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89)

새로운 이벤트

오로바스. 솔로몬의 72 악마 중 55번째로 기록된 악마로서, 지옥의 위대한 공녀라고 불리우는 악마. 그

아래로는 어느 게임에서, 어느 영화에서 등장했는지 좔좔 나열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출세를 시켜주는 악마라는 거네.’

악마들은 계약자에게 이로운 무언가를 준다. 그러니까 마녀들이 눈에 불을 키고 악마와 계약을 하러 들

었지. 목숨과 영혼을 저울에 올리고 지옥으로 끌려들어 갈 위험을 감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단순하게 과거와 미래의 일을 알려 주는 악마도 있었고, 수학이나 기하학 광물학 같은 어려운 학문을 통

달하게 해 주는 악마도 있었다. 보물의 위치를 알려주는 악마나 사랑을 이루어 주는 악마도 있었고.

그 중 오로바스는 계약자를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악마.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계약자의 질문에 모든지 대답을 해 주며, 계약자에게 우아함과

품위를 전해주어 고결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더군다나 위업을 이루도록 돕게 만들어 주기도 하니.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품위를 지키며 역사에 남길 위업을 이룬 존재가 무엇이겠는가.

‘소희랑 잘 맞겠는데.’

영웅. 영웅이 아니겠는가.

새하얀 바탕에 은으로 새겨진 글자들. 은색 잉크가 아닌 순은으로 새겨진 글자는 알아보기 힘든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그 악마 소환 마법진인가. 지하 도시로 돌아가서 보석들을 챙길까 생각했지만, 생각

보다 시간이 늦어 그대로 날개를 펼쳤다.

목적지는 1구역에 있는 유명한 호텔 중 하나. 당연하게도 김샛별의 회사가 엮여 있는 호텔이었다. 커피

하나를 들고 설렁설렁 들어가 방을 잡는다. 호텔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적당히 제일 좋은 방을 달라고 하니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내던 직원이지만,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니 바로 상황이 바뀐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정장을 곱상하게 차려 입은 여성이 호텔 데스크 뒤편에서 화들짝 놀라며 달려 나온다. 카드에 서린 기운

을 알아보는 걸 봐선 악마와 계약한 마녀일까. 정중한 태도로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탑승한 여성은 나를

호텔 최상층까지 안내한다.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교육이 잘 되어있는지 이제 성인이 된 어린 외모의 소년 하나가 호텔 최상층의 최고급 룸을 다짜고짜 요

구하는 상황이지만 질문도, 호기심 어린 시선도 없었다. 그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안내를 끝마치고 무덤

덤하게 돌아가는 그녀.

정장 치마가 잘 어울리는 잘록한 허리선과 씰룩이는 골반을 보면서 조금 흥미가 생겼지만 불러 세우진 않

고 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소환된 오로바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데 아무나 붙잡아서 침대

로 끌고 가기에는 좀 그렇지.

벌써부터 귀찮다고 생각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짜로 버스를 타려던 자의 말로는 늘 비참하다는 것을

이제야 느끼는 중이니까.

방 안으로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로 들어가 명함에 불을 붙인다. 불이 붙었음에도 타들어가지 않는 명함

에서 은색의 반짝거리는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손바닥보다 작은 명함에서 솟아오르는 룸을 가득

채우는 연기. 명백히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 악마가 정상적으로 소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가 나를 불렀나? 흐음... 누구에게서 그 물건을 받은 거지?”

연기를 헤치고 나온 적발의 여성. 어깨죽지까지 내려온 긴 붉은 머리카락과 굳세 보이는 눈매. 공녀라는

칭호와 걸맞게 드세 보이는 인상의 아가씨였다.

“이것 참, 특이한 소환사로군.”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은색 구두. 새하얀 정장과 잘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이질적인 구두는 어째서인지

시선을 잡아 끈다. 붉은 갈기의 말 대가리에, 은색 발굽을 가진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악마여서 인간으

로 변신했을 때 은색 구두를 신은 걸까.

“뭐가 그리 특이하다는 거지?”

“흐르는 피만 본다면 밤의 혈족이 분명해 보이는데... 몸 안에 흐르는 마력은 전혀 그렇질 않군. 기나긴 악

마의 생 동안 다양한 이들을 목격했지만 그대와 같이 다양한 힘을 품은 존재는 처음이라네.”

안개에서 내려와 허공을 딛고 호텔 룸 위로 내려온 오로바스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는다. 호텔 룸이

마치 제 집인 것 마냥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모양새를 보니 기묘한 기분이 든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보이지 않으며, 미래에도 없을 존재. 하지만 실제로는 내 눈 앞에 버젓이 존

재하여 나를 소환하였군.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그래, 그대 소환자여. 무엇을 바라는가?”

새빨간 머리카락, 작은 얼굴에 모인 시원한 이목구비. 세 걸음 움직여 테이블에 앉는 가벼운 행동에서 보

이는 품위까지. 연극이나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고풍스러운 분위기. 가상현실 게임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생 만나지 못해봤을 종류의 우아함.

