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남녀역전 세상이라 해도 그다지 크게 와 닿은 점은 없었다. 사각팬티 수준의 반바지를 입은 남자 아이돌
이 골반댄스를 춘다고 해도 나와 소희가 아이돌 방송을 볼 일은 없었고, 다른 여성이나 남성들의 만남도
대부분 사무적인 일이니 ‘여성성’ ‘남성성’에 대해 크게 느낄 일은 없었으니까.
있다고 하더라도 별 것 아닌 사소한 것들이었다. 성관계를 할 때 여성 상위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든가,
남자 아이는 지켜줘야 해~ 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든가. 사소한 것들이어서 그런지 그녀들에게서 느
껴지는 것은 남성성이 아닌 배려감으로 느껴 지기도 했고.
솔직히 쭉빵한 미녀가 나와 함께 걸을 때, 가방을 들어주거나 인도 안 쪽으로 걷게 하거나 하는 행위 정도
로 ‘와 진짜 남자 같네’ 같은 감상이 들 리 없잖아. 그냥 배려심이 깊다, 늠름하다 정도로 생각하지.
“왜 그러는가, 소환사여?”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야 말로, 나는 이 세상이 남녀역전 세상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숙하게, 어느 정도냐
면 가슴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서 하반신에 도달할 정도로 깊숙하게 느꼈다. 순간적으로 나의 성 기
능에 대해 고민할 정도로.
“아니, 별 것 아니야.”
새빨간 머리카락은 전등 아래에서 마치 물결치는 불꽃처럼 아름다웠다.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는 붉
은 머리카락과 대비되어서 그런지 창백할 저도로 새하얗지만 건강미가 느껴지는 이중성이 있었고, 뚜렷
한 이목구비와 짙은 눈썹과 붉은 눈동자는 정열적인 미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그려낸 것 같았고.
하지만 꼴릿하지가 않았다.
정장으로도 숨길 수 없는 큰 가슴이 단추가 있는 가슴 부분을 밀어내며 왜곡시키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것만으로도 부각되는 얇은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 쭉 빠진 각선미가 살갗 노출 하나 없이 아름
다운 예술 작품처럼 보이지만.
“하하하, 참으로 특이한 소환사로군. 어서 질문을 하게나.”
그 호탕한 웃음에 성욕이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다 못해 아마조네스 같은 캐릭터, 보디빌더급의
근육질의 여전사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취향에 들어서는 부분이 있는데. 이건 마치 가슴 달린 아저씨를
보는 기분이로군.
말로는 설명하기 애매한 감각을 뒤로 제쳐 두고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우리가 마왕의 강림을 막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하는가?”
“호오, 그거 참 거창한 질문이로군. 마왕? 마왕이라... 음?!”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소리를 낸 그녀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린다. 새빨간 눈동자 안에서 이리저리 움
직이는 주홍빛 기운. 마치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보석 안에서 헤엄치는 불꽃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색상
이 테이블을 밝게 비춘다.
“이게, 이런, 무슨 말도 안되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불안하다는 것처럼 다리를 달달 떠는 그녀. 가지런히 모
여 있던 손 끝이 의자 팔걸이를 탁탁탁 두드리기 시작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모습을 보니 무언가 대
단한 광경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제는 흰자가 보이지도 않게 된 눈동자를 구경하며 나는 맞은편에 앉아 테이블 위의 다과를 집어 들었
다. 내가 보는 이벤트 컷씬이 아니라 스킵이 가능하지도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몸으로 직접 하는
가상 현실 게임의 현실성은 어마어마한 재미를 보장하지만, 반대로 지루한 부분을 스킵할 수 없다는 점
이 가장 큰 단점이니까.
“맙소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초코칩이 잔뜩 박힌 과자를 씹으면서 호텔 방 안에 등장한 레어 몬스터에게 현금 5만원짜리 그물을 대충
손가락만 이용해 휙휙 포획하니 10분이 넘게 흐르고서야 그녀의 눈동자에서 주홍색 불꽃이 사그라들었
다.
“그대는, 그래, 그대의 말이 옳았군. 하... 세상을 구하는 위업이라.”
마법을 쓰기 위한 밑작업으로 SNS에 호텔 테이블 위의 한 입 베어 문 쿠키 사진을 호캉스라는 제목으로
올린 뒤 대충 스마트 기어를 꺼버리니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리는 오로바스. 우르르 울리는 댓글 알림을
꺼버리니 그녀가 어렵사리 입을 연다.
“그래, 그렇군... 그대의 말이 옳았군. 세계를 수호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위업이라니, 하! 신의 아들조차
전 인류를 품지 않았는데 말이지. 참으로 거창하면서도 아름다운 위업이로군. 위업을 이루어 주는 악마
로서 감히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겠어.”
관자놀이를 살살 문지르던 그녀가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게 상관하지도 않고 그대로 테이블을 두드린
다. 그녀의 손 끝에서 부터 굴러 나오는 자그마한 구슬. 손톱만한 구슬이 영롱한 소리를 내며 데구르르르
굴러 나오더니 구르면서 크기를 불려 나간다. 손톱만한 크기에서 손가락 만한 크기로 자라나던 구슬은
테이블을 횡단해 내게 도착할 즈음 사람 머리만 한 수정구의 크기로 변했다.
“그대의 호기심을 해결해 줄 지식이라네.”
은색의 수정구슬 내부에 붉은 기운이 맴돈다. 오로바스의 붉은 기운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구슬을 바
라보니 붉은 빛이 번쩍이며 시야가 빨려 들어간다.
‘가상 현실 속의 가상 현실이야 뭐야.’
