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189)

새로운 이벤트

중국에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문자에, 심심해서 ‘네’ 라고 한 글자 답장했더니 세시간만에 공항에서 전

용기를 타고 중국 해안 지역 어쩌구로 향하게 된 심정이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욕망의 냄새를 잘 맡는 악

마 답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잘 집어 놓았었다.

“일단 소희씨의 촬영이 있는 건 맞아요. 해안과 무인도에서 초능력을 마음껏 사용하는 컷을 딸 거니까.

CG 기술이 아무리 대단해지고 딥 페이크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결국 CG 사용을 안 했다는 문구가 사람들

을 끌어들이니까.”

증강 현실로 중국어로 된 서류를 열심히 읽던 김샛별이 손짓을 하자 단정하게 차려 입은 남자 승무원이

특이하게 생긴 무선 이어폰을 건네 준다. 이게 실시간 번역기인가 뭔가 하는 건가.

“소희양이 도시에서 했던 것처럼 초능력을 뻥뻥 터트리고 다니면, 그 동안 하늘씨가 해줘야 할 일이 있는

데... 재미는 꽤 있을거에요.”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소희가 자연스럽게 오른쪽 귀에 검은 이어폰을 끼는 걸 보고 따라서 착용하니 김샛

별이 말을 이어 나간다.

“중국 쪽에 있는 폭식이 부탁해온 일인데, 하늘씨와 참 잘 어울릴 것 같은 일이니까요. 일처리가 빠르면

게임 이벤트를 하며 돌아다니셔도 좋고, 관광을 다니셔도 좋아요. 폭식의 이름으로 식도락이 많이 준비

되어 있으니 그걸 누리셔도 좋구요.”

이어폰을 낀 소희가 그대로 의자에 파묻혀서 대본을 읽는 것을 보고 스마트 기어를 확인한다. 당연히 드

라마 대본은 아니고 게임 홈페이지. 전 세계에 글로벌하게 퍼진 게임 답게 국가별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

었다.

‘김샛별한테 잘 비벼보면 아시아 쪽은 전부 돌아볼 수 있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게임 내용 SNS로 사람을 꼬실 때 이벤트 참여를 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솔직히 모

바일 증강 현실 게임 하겠다고 해외 여행을 나가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SNS에 모인 사람들

이 댓글 하나라도 눌러주면 계약 하나가 늘어나는 꼴이니, 김샛별도 눈치를 채고 나를 이걸로 꼬신 것 같

은데.

“뭐, 별건 아니에요. 중국 중앙 정부에서 해안가에 새로 공장단지를 만들어서 말이죠~ 완공되면 오염 수

치가 과도하게 치솟아서 조금 위험해 보이니까... 살짝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서 공사가 중단되면 참 좋겠

다고 연락이 왔거든요.”

배시시 웃어 보이는 그의 웃음이 참으로 뱀과 같아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기울여지는 잔, 코 끝을 훅

찌르는 강렬한 알코올의 냄새. 진동 하나 없어 마치 고급 바에 들어온 기분으로 슬며시 의자를 뒤로 당기

며 소희에게 시선을 보낸다.

“응, 왜?”

“아니, 나 지금 건물에 테러하러 가는 것 같은데... 어떤 기분이십니까 히어로님?”

내 짧은 질문에 소희가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그 와중에 악마랑 도장 찍은 건 나야. 애초에 악마들이 하는 활동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도

아니고... 음, 일찍 죽을 시한부 운명인 사람에게 접근해서 행복하게 만든 다음 죽기 직전의 절망을 수집

하는 건 조금 애매하지만.”

“역시 그런가?”

“뭐 어때, 천사고 악마고 일단 사람들을 직접 죽이는게 아니잖아. 지난번에 그 서류를 보니까 나름 자제

해서 행동하던데, 어중간한 빌런들보다 훨씬 낫지.”

역시 용사는 용사인걸까. 나름 고민거리라고 생각했던 문제는 옛날 옛적 정리된 지 오래였구나. 그런 쓸

모 없는 감상을 하며 어느새 좌석 테이블에 서빙 된 음료수를 마셨다.

“그렇죠, 저희 악마들이 이미지가 안 좋긴 하지만 진실은 다르니까요. 지금만 봐도 중국에 있는 공장단지

가 완성되면 한반도의 환경 개선 프로그램따위 가볍게 무시할 막대한 오염물질이 서해 쪽으로 흘러 나가

니까 막으러 가지 않습니까.”

그렇게 소희의 말에 대꾸한 김샛별이 잔을 높게 기울이더니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진다.

“왜, 예로부터 진짜 무서운 건 인간이랍니다?”

금색과 붉은색으로 호화찬란하게 꾸며진 호텔 로비는 온 몸으로 ‘여기가 중국이다!’ 라고 주장하는 모양

새였다. 금색 기둥을 감아 올라가는 붉은 용, 붉은 카펫에 금색으로 자수 놓아진 용. 그 외에도 찻잔부터

장식용 도자기까지 전부 용 무늬가 새겨져 있으니, 이쯤 되면 폭식의 악마가 용족이지 않을까 싶을 지경.

“귀한 몸이 여기까지 행차했구만!”

낄낄거리며 호탕하게 웃는 살집 있는 여성. 조금은 인종차별적 발언 같지만 노르스름한 피부에 작게 째

진 눈까지,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를 가진 여성이 호텔 로비에서 양 팔을 활짝 벌리고 과장된 모양새로

우리를 환영한다.

문제가 있다면 그 주변.

