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189)

새로운 이벤트

8차선 도로가 녹아내리고 인도가 파괴되었으며, 인접한 건물 로비 몇 개가 부숴지고 차량이 뒤집히며 시

민들이 비명을 지르고 대피하던 사건은 하루만에 정리가 끝났다. 협회의 뒷처리반이 와서 아스팔트를 다

시 깔고, 건물을 수리한 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해산.

몇 m를 초토화시키는 초능력자의 화염탄이 이리저리 휭휭 날아다닌 사건 치고는 별 다른 반향이 없었

다. 심지어 그 일에 휘말린 시민들조차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편안하게 돌아

다니고 있었다.

[야 니들 불빠따 봄?]

[ㄴ 불빠따 ㄴㄴ 빛빠따]

[이번에는 애인 일 아니라고 레이저 안 쏘는 거 봐라 ㅋㅋㅋㅋㅋ]

사망자는 없어도 부상자는 있는 사건임에도 뉴스에서는 속보 뉴스로 사건 설명 세 줄 적은 이야기가 슬쩍

올라온 게 전부였고, 뉴스 방송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빛부격차 밈으로 인터넷에서 떠들던 네

티즌만이 관심을 보이고 낄낄거린게 전부.

그렇게 무관심 속에서 협회는 기절한 사람들을 들쳐 업고 협회 건물로 돌아갔으며 경비원들은 사장인 김

샛별의 연락이 왔는지 별 말없이 다시 자신들의 회사로 돌아갔다. 그래도 천사와 계약한 초능력자를 누

가 죽였는지 모르니 깔끔한 뒷처리라고 볼 수 없지.

가장 큰 문제도 남아 있다.

‘이 새끼들, 너무 무능한데?’

다른 모드에서 봐 왔던 천사와 악마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천사와 악마들은 높은 사양의

모드들로서, 위에서부터 내려오면 손에 꼽을 수준으로 고급 사양을 가지고 있었다. 용사와 마왕처럼 ‘세

계의 운명’을 건 모드를 빼면 가장 높은 등급의 모드였으니까. 그렇기에 천사들은 언제나 완벽했으며 악

마들은 교활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 선입견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듬뿍 생겼다.

우선 천사들. 천사들은 신이 만들어낸 피조물로, 마치 완벽하게 짜인 최첨단 기계처럼 딱딱 맞물리는게

특징인 종족이었다. 전투력에 모든 능력치를 투자한 능품 천사와 같이 특화 유닛을 종류별로 뽑아 서로

가 서로의 결점을 보완하는 방식이 상대하기 매우 까다롭다.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킨다면 간편하지만 신

앙심으로 똘똘 뭉친 천사를 타천사로 만드는 노력을 하느니 그냥 정면에서 깨부수는 게 쉬운 녀석들. 도

발도 이간계도 전략이 먹히지 않으니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 말고 약점이 존재하지 않는 게 천사들의 세

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부에 있는 인간 계약자 하나 죽었다고 눈깔이 뒤집혀서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라. 정상

적이었다면 새로운 천사가 와서 지휘를 할 때까지 능품 천사가 기도를 하며 잠수를 타는 게 올바른 모습

인데.

고작 암살한 건에 지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천사. 그 점은 악마도 마찬가지다. 칠죄종의 악마가 서로 사

이 좋게 하하호호 지낼 리 없으니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 그런 와중에 자신의 영토 한 가운데에서

일어난 일을, 대악마 루시퍼가 알아차리지 못한다? 막말로 전시 상황인데 군 사령부에 외부인이 들락날

락 해도 초병들이 눈치를 못 채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처음에는 천사를 건드려서 이익을 보려는 악마의

수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새낀 진짜 민간인 방패로 내밀고 지는 튀었네?’

