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89)

새로운 이벤트

지하도시는 유능하면서도 무능하다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니가 다스리는 게 좋겠어.”

“예, 예혜...?”

식탁 아래에서 식탁보에 머리를 박고 웅크린 김한나의 앞에 그녀를 위해 일할 것들을 나열시키며 생각했

다. 인권은 가볍게 무시하고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하는 각양각색의 초능력자들. 그 것도 사람의 정신과 관

련이 있거나 위험성이 높아 현대 사회에서 꺼림직 하게 여겨 이 곳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잔뜩 있는데.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 그러더라고. 그러면 사공을 하나만 남겨두면 되겠지?”

유능한 녀석들이 너무 모여서 오히려 무능 해졌다.

하나, 둘만 있었더라면 하나의 거대 세력이 되었겠지만 지하 도시에 있는 거대 조직은 열 개를 넘어간다.

목숨을 걸고 다른 놈들을 통합시킬 수 없이, 비슷하게 유능한 놈들끼리 뭉쳐서 세월을 허비하니 이토록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김한나만 봐도 그렇다. 무력은 밑바닥이지만 장사 수완과 협상 능력은 최상급. 마약을 식당 후식으로 제

공하며 사람 시체를 식재료로 거래하는 이 미친 도시에서, 총 한발 쏘지 않고 모든 조직의 중심부에 스스

로 걸어 들어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진화한 최고급 인재. 만약 조직의 수가 조금만 더 적었더라면, 균형

이 조금이라도 깨졌더라면 김한나는 자신이 조직을 이끄는 게 아닌 다른 조직의 참모가 되어 있었겠지.

아니면 죽었거나.

탐나는 게 있어도 영역 밖으로 손을 뻗질 못하고, 모르는 게 있어도 자기 영역 밖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 없

는 머저리들. 차라리 지하 도시 밖이었다면 활개치고 다녔겠지만 이 녀석들은 물리적으로 좁아 터진 지

하 도시에 그 비대한 조직을 구겨 넣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다른 녀석들이 공격할 명분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며.

“그러니까, 니가 사공 해. 알겠지?”

작게 웃으며 말하니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김한나의 모습에 첫 만남이 떠오른다. 그 때도 눈치가 빨

라서 잘 수그리고 비위도 잘 맞췄으니까. 시키면 잘 하겠지... 못하면 다른 녀석으로 대체하면 되고.

“자, 이걸 들고, 올바른 자리에 끼워 맞추면 네 말을 잘 들어줄 거야.”

바들바들 떨면서 겨우 일어나는 모습이 마치 새끼 사슴과 같아 보였다. 소희와는 달리 초능력이 육체를

강화시킨 정도가 낮아 꽤나 나이 들어 보이는 인상이지만 하는 행동이 저러니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

다.

소희가 30살에도 불구하고 20대 초, 중반으로 보이는 체대녀 같은 인상이라면 조금 세월을 맞은 김한나

는 직장에서 피로를 잔뜩 쌓은 커리어 우먼이라 해야 할까? 늙어 보인다, 까지는 아니고 성숙해 보인다는

인상.

냉철하고 성숙하며, 피곤에 쪄든 유능한 커리어 우먼이라도 지금 상황은 조금 무서운 걸까.

“뭐해? 어서 머리를 돌려줘.”

머리통이 날아갔음에도 뻣뻣하게 서 있는 열 한개의 시체들. 경호원들은 되살릴 필요가 없으니 지금 서

있는 시체들은 전부 김한나와 회의를 하고 있던 지하 도시의 대가리들. 대가리들의 대가리를 김한나에게

쥐어 주었다, 으음, 라임이 괜찮은데.

부하 삼을 구울들이 수두룩 빽빽한데 어느 세월에 하나하나 수제작을 하겠는가. 심지어 남자들도 섞여

있는데 목덜미의 피를 빨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면적이 적은 머리통만 건드려야지. 그렇게 되면 직

접 피를 빨고 성교를 나누며 만든 굴라들보다 성능이 덜하겠지만, 어차피 필요한 것은 직접적인 무력이

아니다.

