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상식적으로 악마들이 천사를 죽일 리 없었다. 천사들이 먼저 공격을 해 와서 반격을 하다 죽인다면 몰라,
천사들의 진지 한 가운데에 있는 고위직 천사를 암살하는 일 따위 벌어질 리 없으니까. 당연한 이야기다,
악마는 기업인에 가까운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으니까.
비유하자면 업계 점유율 2위 삼선라면이, 업계 1위 푸라면을 이기기 위해 삼선 이사를 암살하고 마케팅
사무실에 방화를 한 뒤 공장에 폭탄 테러를 해서 업계 점유율을 역전시키려는 상황. 이득과 손해를 철저
하게 따져 계약을 위해 살아가는 악마가 그런 미친 짓을 할 리 없었다.
속보가 흐르고 사람들이 숙덕거리는 중에도 소희와 내 스마트 기어에는 긴급 호출 메시지가 오지 않는 상
태.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뉴스를 빠르게 읽는 소희를 놔 두고 김샛별에게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문자를
보낸다.
‘이건 안 좋은데...’
차라리 소희에게 메시지가 왔다면 안심할 수 있었을 텐데. 등록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신참이라 A급임에도
이번 사건에서 제외하였다면 상관없지만... 만약 천사들만 모여서 악마에게 쳐들어 간다면 일이 귀찮아
진다.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온다 싶으면 계약을 하는 악마와는 달리, 천사들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근본이 흡혈귀인 나는 천사들이랑 친하게 지낼 리 없고, 이미 악마랑 계약을 해 버린 소희
도 귀찮아진다.
최악의 경우는 빛의 힘을 가지고 악마와 계약을 한 소희를 이단자로 낙인 찍는 것.
힘으로 싸운다면 악마도 슬쩍 우리 편을 들어 손쉽게 무찌를 수 있지만 천사들이 뿌리내린 곳이 문제다.
그 새끼들이 어디 봉사 단체나 사설 단체를 만든 것도 아니고 대놓고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에 자리 잡았
으니까.
재수가 없으면 히어로가 아니라 국가반역자 빌런이 될 수 있다는 소리.
악마들 입장에서도 천사와 악마의 대 전쟁보다 국가에 찍히는 게 무섭겠지. 아무리 봐도 김샛별의 주된
활동은 대한민국을 기반으로 한류 열풍에 탑승해 있는 걸로 보이니까. 전쟁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업 기
반이 날아가는 게 두려울 거다. 자기가 한 잘못도 아닌데 수 십년간 노력해서 키워 둔 전 재산이 박살이 난
다? 악마 입장에서는 죽는 게 더 나을 지경.
빌런과의 싸움에 익숙한 건지, 도시 곳곳에서 빌런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천사와 계약한 히어로들이 집결
하는 것이 방송되고 있지만, 시민들은 여전히 자기 할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협회의
건물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날아오른다, 마치 벌 집에서 뛰쳐나오는 벌떼와 같이.
그리고 그들 중 천사와 계약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사 세력만 남아 있는 건가?’
명분도 있겠다 사람들을 밖으로 보내는 건 쉽겠지. 서류 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퇴근시키고, 순찰 업무를
보는 히어로들은 경계 강화를 목적으로 밖으로 내보내면 되니까. 아마 협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천사와 계약한 사람들 아닐까.
“누나, 나 협회에 다녀올 게.”
“... 그래, 알겠어.”
협회로 복귀하라는 문자 하나 없었기에 그대로 협회를 향해 달려간다. 어차피 이대로 있다가는 소희랑
사이 좋게 이단아로 몰려 테러리스트 빌런이 될 상황. 정보를 얻어 올 부하들도 없으니 몸으로 뛰어야 한
다.
‘진즉 정보 단체를 만들었어야 하는데.’
음모고 뭐고 용사의 힘으로 히어로 활동을 하면 된다는 짧은 생각 때문에 안일하게 머물러 있었던 게 잘
못일까? 정작 내가 발로 뛰게 될 상황이 오니 후회가 막심하다. 물론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소희 품에 안
겨서 띵까띵까 노는 생활을 청산하고 발 바쁘게 음모를 꾸미고 정보 단체를 꾸려 뒷세계를 장악할 마음은
들지 않지만.
기왕 용사의 품에 안겼는데 인생 좀 날로 먹어도 되지 않을까.
여태껏 고생한 게임이 몇 판인데.
돈이 된다는 이유와 게임은 어렵게 해야 제 맛이라는 생각, 거기에 더해 실력에 대한 자부심과 인터넷에
서 ‘저 새끼는 변태다’ 같은 관심을 받고 네임드가 된다는 감각에 취해 채찍질에 맞고 흙 묻은 빵과 싹 난
감자를 씹어 먹는 플레이를 몇 판이나 해 왔던가.
그런 고생을 다 뒤로 하고 처음으로 한 판 얹혀서 편안한 인생을 살아볼까 싶었는데. 이 세상이 게임이고
내가 게임 속에 감금당한 거라면 데이터를 두고두고 보관해서 나만의 휴식처로 쓸 생각이었고, 판타지
소설 마냥 내가 게임 속에 빨려 들어와서 다시는 못 나간다면 인생 편안하게 살아갈 생각이었는데.
정체 불명의 개새끼들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남의 인생의 근간을 뒤집어 엎으려 들고 있었다.
‘어, 좆같네?’