꿈 속의 꿈을 주제로 한 유명한 고전영화가 떠올랐지만 저항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시
야가 어지러이 흐트러지고 부서졌다 조립되기를 반복. 울렁이는 시야 속 눈을 꾹 감고 있다 귓가에 아른
거리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다시 제대로 앞을 볼 수 있었다.
일렁이는 붉은색은 도시를 불태우고 있는 거대한 불길.
“사, 살려주세요! 아아악!”
“히어로들은 뭘 하고 있는 건데!”
고층 빌딩은 남김없이 무너졌고 비스듬히 무너져 내린 건물의 뼈대를 커다란 화염이 탐욕스러운 혓바닥
처럼 핥아 대고 있었다. 잿더미 위를 방황하는 사람들, 그 발 밑에 깔려 이리저리 으스러지고 잿가루가 되
어 휘날리는 시체들.
“막아! 막으라고! 야, 뒤로 빠지지 마!”
“하,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초능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몇몇 초능력자들이 잿더미 위에서 등을 맞대고 허공에 능력을 뿜어 대지만 커다란 악마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살육을 버린다. 큰 뿔과 검은 박쥐 날개, 짐승의 발굽을 가진 전형적인 외형의 악마들. 그렇
다고 해서 도시를 침략한 악마가 그들 한 종류인 건 아니었다.
“이거 놔, 싫어엇!”
“놔, 민준이를 놔줘!”
비명을 지르며 난쟁이들에게 끌려가는 남학생과, 근처 건물의 잔해를 쥐어 들고 손에서 피가 나도록 휘
두르는 여학생. 허나 난쟁이들의 신장이 고작 1m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수십마리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물량을 화재와 건물 붕괴로 부상을 입은 여학생 하나가 이겨낼 리 만무했다.
“희, 희아야야아!!”
잔해 위를 질질 끌려가는 남학생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종아리를 깨물려 넘어지는 여학생과, 그 위로 주
먹만 한 짱돌을 들고 뛰어내리는 세 마리의 난쟁이들. 둔탁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붉은 피
가 튀어 오르는 걸 보고 정신줄을 놓은 남학생이 그 자리에서 범해진다.
지저분한 녹색 피부를 가진 난쟁이들이 남학생의 하반신에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올라타고, 그 옆에서는
여학생의 시체를 뜯어먹는다. 고작해야 두 어린 학생에게 수십 마리의 괴물이 들러붙은 것과 같이, 도시
곳곳에서 생존자들은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다양한 괴물들에게 희롱 당한다.
마왕군에는 수십 마리가 몰려다니며 동떨어진 소수를 사냥하는 고블린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구멍에서 멀어져! 바닥을 잘 살, 으아악!”
“시우가 끌려들어갔어!”
“포기해! 저렇게 작은 굴에 기어 들어가서 어떻게 싸우겠어!”
“씨바아알!”
무너진 건물 잔해에 땅굴을 파고 기어 다니다 잔해에 깔리거나 부상당한 남자들을 자신들의 굴 안으로 끌
고 들어가는 코볼트.
“젠장, 뭔데 총도 능력도 안 먹히는 거야!”
“정면으로 상대하지 마! 어지간한 C급 육체 강화 능력자 정도는 된다!”
“무슨 괴물들이 갑옷까지 챙겨 입고 다니냐, 촉수! 덩쿨을 조심해!”
무리를 지은 생존자들을 마치 사냥감처럼 몰아넣고 우월한 육체로 하나씩 사냥하는 거대한 오크를 비롯
하여 아라크네, 리저드맨 등 동식물이 섞인 외양의 다양한 괴물들이 인간을 사냥하고, 포식하며, 범하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니 마치 3인칭 게임을 하듯 도시의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여기가 원래 히어로 연합 중앙본부가 있던 곳인가?’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완벽히 부숴버리며 하늘 높이 솟구친 수십m 단위의 말미잘 괴물이 촉수를 꿈틀거
리며 주변의 생존자를 마구잡이로 낚아채는 모습은 이게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당하는 촉수물이라니, 대체 무엇을 위해서 만든거지. 인간의 어둠은 깊다...’
몸체에 비해 가느다랗다 해도 지름이 1m는 넘어 보일 촉수 끝부분이 쩌억 벌어지더니 마치 뱀처럼 사람
을 삼킨다. 여자는 통 채로 삼켜 거대한 본체로 향하다 녹아버렸는지 으스러졌는지 뚱뚱해졌던 촉수가
다시 날씬해지고, 남자는 하반신만 삼켜진 상태로 안에서 뭔 지랄을 하는지 꿀렁거릴 때 마다 기분 나쁜
신음을 흘린다.
‘좆같으니까 그만 보여줘도 된다고. 이거 어떻게 끄는 거야?’
내 주변에서 실시간으로 괴물들에게 역강간을 당하는 남자들의 모습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찰나, 머
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거대한 무언가가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온다. 그 바람만으로 수십m짜
리 촉수가 휘청이고, 가벼운 괴물들이 잿더미 위를 굴러다닌다.
그리고 그 순간 시야에 금이 가고 깨져 나가는 환상.
“후우, 대가를 지불했어도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존재라니. 마왕이라, 참으로 무시무시한 괴물이로군?”
테이블에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쥐어 잡은 오로바스의 말에, 나는 그제서야 마왕의 캐릭터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씨발년이 남자 엉덩이만 보여주고 마왕 얼굴을 안보여주네.’
[작품후기]
사람 죽는건 가상현실게임에서 질릴 수준으로 본 주인공(정부에 들키면 정신병원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