자신의 건물 경호원 중, 악마와 상관없는 사람들로 천사들을 막게 한 뒤 김샛별은 드라마 촬영지로 향했

다. 무려 4구역, 그러니까 부산 지역의 항구까지. 천사들이 전라북도에서 올라가 서울 남쪽으로 직행한

걸 생각해보면, 정말 한반도 정 반대쪽까지 도망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 ‘김샛별’도 악마 ‘루시퍼’도

볼 수 있는 이득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최강 히어로의 사이드 킥 겸 남편으로서 편하게 놀고먹어야 하는데.

‘씨발, 답이 안 보이네.’

천사는 완벽하며 정교한 톱니바퀴 예술품처럼 현상유지를 하고, 악마는 교활하고 지혜로워서 이익을 추

구하며 커다란 전쟁을 금지한다. 그렇기에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널부러져 있는 것을 선택했다.

권속인 구울도 실험체 두 명에서 끝냈고, 연금술사를 추적하지 않았으며, 내 주변의 테러리스트와 빌런

을 방치했다. 협회의 천사들을 방치했고 악마들과는 간단한 계약 관계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편이 제일

좋으니까.

천사는 선(善)을 행하며 율법을 지키고, 악마는 이익을 위해 인간을 가축 비슷하지만 지켜줄 존재로 생각

한다. 고로 지구를 멸망시키는 마왕이 나타난다면 천사와 악마는 자연스럽게 마왕을 적대시한다. 그러니

까 이레귤러인 내가 끼어들지 않고 얌전히 있으면 지들끼리 열심히 살다가 마왕의 군대와 맞서 싸울 것이

고, 그 때 내가 레벨업을 시켜 둔 소희가 마왕을 저격하면 된다. 그런 생각이었는데.

‘이러다가 마왕이 오기 전에 묵시록이 열리겠네, 씨벌...’

여기는 게임 속 완벽하게 프로그래밍 된 세상이 아니라는 것처럼, 천사와 악마가 맛탱이가 갔다. 정확히

말하면 정교성이 떨어지고 감정적으로 움직여서 돌발상황이 마구잡이로 발생하는 것이다. 하기야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힌트는 있었다.

진화시키지도 않은 굴라가 지 멋대로 진화한 것 부터 그랬고, 내가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그랬

다. 더군다나 천사도 악마도 용사도 모르는 암살자 새끼가 있는 것 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진 것이다.

결국, 나는 발로 뛰어야 할 운명이란 소리인가.

“하늘아, 왜 그래? 협회에 무슨 일 있었어?”

“아냐, 누나. 협회에 아무도 안 남고 텅 비어서 이상하다 싶었을 뿐이야.”

“확실히, 이번 일은 좀 이상하지. 아무런 증거 없이 회사 빌딩으로 돌진하지를 않나, 시민들 앞에서 난동

을 피우고. 아무리 테러 때문에 협회가 바쁘다 해도 이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을 텐데.”

소희와 함께 협회에 가서 가벼운 사정청취를 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목검으로 사람을 후려치며 엎드

리라고 고함을 지르던 소희가 내 눈치를 살살 본다. 지하 도시에서 하급 구울을 발차기로 박살낸 건 기억

도 안나는 사소한 일인지,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서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은 상황.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

냥 내버려 두고는 있는데.

“그런데 누나.”

“엉, 왜?”

“저건 뭐야?”

“...그러게.”

그녀의 등 뒤에서, 빛나는 목검이 둥실 떠서 따라오고 있었다.

표현 그대로, 빛나는 상태로.

“그, 불빛이라도 좀 끌 수 없어?”

“...미안, 아직 제어가 잘 안되네.”

허공에 둥둥 떠있는 1m남짓의 나무 막대기는 형광등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거실

불을 끄고 소파에 널부러져 있음에도 대낮처럼 집 안이 환하게 빛나는 수준. 심지어 소희의 주변에서 맴

돌다 보니 내가 그녀의 품에 안기기 위해 가까워지면 누군가 눈 앞에 손전등을 들이 댄 기분이 든다.

“그, 손등에서 뿅 하고 나왔는데 들어가게 하는 방법을 모르겠네.”

“그러면 뭐... 놔두고 하자.”

