기는 오리고기야, 베이징 덕.”

“그거 껍질만 먹는 거 아닌가?”

“껍질 아래에 붙은 살을 먹고, 나머지 날개 같은 부분은 탕으로 끓여서 먹는... 여기 있네.”

쟁반이 놓여 있던 아래층을 보니 뚜껑이 덮힌 작은 그릇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새하얀 국물의 오리

탕을 비롯해 오리를 싸 먹는 용도인지 다양한 양념과 함께 서빙 된 전병까지. 소스도 그렇고 오리 탕도 그

렇고 느끼해 보였지만 술병의 마개를 제거하니 코를 훅 찌르는 독한 냄새에 느끼함이 싹 가셨다.

“응? 그건 뭐야?”

“아니, 북경 오리 맞다고 쪽지가 있었네. 싸먹으래.”

슬그머니 구겨서 거실 구석의 쓰레기통에 종이 쪽지를 던지는 그녀의 모습에 슬쩍 시선을 집중하니 쓰레

기통으로 날아가는 종이 쪽지 사이로 ‘정력’ 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북경 오리가 보양식이라지만 그건 아

닌 것 같고... 술이 고량주에 약재를 달인 약술인가?

꽝이 가득한 호텔의 홀에서 주전부리를 집어먹지 않아서 그런지, 식지도 않고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는

잘 다듬어진 북경 오리를 보고 있으니 허기가 몰려온다. 그건 구더기 치즈에 쇼크를 받았던 소희도 마찬

가지인지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소파 앞 테이블에 음식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몸이 뜨겁고 머리가 몽롱하다. 이런 감각은 참으로 오랬만에 느껴보는 것 같은데.

“후우, 하늘아... 다른 건 어때?”

“음, 응?”

“많이 취했네...”

목덜미에서 소희의 속삭임이 느껴진다. 상황 파악을 하려고 고개를 돌리니 어지럽혀진 테이블이 시야에

들어온다. 널부러진 술병과 조금 흘린 소스들. 싸먹다 남은 전병과 뼈만 남은 오리들.

‘이건 또 뭐야...’

슬쩍 시선을 내려보니 내 옆에 들러붙은 소희의 매끈한 나신과 특이한 복장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파란

색 나풀나풀한 옷자락. 풀어 헤쳐져서 그런지 한복 비슷해 보이는 옷이었지만 조금 다르게 생기긴 했다.

아니 그 전에, 지금 소희도 나도 이렇게 반 쯤 정신줄을 놓은 상태?

‘아니 씨발, 한 병 마시고 이렇게 취했다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술 한병을 둘이서 나눠 마시고 취해서 엉겨 붙었던 기억은 대략이나마

남아 있었다. 술은 악마가 줬다고 했던가. 아닌가, 향신료였나 와인이었나. 헝클어진 기억을 부여잡으려

하니 이마가 지끈거린다.

침대에서 뒹굴 거리다,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소파 앞 테이블로 향했었지. 껍질은 매콤한 소스에 찍어서

먹고, 고기는 전병에 싸서 야채와 먹고. 오리탕은 국물이 진해 입이 조금 느끼해서 술병을 열었었다.

육체 강화 능력자 중 전신 강화에 속하는 우리 둘은 면역력과 알콜 내성 또한 올라간 상태니까 별 생각 없

이 독주를 한 잔씩 마셨고... 그 다음엔?

TV를 틀어 채널을 돌리다 재미가 없어 호텔 방 안을 뒤졌었다. 그러다 찾아낸 옷장 속 복장들.

흰색 두루마기 비슷한 커다란 옷. 이걸 한푸라고 부르던가. 룩딸 치는 애들이 한복(韓服)과 한푸(漢服)는

다른 거라고 지랄했던 기억이 있는데. 소매가 어지간히 커다란 전통 의상. 문제가 있다면 그 커다란 소매

가 걷어지다 못해 맨 팔이 다 보이는 상태고, 옷의 매듭도 전부 풀어 헤쳐진 상태라는 것 정도일까. 술에

취하니 또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허리띠도 없고 매듭도 없는 게 그냥 옷 모양 이불 위에 널부러진 꼬락서니라 웃음이 배실배실 나와 웃고

있으니 옆에 누워 있던 소희가 몸을 반 바퀴 굴려 내 위로 올라탄다.

“아, 진짜 옷 이쁘다...”