건물에 접근하고, 당연하다는 듯 은글 슬쩍 전개되어 있는 신성력 술법의 틈새로 기어 들어가며 생각을
할 수록 화가 솟구친다. 아니 씨발, 게임 속 세계면 좀 개연성 있는 이벤트가 벌어져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무리 내가 정보를 구해 올 녀석이 없어서 지하 도시에만 머무른다고 해도, 악마랑 계약한 다음 날 천사가
전쟁을 일으키는 게 말이 되나?
“― 야 합니다! 이대론 안됩니다!”
“진정하세요, 감정에 몸을 맡길 상황이 아닙니다.”
1층부터 천천히 올라가는 와중 썰렁하게 비어가는 건물에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 목소리를 따라10층에
있는 회의실로 향하니 신성력으로 봉인된 커다란 문이 보인다. 하지만 천사들도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
했는지 목소리는 전부 밖에 들리고 있었다.
‘이 새끼들도 은근 허당이네.’
근처에 악마의 힘을 가진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막아내는 마법진 부터, 문고리에 손을 대면 감전시켜 기
절시키는 보안 마법, 힘으로 돌파하려 들면 그대로 1회 데미지를 돌려주는 카운터 마법까지 다양하게 얽
힌 휘황찬란한 마법진이 문 앞에 둥실 떠 있는데, 방음 마법은 사용하지 않다니.
‘아니면 협회 안에 자신들만 있을 거라는 자신감인가. 그 정도로 협회 장악력에 자신이 있고.’
신성력 때문에 문 근처는커녕 벽에 귀를 댈 수도 없지만, 고양된 목소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여장부 하나
때문에 다들 언성이 높아져서 계단에 선 상태로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얘들은 초능력자 협회 본부에서 청
력이 발달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머리에 피가 올라서 비정상적인 상태인
지 구분이 안 되네.
※
드넓은 회의실이 꽉 찰 지경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협회에 거주하는 천사와, 그들의 계약자들이 전부 모
이려면 옥상 정원이나 이 대회의실에 모여야 하니까. 외부에서 관측될 정원에 모이는 것 보단 조금 갑갑
하더라도 내부에 모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당장 악마 놈들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이대론 안됩니다!”
“진정하세요, 감정에 몸을 맡길 상황이 아닙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천사 하나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울부짖듯이 외치자, 다른 계약자 하나가 그녀를
뜯어 말린다. 핏대를 올리고 어느새 무기를 소환해 발을 쿵쿵 올리는 모습에 머리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
푸리는 사람들까지.
‘저쪽은 천사가 맞는지 의심스럽네.’
인상을 찌푸린 계약자 하나가 핏대 올린 여성을 노려보며 생각한다. 핏대를 올린 채 머리카락에 불꽃이
일렁이는 여성은 중급 천사인 능천사의 계약자. 악마와 타천사를 징벌하는 역할인지라 징벌 천사라고 불
리우는 천사들 답게, 악마와 연관되자 무기부터 뽑아 들고 있었다.
아직 악마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어진 것도 아닌데 계약자는 불꽃을 피워 올리고 흥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고, 계약을 한 천사도 반투명한 상태로 자신의 지팡이를 뽑아 든 채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회의실에서 중급 천사인 능천사보다 높은 계급이 없다는 것. 히어로 협회에서 주변 민
생을 살피고 타락한 권력층에 신벌을 내리기 위해 소수의 권천사와, 그들을 수발할 일반 천사들 밖에 없
었으니까.
악마를 토벌하고 타천사를 말살하는 것이 존재 의의인 능천사와, 사회 지도자들을 감시하고 그들을 올바
른 길로 이끌어야 할 권천사. 능천사의 계급이 높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사무 처리는 능천사의 선에서 이
루어지니 다혈질인 권천사를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성당 한 복판에서 권천사 카마엘의 계약자가 습격당하고, 카마엘이 빛의 품으로 돌아갔다! 대체 무엇 때
문에 망설인단 말이냐, 인간!
하필이면 습격당한 것이 권천사이며, 협회에 남은 사람들은 권능 없는 일반 천사들의 계약자뿐. 같은 중
급 천사들이 진정시켜야 하지만 용기 있는 이들을 이끌어 기적을 일구는 역천사와, 신의 권위를 전해 신
성한 지배를 행하는 주천사들은 빌런 중 악마와 계약을 한 사람이 있는지 수색하기 위해 협회를 떠난 상
황.
-피의 복수를, 악마의 멸살을!
“그리하여 이단자 빌런들의 토벌을!”
화르륵, 불꽃이 일어나고 능천사가 창 밖으로 날아오른다. 그 뒤를 불꽃을 흘리는 계약자가 따라가니 어
쩔 수 없이 천사들 또한 날개를 펼치고 무장을 챙긴다.
“아니, 악마고 뭐고 범인 확정이 아직인데...”
“어쩌죠? 저렇게 과격하게 나서면 범인 수사에 방해가 될 텐데.”
“이 동네 빌런 조직이 한 두개도 아니고, 범행 성명도 아직 나오질 않아 단서도 없는데...”
그 말릴 수 없는 괴팍한 전진에, 이성을 잃지 않은 계약자 히어로들만 이마를 감싸고 협회 테이블에 머리
를 박는다. 아무리 협회 내부에서 암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습격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 병력을 이끌고 나서려는 모습에 두통이 몰려왔으니까.
[작품후기]
수강 신청이 제대로 되는 날이 내 인생에 있으련지
전공 심화인데 전공을 못듣는 띠용한 상황
아 ㅋㅋ 휴학마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