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오로바스와 계약을 하고 정보를 알아오게 시킨 뒤, 또 다시 할 일 없는 시간이 돌아왔다. 내가 마법을 만
들어서 팔아먹는 입장이었다면 이 사소한 시간 하나 하나가 마법사의 준비를 하는 귀중한 시간이었겠지
만, 나는 돈으로 스킬을 사서 배우는 입장이지 창작을 하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데이터 팔이를 위한 스피드 런 형식의 게임 진행에 익숙하다 보니 이런 늘어지는 시간에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왜 워커 홀릭처럼 평생 일만 하던 사람들에게 휴가를 주면 휴
가 때 뭘 하면서 쉴지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처럼.
“진짜 심심하다...”
“지난번의 그 난동 이후로 다들 묘하게 잠잠하니까 말이지. 아무리 눈치 없는 녀석들이라도 지금은 다들
숨어서 지낼 걸?”
심지어 사소한 이벤트조차 없으니 출근-순찰-퇴근의 무한 반복. 게임이 아니라 정말 사회 생활을 하는 기
분이 든다. 히어로 협회의 천사가 암살당하고, 천국으로 돌아 가려다 나한테 잡아 먹힌 그때의 사건 때문
이라지만 너무하네.
사건의 전말을 아는 천사와 악마, 그리고 용사들은 사건이 대충 일단락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악마 세력은 억울하게 튄 불똥을 쳐내는데 성공했으며 천사와의 전쟁, 히어로 협회와의 법적 분쟁을 피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또한 천사들도 빛의 힘을 쓰는 강력한 인간 ‘용사’의 존재를 알고, 그 존재가 협회
의 명령을 들으며 고분고분하게 히어로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는지 조용해졌고.
하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히어로 협회 내부 중요 인물이 대낮의 도심 한 복판, 그것도 협회 건물 내부의 비밀 회의
장에서 암살당했다는 것으로 보이니까. 더군다나 그 이후 협회의 무력 진압 부대가 협회 입구에서 인근
회사 빌딩이 모인 거리까지 방화를 포함한 무력 시위를 진행하며 달려나가 도로를 뒤집어 엎은 상태다.
다른 히어로(소희)에게 진압당해 평화가 찾아왔다 하더라도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히어로와 빌런이 존재하는 시대의 민간인이 가져야 할 본능이라 해야 할까?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양
아치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양아치다. 고작해야 몇 백m 떨어진 곳에서 암살 사건이 일어나고, 건
물에 방화가 일어나며, 도심을 질주하는 미치광이 초능력자들이 회사 건물에 뛰어들어가다 대로변에서
무력 시위를 하며 대치상황을 벌인 사건이 고작 한달 전이다.
만약 히어로 협회가 조금 더 정치적으로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계엄령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
을 모양새. 지금도 천사들의 계약자를 필두로 한 많은 초능력자들이 순찰 강화 기간이랍시고 눈에 불을
키고 돌아다니고 있는데.
어느 양아치가 그런 와중에 난동을 피울까.
경찰을 우습게 아는 양아치나 진상 고객이라 하더라도, 실탄을 장전하고 계엄령을 선언한 군인에게는 덤
벼들지 않는다. 하물며 실탄보다 무시무시하고, 감정적으로 사용하며 실제로 발사까지 한 초능력자 집단
앞에서 누가 덤벼들겠냐고.
“그러니까 순찰은 안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우리 구역에 사람이 많아서 몰래 빠지면 바로 들킬 걸?”
“아오... 짜증나. 이 와중에 순찰 조끼리 서로를 감시하는 게 말이냐고.”
천사와 악마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히어로도 많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에게 험악하게 대하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한 조가 순찰하는 범위에 서너 팀이 동시에 엇박
순찰을 돌던가, 동선이 겹치는 정도.
문제가 있다면 겹치는 동선이다. 이전에는 순찰만 하면 되는 것이었고, 겹치는 동선도 없는 데다 범위도
은근 넓어 소희와 찢어져서 대충 집에 돌아가도 되었고, 여차하면 순찰 동선의 골목에 들어가서 증강현
실 게임을 해도 별 상관없었는데.
“지금이라면 여기가 아니라 세 블럭 더 간 곳에 있어야 하지 않나요?”
슬그머니 골목으로 빠져볼까 했더니 다른 두 팀이 서로 아웅다웅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따지고 드는
여성의 목소리와, 억울하다는 듯 언성을 슬슬 높이는 남성의 목소리. 순찰 지역 때문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까 전 민원이 하나 들어와서 처리하느라 늦었네요. 민원 처리 내용은 단말기에 업로드 해 놨으니 확인
해보세요.”
“민원이라, 정말인가요?”
“그러면 고작 C급 히어로가 순찰 20분 늦겠다고 히어로 협회 홈페이지에 장난질을 쳤겠어요?”
소희와 나 말고도 다른 순찰팀의 루트가 겹치는 복잡한 골목에서, 서로 만날 타이밍보다 늦게 만나서 누
구의 탓인지 싸우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사건은 거의 없지만 시간 내내 소희와 순찰 지역을 계속해서 걸
어야 하는 상황.
“둘이서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하루 종일 이렇게 순찰을 하는 건 지루하단 말이지... 하다 못해 저 쪽으
로 슬쩍 가서 싸움 구경이라도 할까.”
