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촉수에 파묻혀 꿀렁이는 남자 빵뎅이만 보여줬다 하더라도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상현실 게임을
그렇게 했는데 방금 영상에서 마왕이 누구인지 감도 못 잡을 정도로 야한 냄새를 풍길 수는 없지.
기본 모드 설정으로 플레이를 할 경우, 용사 하면 성검이 튀어 나오지 성스러운 몽둥이나 성스러운 채찍
같은 특이 개체는 별로 안나오는 것 처럼 마왕과 용사 같은 중요 NPC는 대부분 기초 설정이 존재한다.
물론 유저 커스텀 모드에서는 성스러운 귀이개나 성스러운 핵배낭 같은 기괴발랄한 무기가 등장해서 게
시판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정말 모드 깎는 장인들이나 무기 합성하는 대장장이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일때나 일어나는 경우고.
영상 속에서 본 것은 건물 빌딩보다 거대한 촉수 보다 거대한 마왕의 실루엣. 그림자와 충격파의 범위만
대충 잡아서 덩치가 100m 단위라는 이야기니까 오히려 더 쉽다. 커다란 종족 중 ‘나쁜 놈’ 으로 만들어지
는 종족은 대부분 뻔하게 정해져 있으니까.
‘드래곤 아니면 거인이겠네. 아마 드래곤일 확률이 제일 높고.’
아무리 이 게임에 병신같은 부분이 있다 해도, 거대한 100m짜리 그림자가 지상에 강림했는데 사실 거대
화 된 고블린입니다! 같은 말도 안되는 기상천외한 발상은 떠올리지 않으니 드래곤, 거인처럼 뻔한 녀석
일 확률이 99%에 가깝다. 가끔 유저가 만든 자작 모드에서 초거대 코볼트나 3단 변신 5단 합체 슬라임
같은 기괴한 녀석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얼굴은 보지 못했더라도 일단 등장한 쫄따구 몬스터의 종류를 생각하면 드래곤이 더 가능성이 높다. 녀
석이 내려올 때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커다란 촉수가 휘청 거리는 모습을 봐선 물리적으로 날갯짓을 하는
녀석이니까 비행형. 대충 머릿속에 어떤 녀석일지 그려진다. 여기서 예상 못할 상황이라 해 봐야 언데드
드래곤이라던가, 대가리가 여러개 달린 그런 사소한 이야기겠지.
‘살아있는 용이 아니라 언데드면 오히려 좋지. 약점이 배가 되고 빛에 취약해지니까. 일단 용살과 관련된
마법들을 준비하면 되려나. 그 와중에 마왕군 잡졸들은 잡다하게 모여 있으니 그건 따로 해결해야 하고.’
대충 머릿속으로 용에 관련된 마법들을 정리한다. 판타지 하면 드래곤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흔해
빠지고 어지간한 모드에서 등장하는 종족이다 보니 카운터 치는 종류가 많다. PVP가 존재하는 게임이다
보니 성능이 사기인 드래곤 같은 종족은 견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
그 외에도 아카데미나 현대 판타지물에는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높으신 분으로 나오고, 판타지에는 악룡
이던 수호룡이던 동네 뒷산에 드래곤 레어가 있지를 않나, 무림으로 갔는데 서방의 악룡이나 요괴들의
왕이랍시고 등장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무수히 많은 모드 중에서 가장 잘 나오는 보스 몬스터다 보니 유
저들이 ‘드래곤 쉽게 잡는 법’을 미친듯이 연구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
왜냐하면 일단 종족에 대한 카운터 수단을 만들어 두면 다른 모드에서도 반 쯤 날로 먹을 수 있으니까. 그
드래곤이 NPC던 유저던 간에 말이다.
“그래서, 계약하겠나?”
“그래, 계약할게. 지금 당장이라도 계약해서 하고 싶은 부탁이 있는데.”
이제야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미남의 오오라를 풀풀 풍기는 테이블 너머의 오로바스가 손을 내민다. 은
색 수정구슬이 연기가 되어 그녀의 손 위로 향한다. 나타나는 것은 붉은색 종이 위에 은색의 마법진이 선
명하게 새겨진 명함. 내가 그녀를 불러낼 때 사용한 것보다 훨씬 고풍스럽고 때깔이 고운 녀석이었다.
허공을 둥실 날아서 자연스럽게 내 주머니 안으로 들어온 명함을 구경하고 있으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얼 그리 서두르는가, 라고 말하고 싶지만... 서두를 수 밖에 없는 사안이로군. 나 참, 고작해야 그림자
만 바라보았음에도 다른 정보를 하나도 읽을 수 없을 정도의 존재라니 원, 터무니 없군. 그래서 하고 싶은
부탁이 무엇인가?”
“지금 협회의 천사들이 공격받은 사실은 알고 있지? 천사들은 루시퍼의 소행이라 생각하고 날뛰려 하는
데, 루시퍼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조차 못하고 있어.”