“갈 길이 먼데, 어서 끼워주지 않을래?”

“네, 네!”

푸욱, 하고. 김한나가 노파의 머리통을 들고 가 목 없는 시체 위에 올리니 우드득 소리와 함께 목에서 새

살이 돋아난다. 인간의 노파의 탄력을 잃고 주름진 물렁한 살이 아닌, 잿빛에 가까운 회색의 단단한 살이.

근육질의 중년 여성도, 피에 젖은 양복을 입은 얄쌍한 남성도, 금붙이로 화려하게 치장한 여성도 모두와

같이.

말 그대로 머리통을 심어주자 목을 뚜드득 소리가 나도록 풀어주더니 초점 잃은 눈들이 한 곳에 집중된

다. 머리통만 구울이 된 시체병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김한나가 히익, 하고 작게 숨을 삼킨다.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지하도시의 사람이라도, 목 잘린 시체에 머리를 이어주는 모습은 처음 봤겠지.

“융퉁성은 좀 떨어지지만, 시키는 대로 잘 할 거야. 죽으라면 죽을 녀석들이니 잘 사용하도록 해. 아, 이미

죽었으니까 죽으라고 하면 이상한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 하나를 집는다. 마법 술식을 수정하는 게 귀찮아 일괄적으로 목을 잘라버렸다가

조금 후회를 했다. 붙일 놈들은 자르고, 나머지는 터트렸다면 얼굴을 보고 주워 오는 헛짓거리는 하지 않

았을 텐데.

회의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수 십개의 주인 없는 머리통.

“한나야, 얘들도 가져다 쓸래?”

머리만 감염시켜 목 위에 심는다면, 육체는 흡혈귀의 버프를 거의 받지 못한다. 용사의 힘으로 강화되었

다 해도 고작 썩지 않는 게 고작이겠지. 초능력 하나 없는 민간인이 하급 구울이 되어 초능력자와 대등해

졌다는 걸 생각해보면, 참으로 비효율적인 짓거리였다. 이미 초능력을 가진 녀석들도 있었으니 감염만

시킨다면 B급, 잘 하면 A급 하급까진 노려볼 수 있겠지. 조금만 마음을 쓴다면 이하린 턱 밑까지는 쫒아

올 수 있을 것이다.

“아, 아닙니다. 머릿 수는 충분합니다.”

“그렇지? 지하 도시는 넓이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그런 귀찮음을 감수할 정도로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말이 ‘도시’지, 고작해야 공장단지 밑에 있는 하수 처리장을 확장한 동네니까. 그런 좁아 터진 곳에 한반

도의 범죄자 대부분이 몰려 있으니 좁아 터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좁은 곳에 빽빽하게 여러 조직이 대

가리를 들이 밀었으니 지들끼리 견제하다 멍청하게 도태된 것이고.

말 그대로, ‘사람’은 많다.

죽여서 쓸 놈이던, 김한나가 알아서 부려먹을 년이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리따운 소년. 여리여리한 외모와는 다르게 강력한 힘을 가졌으며, 나이에 맞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마약을 먹고 총

을 쏘는 동네다 보니 그 정도는 어느 정도 익숙했다. 자신 또한 지하 도시 경매장의 주인. 행패를 부리는

것들이 어떻게 처분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하지만 지하 도시에 기어들어와 숨어살며 전투를 피하던 몸으로서, 이 소년의 강함은 감히 상상조차 하

지 못했다.

“김한나, 배신, 배신이냐! 우리들이 쌓아 올린-!!”

“뭘 쌓아 올려, 모래성도 아니고 씨발거.”

우드득, 2m는 되어 보일 거구가 힘 없이 풀썩 주저앉는다. 저 새하얗던... 지금은 젤리처럼 변한 자그마

한 손에 머리통과 척추가 통으로 뽑힌 상태로. 마치 책상 나사를 끼워 넣으라는 것처럼 별 감흥없이 던져

진 머리통을 붙잡고 기괴하게 으스러진 목덜미 위에 머리통을 다시 올려 둔다.