“뭐 어쩌겠어. 결국 진짜 암살범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했으니 협회로서는 이게 최선이니까.”
스마트 기어를 들여다보며 대본을 외우던 소희가 짧게 대꾸한다. 둘이서 같이 다니는 시간이 각별한 것
도 한 두 번이지, 거진 한달이 지나 초여름이 되었음에도 풀리지 않는 경계 태세에 덤덤해지는 건 순식간
이었다.
“아 씨, 저쪽 골목에 몬스터 나왔는데.”
“참아, 지난번에 이야기 들어보니까 저쪽 팀이 꼬투리 잡은 걸로 벌점 박힌 순찰조가 꽤 있다더라. 차라
리 다른 모바일 게임을 하는 건 어때?”
“이 게임이 유저가 제일 많아서 SNS에 게시할 때 사람들이 많이 와. 아니, 초등학생 레크레이션도 아니
고 이 나이 먹고 벌점이 무서워서 움츠려야 하나... 으, 짜증나. 오로바스 얘는 감감무소식이고.”
작게 투덜거려 보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키보드와 마우스로 하는 게임이었다면 그냥 SKIP버튼 하나로
끝나거나 32, 64배율로 후다닥 돌려버릴 무의미한 시간들. 덕분에 맥주 가게의 단골이 되고 소희와 서로
물고 빨아서 서로의 몸에 모르는 게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결국 전투가 없으면 심심한 건 어쩔 수 없다.
“오로바스면 그때 김샛별씨가 소개해줘서 계약했다는 악마? 그래도 이름 있는 악마니까 추천한 게 아닐
까? 시간도 오래 걸렸겠다 기다리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 너무 초조해하지 마.”
초조하기 보다는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이 짜증나는 것뿐인데 그녀에게는 내가 불안감 때문에 짜증이 난
것으로 보이나 보다. 하기야 그녀의 입장에서는 꽤나 알차게 보내고 있는 일상이니까, 내가 느끼는 감정
을 모를 것이다.
RPG 유저의 특징이라 해야 할까, 직접적으로 사냥을 하거나 전투를 해서 무언가를 얻는 게 없이 그저 평
범하게 보내는 나날이 지속되면 비교 대상이 없음에도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따지자면 나를
위협할 만한 강대한 적은 거의 없고, 소희 옆에 붙어 있다면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지만.
“들어보니까 저쪽 두 팀 모드 협회로 귀환해서 잘잘못 따질 것 같은데 조금 쉬다 올래?”
“음... 잠깐만. 뭐야 이건?”
※
소희와 나, 그리고 김샛별.
용사와 흡혈귀(비슷한 것)과 대악마.
어울린다고는 때려 죽여도 말할 수 없는 조합이 호화로운 비행기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란히, 라
고 표현해도 될까. 거의 몇 m는 떨어져 있는데. 김샛별이 전화 한 통으로 뚝딱 준비한 전용기는 고작해야
일곱개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저기,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중국, 남동쪽 해안 3구역으로.”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 보니 대충 잘게 쪼개진 중국의 구역이 보였다. 하긴 대한민국 같이 조그마한 땅
덩어리도 히어로 협회와 엮이면서 구역별로 나눠졌는데, 중국 정도면 여러 개의 중국으로 분할 될 만하
지. 저기가 현실에선 어디지... 홍콩? 홍콩보다 조금 위?
“거기는 어쩐 일로 가는 겁니까?”
“소희양의 촬영... 때문이라 하면 믿지 않겠군요.”
그러게, 아무리 인터넷에서 AB 히어로 & 사이드 킥으로 유명세를 탄 소희와 나의 콤비라 하더라도, 실제
히어로 업무는 고작 시장 순찰이나 몇 달 돌아본 게 전부인 초짜 중의 초짜. 실질 전투력은 구역 하나를 말
아먹을 정도로 강력하지만 민간인들에게는 그냥 데뷔 초부터 등급이 존나 높은 슈퍼 루키 그 이상도, 이
하도 아니었다.
‘뭐, 얼굴만 보는 친구들은 좀 과하게 좋아하지만.’
적당한 근육질에 피부가 살짝 태닝된 상태로 고정되어버린 빛 속성 베이글녀 소희와, 스무 어린 나이에
창백하고 연약해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그림자로 짐승을 만드는 병약 미소년 캐릭터인 나. 실적은 무시
하고 외모만으로 지지하는 팬 층이 조금이나마 있긴 하다. 활동도 없는 히어로를 지지하다니, 정말 연예
인 지망생한테 팬이 붙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긴 한데.
그렇다고 비중이 높다지만 조연 하나를 위해 작가가 중국까지 출장을 가겠냐고.
“순찰을 할 때 마다 심심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던데... 재미있는 일 하지 않을래요?”
“뭔데?”
“아, 그리고 중국에서 당신이 하는 게임 로컬 이벤트가 열려서 희귀 몬스터가 등장...”
“할게.”
이 악마 새끼, 사람 꼬실 줄 아네.
[작품후기]
집 안에 처박히는게 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렵네요. 계속되는 코로나 소식에 부모님의 걱정이 이
만저만이 아니라 어딜 나돌아 다닐 수 없는 상황.
작가는 중국을 너무 좋아해서 여러개가 되었으면 해요.
이 소설은 여러개의 중국을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