그 외에도 소희가 마왕의 대적자인 용사라는 사실과, 오직 소희만이 그림자만 겨우 훔쳐볼 수 있는 강대
한 존재인 마왕을 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몇가지 이야기를 더 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결
국 내가 한 이야기의 요점은 간단하게 정리되지만.
“그러니까 당신의 배우자인 소희양을 세계 최고의 히어로로 만들어서 인류를 구원하고, 그 명예를 누리
겠다는 이야기로군.”
“그래, 명예만이 아니라 부와 명예지. 세상을 구하고 인류를 구원할텐데 그 정도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
겠어?”
결국 소희가 마왕을 막아내는 것을 옆에서 돕고, 그를 이용해 전 세계급으로 유명세를 누리며 유명세에
따라오는 부유함 또한 같이 누리겠다는 이야기니까. 히어로가 선망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세상인데 ‘인류
를 구한 히어로’ 정도 되면 평생 놀고 먹어도 되지 않을까.
결국 노리는 것은 안락한 생활이니까.
소희 엉덩이 밑에 깔리는 상황이던, 귀찮은 히어로 업무를 하는 상황이던 나는 잊지 않는다. 결국 이 세상
은 병신같이 남이 보낸 파일을 터치했다가 빨려 들어온 세상이라는 것을. 뇌둥둥이 되어서 미친 과학자
가 만든 게임 속에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진짜 차원 이동을 한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된건지는 몰라도.
이 세상이 진짜던 가짜던, 결국 나는 오감을 느끼고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 편하게 살아야지, 안 그래?
“거대한 야망을 가지고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그리하여 인간과 악마가 공생하여 서로 이
득을 볼 수 있는 미래라. 참으로 입맛에 맞는 이야기로군. 아, 그리고 루시퍼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네. 그 또한 다른 일곱 군주처럼 자신의 죄악에 충실하니까.”
오만에 충실하다는 게, 지금 방심하는 꼬락서니를 말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루시퍼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의 마법을 쓰는지, 아니면 반전으로 육체파인지. 인간계
에 뿌리 내린 회사들 말고 다른 세력과 병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그저 무시만 하고 있었다니.
평화에 찌들어서 무뎌진건지, 아니면 김샛별의 허술함이 상상 이상의 것이었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김샛별이 힘순찐이냐 그냥 찐이냐의 문제가 아니니까 넘어간다.
“뭐... 알아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걸세. 세상에 보려고 하는 이가 있으면 숨기려고 하는 이도 있으니. 적어
도 루시퍼에게 걸리지 않을 정도라면 어느 정도 방비를 한 상대라는 것이니까.”
“그래, 그럼 알아내면 연락 줘.”
“알아낸다면 그 명함이 그대를 부를걸세.”
자리에서 일어난 오로바스가 은빛 구두로 양탄자 위에서 경쾌하게 발뒷꿈치로 스탭을 밟는다. 두께가
cm 단위인 푹신푹신한 양탄자 위에서 따닥 따다닥하고 경쾌하게 스탭 밟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의 모습
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금새 흩어지는 은색의 연기만을 남기고.
그 모습에 망설임 없이 호텔 방 문 밖으로 나선다.
“원하시는 일은 다 이루셨는지요?”
“그래, 덕분에 편히 쉬다가.”
어느새 호텔 방문 앞에는 정장을 입은 미녀가 서 있었다. 아까 이쪽 층으로 안내를 해 주고 사라졌던 호텔
리어가. 이제는 자신이 마녀라는 사실을 숨길 마음도 없는지 기색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호텔에서 사람
들 안내하고 다니는 여성의 몸에서 유황불 냄새와 약초 냄새가 날 리가 있나.
‘호텔에서 지옥 유황불로 지진 약수탕을 운용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악마가 운영하는 호텔이니까 지옥탕 같은 게 진짜 있을수도 있나? 왜 악마들에게 인기인 지옥 유황
불, 한랭지옥 냉탕 같은 거. 악마들이 상거래를 하는데 그 정도 장사는 할만 하지 않을까? 지옥 향수병을
느끼는 악마를 위하여.
뭐, 유황 냄새 풀풀 풍기는 마녀는 제쳐 두고 그대로 그대로 집으로 향한다. 나를 보면서 아쉬워 하는 꼴
이 성욕에 휘둘린 여성의 눈이 아니라 노다지를 보는 광부의 눈이라서 그런지 양복 정장을 입은 미녀 호
텔리어의 모습에도 끌리지를 않아서.
미녀면 생각 없이 건드리고 다닌 게임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보는 눈이 까다로워졌다는 게 느껴진다. 받
들어 모셔지며 애지중지 보호 받아서 그런가. 남녀 역전 세계에 적응 방법일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남자
가 여자를 골라 잡는 입장이다 보니 남자의 눈이 더 높은 거지. 연애와 담을 쌓은 하위권 인생들은 남녀고
여남이고 상관 없겠지만, 플레이어 캐릭터를 추남으로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다른 설정 다 빼고 능욕계 같은 에로 게임으로 돌리는 사람 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