“음?”

웅웅 떨리는 빛나는 목검을 무시한 채, 소파에 늘어진 그녀에게 들러붙는다. 슬그머니 손을 뻗어 헐렁한

셔츠 사이로 드러난 옆구리를 만진다. 문지르면 매끈하면서 부드럽고 누르면 손가락이 슥 들어가게 말랑

하지만 반탄력이 느껴질 정도로 탱탱한 살결. 그 살결의 감촉만으로도 몸이 달아오른다.

아니, 실제로 달아올랐다.

‘천사가 아니라 보양식이네.’

영혼만 남은 천사. 속성을 분류하자면 빛이니 광이니 선이니 잔뜩 있을 거다. 소화만 시킨다면 몸에 좋을

수밖에 없는 에너지 덩어리. 그 때문인지 평소보다 몸이 뜨끈뜨끈하고 쉽사리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는

게 느껴진다. 서늘하던 손 발도, 수족냉증이 사라진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듬직한 모습을 보니까 좋네~”

“그래? 듬직했어?”

듬직했다는 칭찬 하나에 꼼지락거리던 왼손이 멈춘다. 불안하면 손가락을 비비적거리거나 다리를 떠는

게 알아보기 너무 쉬운 사람. 흡혈귀에게는 뜨겁게 느껴지는 그녀의 손이 옷 안으로 파고드는 게 느껴진

다.

“하늘아, 몸이 좀 뜨겁네.”

말없이 그녀의 품 안에 고개를 묻는다. 커다란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온 몸을 어루만지는 손길

을 만끽한다. 굳건하지만 말랑말랑한 모순적인 손. 용사의 덕목에는 매력이 포함되었는지 그녀의 외모뿐

만 아니라 육체까지 점점 관능미 넘치게 변해가고 있었다.

물론 용사가 아니라 흡혈귀의 피 때문이 아닐까 싶지만.

가슴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든다. 그녀의 연갈색 피부 또한 열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가슴골

에서 풍만한 가슴살로 이동하며 쪽 소리가 나게 계속해서 입을 맞춘다. 이쪽 세상 여성의 성감대가 가슴

이 아니라는 것은 전혀 상관없었다. 흡혈귀의 입맞춤은 특별하니까.

“나만 뜨거운 게 아닌데?”

가슴에 입을 맞추며 옆구리를 어루만지던 손을 아래로 내린다. 헐렁한 바지 고무줄 사이로 파고 들어가

니 탄탄한 엉덩이를 감싼 면 팬티가 손 끝에 걸리적거린다. 내 웃옷을 벗기는 그녀에게 호응하며 눈을 감

고 슬그머니 손으로 그 넓은 엉덩이를 만지자 손 끝에 축축함이 느껴진다.

“그래도, 이번 일 때문에 내일 하루는 쉴 수 있지?”

“...그래, 내일은 아침에 출근 안 하네.”

내 상의를 벗긴 그녀가 거칠게 내 바지를 내리자 투툭하고 바지 허리춤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신경 쓰이는 건 단 하나.

‘저건 무슨 조명도 아니고.’

내 위에 올라탄 소희의 머리 위에서 형광등처럼 우리를 내려다보는 빛나는 목검.

[작품후기]

제가 지금 서울 대학로 근처 사는데

대학로 근처 아파트 단지 입구에 신천지 공부방 있어서 자식 돌려달라고 시위 일어난 적 있고, 제가 사는

아파트 옆 시장에 코로나 걸린 사람 와서 방역하고 돌아다니네요. 분위기 갑자기 아포칼립스네요.

친구 중 하나는 자격증 시험으로 졸업 학점 따야하는데 자격증 취소되서 졸업문제 생기고, 아직 학교 다

니는 사람들 다 개학 연기되고 난리인 상황.

진짜 신천지 한 명 때려잡으면 학점 1점 이런거 안하나?

다들 몸 조심 하세요. 저는 야행성으로 진화해서 사람 없는 상태로 돌아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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