열기에 달뜬 목소리로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에 그대로 힘을 빼고 드러 누웠다. 머리는 욱씬거리지, 입에

서는 술 때문인지 단맛이 맴도는데 나신의 미녀가 올라타는 걸 거부할 이유가 있나. 간만에 느끼는 술 기

운을 만끽하며 그대로 몸을 맡긴다.

“옷만?”

“니가 입어서 그래.”

코스프레 플레이에서 내가 코스튬을 입게 될 줄은 몰랐지.

술기운에 머리가 빙빙 돌면서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주로 내가 게임 플레이 하다 즐겼던 다른 여캐들에

대한 생각들. 무림 모드에서 허벅지를 지나 옆구리까지 트여버린 차파오를 입은 여캐들의 무공으로 단련

된 허벅지. 발목까지 오는 정통 빅토리안 메이드복만 존재하는 세계에 미니스커트 형식으로 만든 복장을

지급하니 부끄러워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메이드들.

옷장 속에 있는 개량 한복인지 한푸인지 하는 복장들을 보니 자연스럽게 생각이 난다.

“하, 약술은 약술인가...”

상상만으로 우뚝 솟은 내 하물에 뜨거운 입김이 와 닿는다. 내 위에서 뭉그적대며 피부를 문지르던 그녀

가 슬그머니 몸을 움직여 아래로 향했으니까. 몽롱한 와중에 와 닿는 뜨뜻미지근한 쾌락을 거부할 마음

따위는 없었다.

뜨거운 숨결이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더니 그녀와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맹렬한 눈길, 잡아먹을 듯한

입맞춤. 자연스럽게 내 위로 올라탄 그녀가 나를 내려다본다.

‘소희... 후배위는 별로 안 좋아했지.’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하는 것을 좋아한다. 시각적 정보가 큰 비중을 차지하던 남성의 특성이 그대로 옮

겨갔기 때문일까. 하긴 남성이 후배위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성의 뒷태를 감상할 수 있어서인데...

이쪽 세상은 여성이 더 상위의 입장이고, 등 뒤에 있는 남자를 바라볼 수 없으니 그런가.

뜨거운 손이 내 하물을 쥐어 잡아 조준하는 것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소희가 내 눈 감은 얼굴

을 좋아 한다던가 그런 이유 따위는 없이, 그저 술기운이 몽롱해서, 몽롱한 와중에 닥쳐올 쾌감이 기대되

어서.

"하늘아, 넣을게."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을 뿐이었다.

[작품후기]

1. 오염물질을 정화하여 순수한 물, 공기로 되돌리는 초능력자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중국의 공장은 고작

초능력자 몇 명으로 커버 될 수량이 아니죠. 지금만 봐도 걔들이 뱉어내는 양이 ㅗㅜㅑ;;

2. 주인공이 지하 도시에서 얼굴을 까고 다니는 것은 들켜도 별 상관이 없어서 입니다. 소희도 주인공 구

하러 왔다가 존재 자체는 알고, 주인공이 거기 출신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핑계를 대고 몇 번 가는것은 알

고 있습니다. 거기서 뭘 하는지까지 알아보지 않을 뿐이죠. 소희 머릿속에서는 주인공이 아픈 과거를 지

닌 가녀린 남자 아이기 때문에 과거를 캐내려 들지 않는 중입니다.

그리고 지하 도시 자체가 현대 사회의 체제에 반발해서 기어들어간 패배한 범죄자 집합소기 때문에 SNS

에 '나 쟤 지하도시에서 봤어' 같은 소리는 하지 못합니다. 표면적으로는 협회가 지하 도시를 용납하지 않

는 입장이기 때문에 SNS에 올리면 소희가 우연히 발견해서 주인공을 의심하기 전에 히어로 협회에서 잡

아가는게 빠르죠.

3. 주인공은 게임 속 세상에 감금되어 있기 때문에 현질은 불가능합니다. 현질이 게임 내부에서 캐쉬템을

사는 게 아니라 게임 외부에서 데이터를 돈주고 사고 파는 거래기 때문이죠. 이 부분은 스토리 진행 하다

나올겁니다.

4. 주인공이 입었다가 벗겨진 한푸가 뭔지 모른다면, 대충 '불멸의 영웅 탈론' 검색하면 아실겁니다. 소매

펄럭거리는 중국풍 양산형 모바일 게임 모델 의상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5. 동물의 숲 소식을 이제야 접해서 스위치 구매를 할까 고민했는데 되팔렘 가격 2배... 미치셨습니까 휴

먼... 두세달 지난 뒤에나 구매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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