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지하 도시의 전투원들은 훈련이 너무나 잘 되 있는 병신들이었다. 내가 이 새끼들을 믿고 플레이 했던 과
거가 후회될 정도로.
“어, 어째서?!”
빠드득!
“얘가 마지막이야?”
허리춤에서 뽑아 1초 안에 날아드는 권총탄은 그들이 얼마나 숙련된 총잡이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으니
까. 심장에 한 발, 오른쪽 쇄골 아래에 한 발. 그 상태에서 멈추면 즉각적으로 김한나에게 총구가 옮겨가
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미간이나 눈에 추가적인 총탄이 한 두발씩 날아왔다. FPS 고인물들이 시가전
에서 자주 쓰는 모잠비크 드릴과 더블 탭.
내 손에 맺힌 커다란 핏방울의 위치에 반응해서 왼쪽 어깨를 박살내는 녀석도 있었고, 더블 탭으로 정확
히 양 쪽 안구에 총알을 박아 넣는 녀석도 있었으며 오른손으로는 총을, 왼 손으로는 초능력을 동시에 발
사하는 녀석도 있었다. FPS 게임을 하는 녀석들에게 이 녀석들을 보여주면 최고난이도 A.I.라고 좋아할
실력의 녀석들.
“니들은 쌍팔년도 조폭도 아니고 왜 반응이 한결같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들 중 내게 반항다운 반항을 한 녀석은 없었다. 어떻게 된 게 한 탄창 정도 갈
기고 나서 방아쇠 딸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겁에 질린 얼굴로 달달 떨다 그대로 주저 앉았으니까.
바닥을 뒹구는 머리를 주워들어, 내 피를 주입하고 그대로 김한나에게 넘겨준다.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느릿하게 일어나는 시체 위에 머리를 얹어주는 그녀. 우직 소리와 함께 목이 붙은 시체 병사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린다.
“이게 진짜 끝이지?”
“네, 도시 중앙 지역을 제외한 모든 조직은 제 뜻대로 할 수 있습니다.”
꿀렁거리는 몸을 원래대로 되돌린다. 이 와중에도 조금 익숙해졌는지 김한나의 음흉한 눈초리가 슬금슬
금 다가오다 제 정신을 차리고 되돌아간다. 꿀렁거리는 남성형 슬라임의 육체 어디에 볼 게 있다고 저러
는지. 차라리 여성형이면 출렁이는 젤라틴 거유와 빅-빵뎅이라도 있지.
말랑말랑한 슬라임의 육체지만, 이쪽 세상 오합지졸들을 겁에 질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총에 맞으면
총알을 삼키고, 불에 타지 않으며, 초능력을 무시하니까. 물론 무적이 되는 기술이 아니니 얻어 맞을 때
마다 데미지는 있었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니까 지레짐작으로 겁을 먹고 멈칫거리다 전부 죽은 거지.
요컨대, 특별한 능력 사용 없이 허장성세 하나로 모두 처리된 것이다.
아니, 능력이 실제로 있긴 하니까 허장성세가 아닌가...?
아무튼 지하 도시에 숨어든 다음에 겪은 싸움이라곤 지들끼리 소규모로 벌이는, 그 것도 도시 중앙 지역
의 눈 밖에 나지 않을 수준으로만 귀엽게 놀아 댔으니 총을 잘 쏘면 뭐하겠는가? 총알이 통하지 않는 모습
만 살짝 보여주고, 점액질의 손모가지 한 번 출렁여주면 기겁해서 총구가 벌벌 떨리다가 죽어버리는데.
초능력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하지도 않고 단검처럼 초근접으로 찌르는 형태나 총처럼 발사하는 형
태만 사용하고.
“그래서, 이 몸에 흥미라도 있어?”
“아, 아뇨! 아닙니다!”
“그래, 이 몸은 섹스하기엔 불편하기만 하거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김한나를 골려 주며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왔다.
“이 몸이 물컹해서 만지는 감각이 신기하기는 한데 성감이 잘 올라오지는 않거든. 여자들 장난감도 어느
정도 단단함이 있어야 재미있지 않겠어?”
“예, 예!”
물론 슬라임이라 해도 경화의 마법처럼 딱딱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굳이 점액 인간이 되어서 여자
를 안고 싶은 마음은 없어 배우지는 않았다. 이상 성욕이 잔뜩 있는 녀석들은 동물이나 촉수 괴물이 되는
마법도 사용하긴 하지만, 나는 인간형 육체가 취향이니까.
비정상적인 살인 사건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 제 손에 들어온 권력이 실감났는지 툭툭 건드릴 때
마다 재미난 반응을 보이는 김한나를 보며 클럽으로 돌아왔다. 겁에 질렸다가 신나서 히죽대다 음흉하게
쳐다보다 얼굴이 아주 바쁘네.
“그, 그럼... 이제 뭘 할까요?”
“응? 일 해. 중심부야 그렇다 치고 조직들을 하나로 모으려면 뭔가 해야 하잖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계속 거기 계실 건지? 아이들을 불러드릴까요?”
“아니, 곧 갈 거야.”