으스러진 척추가 살아 있는 벌레처럼 기어서 시체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간다.

“좋아, 다음은 어디야?”

“그, 여기서 세 블럭 남쪽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회의실에 다짜고짜 난입해서, 수십 명의 총탄과 초능력 세례를 그저 몸으로 받아

내는 것으로 시작된 일탈. 어제 까지만 해도 구역을 나누고 사업 파트너로서 팽팽하게 협상을 하던 사람

들의 목이 참수되고, 그 잘린 머리를 직접 들고 옮긴 입장으로선 감히 이걸 ‘일탈’ 따위로 불러도 되나 싶

지만.

타 앙- 하고 총소리가 울린다.

부질없이.

“이게, 무슨...!?”

“어떻게 된 게 이놈이고 저년이고 다 총질만 하지?”

당황과 공포로 눈을 크게 뜬 경비원 하나가 누운 자세 그대로 바닥에서 올라온 핏방울에 머리가 터져 죽

는다. 목을 뜯어낸 시체에서 흐른 피가 방울 져서 문 밖으로 향한다. 펑 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와 비명 소

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총소리와 함께 사그라진다.

지하 도시를 관리하며 중앙 관리실에 세금을 납부하던 조직의 장들이 전부 죽었다. 그리고 그 휘하 조직

의 보스들도 전부 죽어가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소년으로 인해 그들만의 도시가 완벽하게 무력화되고 있

는 것이다.

‘이게, 이게 말이 되나...?’

빌런이 되는 게 무서워서, 초능력으로 이익은 보고 싶지만 국가와 대적할 능력과 깡은 없어서 숨어든 범

죄자들의 도시. 그런 도시가 초능력자 협회와 거래를 한다면 가장 먼저 받아오는 것이 무엇일까?

정의감에 날뛰는 히어로의 명단? 협회와 척을 져서 출동이 늦는 회사들의 목록?

당연하게도 그들이 가장 원하던 것은, ‘초능력자 제압 장비’였다. 도시에 미쳐 날뛰는 히어로가, 혹은 그

들의 것을 탐내는 빌런이 쳐들어올 경우 지하 도시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초능력자를 제압할 수 있

는 무기.

총탄이 난무한다 하더라도 화염계 능력자 하나가 날뛰는 것 보다 적은 피해를 입힐 것이고, 소형 EMP가

터진다 해도 바람계열 능력자가 환기구를 무너트리는 것 보다 피해가 적을 테니까. 그렇기에 대부분의

거대 조직들은 도시 중심부로부터 특별한 탄환을 배급 받았다.

“아오, 이건 뭔데 간지럽지?”

피로 만든 젤리 속에서 꿈틀대고 있던, 저 탄환을.

총알도, 폭탄도, 약품도, 가스도, 초능력도 먹히지 않는다. 지하 도시가 자신들의 몸을 지키기 위해 만든

모든 첨단 과학의 집약체는, 고작해야 몸이 점액질로 변한 소년의 몸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뭐해? 오늘 뽑을 머리가 많아. 빨리 앞장서.”

“...네, 알겠습니다.”

정말 다행인 점은, 이 작은 괴물이 자신의 눈치 빠른 행동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이었다.

‘도, 돌아가면 그 접대부 세 명부터 전속으로 계약해야겠다.’

원망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돌아가더니,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절을 올리는 것을 보며, 김한나는 필사적

으로 소년이 마음에 들어 했던 모든 것들의 목록을 머리속에 작성하기 시작했다.

[작품후기]

요즘 남녀역전 소설이 제철인것 같아 기쁘네요. 뭔가 많이 올라옴.

이 소설 다음거는 대가리 비우고 쓰지 말고 스토리라인을 좀 확실히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다른 잘 쓴 남

녀역전 소설 보면서 느낍니다. 메인 스토리를 대충 잡고 쓰다보면 뭔 옴니버스 소설을 쓰는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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