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이단자의 대가리를 깨네 마네 하는 우렁찬 구호 소리와 함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린다. 신성력으로 만
들어진 마법진이 산산조각 나고, 내가 계단 그림자에 몸을 숨김과 동시에 콧김을 훅훅 뽑아내는 근육질
의 여성이 불똥을 튀기며 계단을 뛰어내려간다.
‘저 아줌마가 꽤 높은 사람이던가.’
이전 방화 사건 때, 서류를 나눠 주는 사람이 저 아줌마한테 열심히 굽신거리는 모습을 봤다. 역시 직위가
높은 히어로가 더 높은 천사와 계약을 맺었네.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대놓고 반투명한 천사
를 매달고 뛰쳐 가니 그 뒤를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가며 한숨을 내쉰다. 일반인 눈에는 보이지 않겠
지만, 이 쪽 관련된 사람이나 귀신을 보는 사람 등 오컬트 쪽 사람들이면 경기를 일으키며 도망치겠네.
욕망에 따르기 위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악마와 달리, 천사들은 신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그 부
여된 성질을 따라간다. 저기서 콧김 훅훅 뿜는 능품 천사는 악마와의 전쟁을 맡은 천사. 그 뒤를 따라가는
일반 천사들은 사람들을 보듬고 잡다한 업무를 위해 태어난 천사.
저 불붙은 멧돼지 같은 아줌마가 ‘결코, 다시 전쟁!’을 외친다면 유도리 없이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소리
였다. 그리고 그 전쟁이 취소될 확률은 0%. 악마와의 전쟁을 위해 태어난 천사니까, 충분한 계기가 주어
진 상태에선 무조건 전쟁을 한다.
지금까지 저 지랄이 나지 않은 것은, 아마 죽은 천사가 저 능품 천사를 제어하는 역할이었다는 이야기겠
지. 천사들의 주거지 한 복판에서, 성당으로 지정된 신성한 땅에서 꽤나 높은 등급의 천사가 죽었다. 김샛
별이 죽인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생각나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
하나, 루시퍼가 아닌 다른 악마가 루시퍼를 엿 먹이기 위해 저질렀다.
둘, 마왕의 첨병이 히어로 협회를 공격했는데 하필 천사가 당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가능성이 반반이라고 생각된다. 다른 악마가 죽였다고 생각하면 김샛별이 너무 무
능한 병신새끼가 되어버리고, 마왕의 첨병이 죽였다고 생각하면 소희가 무능하다고 생각되어버리지만
아무튼.
지옥의 7대 악마 군주이자 인간의 칠죄를 담당하는, 신의 자리를 넘본 천사가 자기 집 안방에서 일어나는
암살 사건을 눈치 채지 못한다? 심지어 1구역과 5구역마냥 한반도 끝에서 끝자락도 아니고 드라마 작가
활동을 하느라 협회 근처에 사는데. 오만의 루시퍼가 아니라 무능의 루시퍼라고 불러도 아가리를 닫아야
하는 상황.
반대로 마왕의 첨병이 인간계에 혼란을 일으키는 사전 작업으로 히어로 협회의 분열을 노렸다? 이 경우
용사로 각성해서 각종 초능력과 마법까지 익힌 소희가 눈치 채지 못한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악마’를 눈
치 채지 못하는 건 정상이지만, ‘마왕’의 기운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용사 실격이니까.
물론 루시퍼나 소희가 눈치 채지 못한 이유가 루시퍼보다 강한 악마, 소희보다 강한 마물일 경우는 전혀
없다. 그 전력이면 비전투직 중급 천사 하나가 아니라 2구역을 통째로 부쉈지. 대악마와 용사를 가지고
놀 NPC가 있었으면 내가 이 게임을 진작 접었어.
그리고 정말,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세 번째 가정.
그냥 평범한 빌런이 우연히 죽였다, 같은 상황이다.
이 경우라면 말이 된다.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으니 신성력도 통하지 않았을 거다. 대악마인 루시퍼가 2구
역을 기어다니는 빌런 개개인에 관심을 둘 리 없고, 소희의 용사 센서도 반응할 리 없다. 하지만 정말 이
모든 게 우연이라 생각하긴 싫었다.
‘차라리 치밀한 계획에 한 대 맞았다고 생각하지, 우연히 내 인생이 좆되가는 중이면 누구한테 화를 풀
어? 무찌를 적이 있어야 꼬인 사건을 풀어내지, 우연히 죽어서 우연히 전쟁이 일어나면 전부 초토화다.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일지도 모르는데 3차, 4차 세계 대전이 열려서 아포칼립스로 돌아가면 이 최첨단 인
프라도 끝이고.’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간다.
저 단순 무식의 화신으로 보이는 마초 아줌마와, 악마를 징벌하겠다고 눈깔이 돌아간 능품 천사는 대화
로 사건을 종결시킬 수 없다. 악마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천사한테 악마를 죽이지 말라고 지껄인다? 나
무 뿌리에 물을 뿌리고 나서 그 물을 흡수하지 말라고 나무에게 소리지르는 것과 같은 짓이니까.
‘그래도 7대 악마 중 하나가 하루만에 뚝딱 멸망해 버리지는 않겠지.’
자그마한 아기천사들에 이끌려 골목길로 뛰쳐나가는 마지막 사람들을 보고 그대로 협회 내부 깊숙한 곳
으로 들어간다. 성당을 언급했으니까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교회는 죽은
사람을 달래주는 역할도 있었으니까.