“언제나 화려하시구만, 폭식.”

“미식이란 화려함과 풍요 속에서 발전하는 법 아니겠는가?!”

크게 웃어 보이는 그녀 옆으로 같은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쫘악 나열한다. 중국 전통 복장을 어레인지 한

것처럼 보이는 옷들. 슬릿이 없는 차파오를 입은 여성들과, 중국 영화에서 권법을 사용하는 아저씨들이

입는 옷을 입은 남성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로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외친 그들이 대가리를 푹 박는다. 그렇다고 해서 시선이 모이지는 않는다.

어지간한 운동장 크기 만한 호텔 로비에 가득한 것은 오직 고개를 숙인 직원들뿐. 평범하게 지나다니는

손님은 단 하나도 없었다. 수백의 사람이 남녀 양쪽으로 갈라져 미동도 없이 고개를 숙이는 장면. 느껴지

는 기색으로는 그들 전부가 순수한 인간. 이쯤 되면 다른 의미로 감탄이 나오는데.

“귀빈이 오셨는데 바로 식당으로 향할까.”

“시끄러 폭식, 우리를 며칠이나 붙잡아 두려고 벌써부터 식당에 들어 갈 생각이야?”

투덜거리며 타박하고, 웃으며 넘기는 모양새가 꽤나 친밀해 보였다. 칠대 악마끼리는 그럭저럭 사이가

좋은 걸까. 그보다 소희가 슬쩍 당황해서 내 옆에 들러붙는 게 재미있었다. 나야 황제 플레이도 몇 번이고

했었지만 소희는 아니지.

아무리 한국에서 금수저 집안에 태어나 권력 꽤나 있는 조부모님, 부모님이 있었다 해도 호텔 하나를 통

으로 전세내서 수백의 직원에게 90도 배꼽 인사를 받는 경험을 해봤을 리 있나. 한국에서 했으면 아마 갑

질 논란으로 난리가 났을텐데.

“이게 대체 무슨...”

“아, 우리 영웅님은 이런 게 익숙하지 않나?”

짝짝, 박수를 치니 그제서야 우르르 흩어지는 사람들. 자연스럽게 카운터로 향하는 사람도 있었고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법도 악마의 힘도 아니고 단지 돈으로 이루어지는 행위.

“뭐, 주는 만큼 받는 거야. 내가 그렇게 나쁜 악마는 아니거든.”

마지 길거리 표지판처럼 서 있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지나가니 거대한 홀이 나온다. 어디 높으신 분들 파

티할 때나 쓰일 법한 홀을 가득 채운 다양한 먹거리들. 하지만 그 안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거대하고 호화로운 홀, 그 홀 내부를 가득 채운 음식과 냄새. 말 그대로 폭식의 이름을 나타내는 모습

이었다.

“얼마나 잡아 두려고 이러는 거야?”

“식당은 아니지. 귀한 손님 모셔 두고 한 끼 대접도 없이 어찌 폭식의 이름을 대겠는가?”

코를 찌르는 수십 수백가지의 향신료 냄새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거리에서 흔히 팔 법한 닭꼬치, 오뎅

과 같은 간편한 음식부터 요리사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것이 뻔히 보이는 음식들까지. 푹 고아진 사

골이나 스튜 같은 음식들 중 몇 가지는 내가 알기로 준비 시간만 열 시간이 넘어가는 음식도 있었다.

사람은 네 명, 아니 입은 네 개라고 표현 해야겠지. 입은 네 개인데 차려진 음식은 수백 인분을 넘어 천 명

은 먹일 수준. 심지어 음식들을 잘 둘러보면 평범하지 않은 녀석들도 섞여 있었다.

“이건...”

“내륙 17지방에서 데려온 녀석인데... 시대가 흘러도 이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지.”

닭꼬치, 양꼬치 사이에 버젓히 끼어 있는 거미 꼬치라던가, 새우 튀김과 고구마 튀김 사이에 있는 전갈 튀

김 같은 것들. 메뚜기 조림이나 번데기는 양호하게 보일 정도로 다양한 먹거리들.

“으왁, 이거 뭐야!?”

“아, 카수 마르주. 독특하면서도 훌륭하게 발전한 음식이지.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해도 먹지 않을 거라면

태우지는 말아주게나.”

치즈를 집어 들었다가 툭 튀어 오른 벌레에 깜짝 놀란 소희가 빛으로 치즈를 불태워버리자 탐식이 한 마

디를 건넨다. 그 모습을 보며 대충 유명한 브랜드의 음료수를 고른다. 음료 쪽에는 그래도 이상한 게 없겠

지. 음료수 디스펜서에서 콜라에 사이다를 섞으며 목을 축이고 있으니 탐식과 김샛별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건물만 붕괴시키고 끝내려고?”

“아니, 관련된 사람들도 전부 처리할 생각이네. 그게 이 나라의 장점이자 단점 아니겠는가. 원한다면 조

금은 넘겨줄 수 있는데.”

“필요 없어. 우리 회사에서 화학 공장 잡부들을 어디에 써먹으라고?”

“그래 그렇다면.... 붉은색은 자네 마음대로 해도 되네.”

탐식이 손짓하자 스마트 기어에 지도가 떠오른다. 인공위성에서 찍은 것처럼 보이는 사진 위에, 붉은색

과 푸른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모양새. 사진의 80%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게 특이사항이라 봐도

좋겠지.

‘이야... 대국은 대국이네.’

말이 공장 단지지, 거의 도시 하나를 부수라는 수준 아닌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