출렁, 부드러운 소파에 몸을 확 던지니 점액질의 몸이 추욱 퍼진다. 온 몸이 노곤하게 늘어지는 게 난로
앞 고양이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편하긴 한데 해야 할 일이 많을 때에도 몸이 늘어지니 문제.
클럽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늘 앉던 곳에 늘어져 있지를 않나? 흘러내린
육체를 다시 그러모아 안개로 변해 건물 밖으로 나섰다. 지하 도시야 김한나가 알아서 할 것이고, 이제 지
상에서 써먹을 만한 녀석들을 구해야겠다.
※
솔직히 말해서 고민을 많이 했었다.
지하 도시야 애매한 녀석들만 있으니 감염시킨 녀석들을 부려 먹는 김한나를 믿고 맡길 수 있다지만 지상
에서는 써먹을 녀석들이 부족했으니까. 판타지 세상처럼 정보 길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중원 무림처럼
하오문이나 개방 거지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현대판 흥신소라 해 봐야 직원 몇 명 데리고 뒤를 밟는 게 고작. 그 정도면 차라리 내가 구울 몇 마리 만들
어서 사역마랑 같이 스토킹 시키는 게 더 유용하다고 느껴질 텐데. 규모도 작은 조폭들을 건드려서 뭐하
겠는가.
하지만 그런 고민도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그러니까, 악마와의 계약 주선이요?”
“예. 김샛별씨도 천사들에게 이상한 오해를 받기는 싫으실 텐데요.”
드라마 세트장 투어가 끝나고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김샛별을 찾아가 말을 건네자,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그. 곱상한 외모에 노트북과 안경 등 소품이 어우러지니 주변 여자들의 시선이
조금씩 모인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악마들도 다들 파벌이 있고 개인 사업이 있어서, 다른 7대 군주 아래에
있다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거기에 악마들의 권능을 이용해 범인을 찾을 생각이라면 꽤나 큰 댓가
가 필요하기도 하죠.”
하긴, 사건의 범인을 알아낼 수 있는 안드로말리우스의 권능도 있고, 모든 지식이 담겨 있어 읽기만 하면
진실을 알려줄 수 있는 단탈리온의 책 등 다양한 물건들도 있는데 7대 군주가 범인을 알아내지도 못하고
어벙하게 있는 걸 봐선 통하지 않거나, 대가가 매우 크거나 둘 중 하나겠네.
“그 일 말고도 다양하게 알아봐야 할 게 많아서요. 대가는 충분히 지불할 수 있으니 김샛별씨 휘하의 악
마를 추천해줄 수 있나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잘근잘근 씹던 그의 입이 겨우 열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합한 인재가 없군요. 제 휘하의 타천사들이 몇 있긴 하지만 ‘허위’와 ‘방탕’을 담당하
는 친구들이라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까요. 제가 직접 물어보는 질문이 아니라면 계약 관계라 하더라도
거짓말을 할 겁니다.”
쓸모 없는 72 악마 새끼들. 어째서 옛 사람들은 악마한테 이렇게 귀찮은 설정을 처박은 걸까. 하기야 72
악마의 설정을 보면 개나 소나 과거를 알고 미래를 읽으며 세상 모든 지식을 알고 있다고 만들어 놨으니
게임에 넣으려면 이렇게 되겠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김샛별에게는 내색하지 않으며 최대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여기서 유능한
인재를 못 얻으면 일이 너무 귀찮아지니까. 72악마를 시작으로 음모나 흉계에 일가견이 있는 악마를 하
나하나 찾아서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니느니, 여기서 김샛별을 꼬드기는 게 낫다.
“그나마 중립 세력에 가까운 것이 55위, 오로바스군요. 품위를 유지하며 고귀함을 강조하는 친구인지라
거짓말을 하지 않고, 계약자를 속여먹지는 않을 겁니다. 인신 공양을 요구하지 않으니 계약의 대가를 치
르기도 쉬울 거고. 하지만 연락만 할 뿐이지, 계약은 그 쪽에게 달려있겠네요. 제 휘하의 아이가 아닌지
라...”
“좋네요, 시도라도 해 보죠.”
그나저나 지옥의 7대 악마씩이나 되어서 권능을 쓰는 대가를 지불하기도 힘든 건가. 악마의 힘은 자신이
가진 권능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게 봉인되었다면 어벙하고 무능한 모습이 조금 이해가 가긴 했다.
마법 못 쓰는 마법사랑, 권능 못 쓰는 악마랑 다른 게 없으니까.
“이 명함을 불에 태우면 오로바스가 나올 겁니다. 품위와 우아함을 관장하는 친구니 어느 정도 격식이 차
려진 공간에서 소환하세요.”
은색으로 반짝이는 명함을 받아 슬쩍 그가 작업하고 있는 모니터를 보았다. 김샛별의 손짓과는 다르게
실시간으로 글자가 변하는 걸 봐선 예술과 관련된 악마가 교정을 해 주고 있는 건가. 악마들도 되게 힘들
게 사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커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해서 카페를 떠났다.
‘일단 금이랑 은, 보석류를 조금 준비하고... 5성 호텔에서 부르면 좋으려나?’
[작품후기]
보는 소설은 그냥 투데이 베스트에 있는걸로 읽어서 추천이고 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