11층, 12층, 13층... 흥분한 천사들이 난장판을 피웠는지 층마다 신성력이 미친 것 마냥 휘몰아치고 있어
서 마법으로는 찾을 수 없었다. 애당초 찾는 대상이 사람의 시체와 유리관이다 보니 발달한 오감도 그닥
도움이 되지 않고.
‘꽃 냄새...’
그렇게 건물을 헤메다 보니 낯선 꽃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사무실 몇 군데에 장식용으로 가져다 둔 화분
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인공적인 방향제 냄새에 묻혀버린 상황. 이 정도로 강렬하게 향을 뿜는 꽃은 없
었다. 심지어 향기가 나는 곳은 13층이 아닌, 13층 구석 회의실 환풍기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상태. 사람
은커녕 갓난애기 하나 기어가기 힘든 자그마한 통로였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안개로 변신시켰다.
생화학 테러를 막기 위한 건지, 아니면 그냥 건물 설계를 할 때 이상하게 만든 건지 이 건물의 환풍기는 이
리저리 꼬여 있었다. 12층과 13층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데 환풍 통로가 무슨 네 갈래길, 다섯 갈래 길
잔뜩 있는 식. 어쩌면 천사들이 건물을 지을 때 의미를 부여했을지도 모르고.
중요한 것은 내가 12층 모든 방을 열어보고 탐색했을 때 찾지 못했던 공간이 환풍기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이 천사들의 멍청함에 감탄이 나왔다. 이러니까 루시퍼가 별 신경도 쓰지 않고
돌아다닌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회의실에 접근 방해의 마법을 걸고서는, 아래 층에서 들릴 정도로 고함을 질러서 회의 내용을 다 들리게
만들고. 비밀 공간을 만들어서 육안으로 탐색 시 찾을 수 없게 해 놓고 서는 환기 시스템을 일반 층계와 엮
어 놔서 침입할 구멍을 만들어 두고. 심지어 범인이 누군지 몰라도 일단 무장한 상태로 전 병력이 건물 밖
으로 뛰쳐나가서 내부가 텅 비었다.
아무리 중요한 물건이 없다지만, 김샛별이 불을 지르고 다니는데 건물을 비워...
음?
‘이거 완전 자업 자득 아닌가?’
생각해보니 인명 피해 없이 건물에 불을 지름으로서 인간의 감정을 흡수하고, 겸사 겸사 건축비까지 뜯
어내는 게 김샛별의 방식이었다. 하급 천사라면 모를까 중급 천사 정도라면 자신들의 옆에 자리 잡은 대
악마의 존재를 알고 있을테고.
‘진짜 제 무덤 스스로 판 거 아닌가?’
건물에 불을 지른 게 10번이 넘어가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을 거고, 방화범과 김샛별의 회사의 연관
관계를 밝혀낼 수 없으니 천사 입장에서는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아도 악마에게 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었겠지. 아무리 국가 기관을 장악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TOP 50위권 안에 드는 회사들을 증거 없이 공
격할 수 없으니까.
그런 와중에 지휘관 역할을 맡은 천사가 암살당했다?
눈깔이 안 뒤집어 지는 게 이상할 정도. 왜 저리 단순 무식하게 뛰쳐나가나 싶었더니, 방화 사건 때문에
이를 갈다가 이 기회에 때려잡으러 가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천사의 행보도 이해가 된다. 김샛별
이 진범이던 아니던, 일단 방화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있으니까.
‘근데 그것도 이길 때의 일이고.’
상황은 완벽했다. 문제가 있다면 레벨의 차이.
‘고작해야 중급 능품 천사 하나가 대악마를 어떻게 이겨.’
능품 천사 ‘들’은 악마와의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무슨 뜻인가 하면, 능품 천사 개인은 악마와의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전투병 1이라는 소리다. 일개 보병
하나가 소총 하나 들고 전진해서 적국의 수도를 함락시킬 리 있나? 능품 천사로 이루어진 군대를, 상급
천사들이 이끌고 달려가도 못 죽이고 겨우 추방만 시킨 게 루시퍼인데.
그런 불리한 상황이지만 능품 천사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김샛별은 능품 천사를 죽일 수도 없
다. 그 뒤를 따르는 무수히 많은 천사들의 계약자 하나 하나가 히어로 협회의 공무원이니까. 이길 수 없는
데 죽어도 된다고 달려드는 광신도와, 손쉽게 죽일 수 있지만 죽이면 사업적 손해를 어마어마하게 보는
기업가의 싸움. 승률 이전에 잃을 것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지금 협회에서 중급 능품 천사와 다수의 하급 천사들이 김샛별씨 대가리 부수러 출동]
김샛별에게 문자를 보내자 5초도 되지 않아 답장이 온다.
[어늦족으로가습니까]
[북]
3구역 학업지구는 전라북도쪽이고, 거기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1구역, 서울과 경기 인근의 도심지가
나온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김샛별의 회사 빌딩들도 그 쪽에 있고. 답장이 오지 않는 스마트 기어는 놔
두고, 나는 12층의 비밀 공간을 둘러보았다.
유리관, 새하얀 꽃, 십자가, 울고 있는 천사.
-제가 보이시나요?
...?
왜 살아있냐?
[작품후기]
김샛별이 다급한 이유
1. 내 건물에 미친년이 불지르러 뛰어오는 중
2. 근데 그 미친년이 공무원임
3. 불 지르는 걸 막으면 천사와 악마의 대 전쟁이 일어남
4. 불 지르는 걸 안막으면 일구어둔 기업 이미지가 박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