“내가 원하는 것은 정보. 위업을 이루기 위한 밑받침이야.”

“위업의 밑받침이라... 그대는 스스로 고귀한 자리에 오를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계약자의 마음을 읽는 건 김샛별이랑 비슷하게 보인다. 그 정도 능력은 있어야 원하는 부분을 살살 긁어

계약을 유리하게 가져오지 않겠는가. 자연스럽게 찻잔을 들어 입을 적시는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악마들은 계약할 때 차를 마시는게 유행인가.’

김샛별과 오로바스. 고작 두 번의 경험이지만 왜 나도 용사도 눈치 채지 못할 은밀하고도 재빠른 마법 실

력으로 찻잔 같은 걸 만들어 내는 걸까. 일종의 과시?

“그래, 위업을 이룰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 쪽.”

“그대의 몸 속에 있는 빛의 주인인가? 참으로 특이하군. 그리스도의 빛처럼 강렬하지만, 느낌이 전혀 달

라. 지식이 부족한 이들이 보았더라면 적그리스도의 강림이라 생각하겠어.”

“적그리스도라니, 그런 귀찮은 쪽은 아니라고. 결국 내가 원하는 위업은 세계의 수호와 인류의 구원이니

까. 애시당초 너희 악마들에게도 좋은 일이고.”

적발의 미녀가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는다. 고작해야 찻잔을 내려 두고 등허리를 쭉 펴가는데 그걸 보

는 것 만으로도 화보 촬영 현장처럼 느껴지는 그림과 같은 미인. 하지만 뭔가 기묘한 기분은 계속해서 사

라지질 않는다.

“세계의 수호와 인류의 구원인가. 아담의 후손을 데리고 있음에도 그리스도의 사명보다 거창한 것을 생

각하고 있구나.”

“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본다고 했으면서, 닥쳐 올 재난은 읽지 못하는 건가?”

“우리 악마들의 권능으로 읽을 수 있는 미래는 하늘에 머무르는 거룩하신 아버지가 정한 운명으로 한정

되어 있으니까 말이지. 그대처럼 하늘 높은 곳에서 땅 밑바닥까지 찾아도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존재의 미

래는 읽지 못한다네.”

그 말을 듣고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같은 모드의 NPC가 무엇을 할 지, 어떤 이벤트가 일어나는지는

알고 있어도 다른 모드는 읽지 못하는 것이다. 애당초 다른 모드의 이벤트까지 멋대로 읽어버린다든가,

플레이어가 욕망대로 또라이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그걸 전부 예측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닐까.

‘성검을 녹여 만든 손톱깎이로 드래곤의 발톱을 다듬을 수 있을지 시험해 본다면서 삼각팬티에 바니걸

머리띠를 입고 달려나가는 미치광이들을 예상할 수 있다면 NPC따위가 아니라 진짜 전자 세계의 신이겠

지.’

머리 한 구석에서 새록새록 떠오르는, 게임 커뮤니티의 인기 TOP 10 영상들을 곱씹어보면 너무나 당연

한 이야기였다. 고대 주술에 가까운 마법부터 SF식 거대 전함까지 존재하는 무한대의 세계관에서 미치

광이 게이머들이 ‘챌린지’ 라는 이름으로 도전하는 행위가 한 두개인가.

“그러하니 소환사여, 내게 대가를 지불하고 물어보게나.”

달그락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것은 붉은 수실이 달린 은색의 메달. 문득 마패인가? 하는 실없

는 생각이 들었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전혀 달랐다. 명함과 같은 문양이 새겨진 손바닥만 한 메달과, 그 메

달에 매달린 수실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은 마치 오로바스가 한 명 더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꼼수를 써도 되는 건가?”

“7죄종의 악마가 주선한 소환이라네. 비록 정식 계약은 맺지 않았지만, 이토록 예를 갖춘 소환사와 루시

퍼의 면을 보아서라도 내가 무얼 하나 내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 메달은 본녀의 증표. 지옥에 있을 나의

군단을 불러내거나...”

“너한테 부탁 하나를 할 수 있다?”

“이런,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간파되었군.”

씨익 웃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제서야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쭉 빠진 몸매, 다부진 팔뚝, 쾌남처럼 시원한 이목구비의 서양풍 미녀. 새하얀 이가 드러나는 호쾌한 미소

까지. 꾀가 들통난 악마는 당해버릴 수밖에 없다며 크게 웃어 보이는 그녀를 보니 확실해졌다.

“그래서, 무엇을 물어볼텐가 소환사여?”

얘, 그냥 남자잖아.

생물학적인 남자라는 뜻이 아니었다. 행동거지부터 말투, 미소와 사소한 몸짓까지. 방금 전 호텔리어의

골반을 보면서도 음심이 동할 정도의 성욕을 지닌 몸뚱아리다. 그런데 이런 미녀를 눈 앞에 두고 좆침반

이 제 갈피를 못 잡고 꺼덕거리고 있던 것이다.

마치 여캐 아바타를 처음 사용하는 남성 플레이어 같이.

[작품후기]

남자가...게임을...잘함...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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