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89)

새로운 이벤트

VR 게임기기에 접속하기 전, 그러니까 이 요상 망측한 남녀역전 세계 말고 내 육체가 살아있던 진짜 세상

에서

“부자놈들은 컵라면도 로봇이 끓인다며?”

“그런 놈들이 컵라면을 먹겠어?”

“맨날 웰빙 야채만 먹으니 컵라면이나 감자칩 같은 걸 별미로 치지 않을까?”

공장에서 무리 지어 시시덕거리는 아저씨들이 하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사회구성원으로서 해야 하는

봉사 기간을 넘어서도 공장에 붙어 인공지능이 할 수 있지만 단가가 맞지 않는 잡일들을 하면서 남아 있

는 잡부들 답게 영양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사회에 대한 불평, 부자들에 대한 시기, 그들을 깔보기 위해 던지는 저급한 농담들.

비데도 아니고 밑구멍 닦아주는 로봇이 있을 거라느니, 밤에 허리를 대신 흔드는 로봇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듣다 보면 그냥 피식 웃게 되는 저급한 농담들이라 별 신경도 쓰지 않고 넘어갔었는데.

“야... 이거 되게 편하긴 하다.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지? 악마가 만들어서 그런가?”

겪어보니 몇몇 우스갯소리는 진실이라는 것이 조금은 느껴진다.

순찰이 끝나고 돌아오자, 벗은 외투를 집게발로 집어 드는 로봇이 우리를 반겨주는 하루.

“과학으로 만든 건 아니고 마법을 섞었을 걸?”

신발장에 대충 벗은 신발은 로봇청소기 닮은 신발 청소 로봇이 위잉 소리를 내며 다가와 제 몸 안에 신발

을 수납한다. 저 안에서 먼지와 때를 제거하고 적외선 소독까지 해서 신발을 따끈하게 유지하겠지.

신발장을 지나 거실에도, 주방에도, 안방에도 침대와 소파와 옷장과 화장실을 정리하는 각양 각색의 로

봇들이 우리가 대충 벗어 던진 옷들을 주워 들고 집 안 공기를 정화시킨다. 그 모습에 소희가 감탄하는 모

습이 마치 장난감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이라 귀엽게 느껴지지만‘저 안에 들어 있는 거, 영혼만 남은 요정들 같은데.’

진실은 추악한 법이니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어으, 좋다...”

욕실 욕조에 준비되어 있는 온수에 몸을 담구며 그녀가 아저씨같은 추임새를 넣는다. 손목의 스마트 기

어로 명령을 내릴 수 있으니 퇴근을 하자 마자 몸을 지질 수 있어서 늘어지는 소희. 슬그머니 옷을 벗고 따

라 들어가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말없이 욕조에 들어가 그녀를 등 뒤에서부터 껴안는다. 청소, 요리, 빨래와 장 보기까지 사람이 살아가면

서 해야 할 모든 잡일을 저 로봇들이 해 버리니 남는 것은 시간 밖에 없다. 하다 못해 심심해서 로봇 대신

장을 보러 나가는 지경이니.

“진짜, 사람이 나태 해지는 게 느껴진다... 악마의 유혹은 무섭구나~”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6시간 4교대로 행해지는 순찰. 순찰 개시 전에 사무실에 들려 카드를 찍어야

하니 실제로는 7시부터 4시까지라고 계산하면, 소희가 연기 지도를 받아도 24시간 중 거의 10시간은 아

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이란 뜻이었다.

용사의 육체는 하루 3시간은커녕 1주일에 3시간을 자도 컨디션이 악화되질 않는다. 나 또한 육체가 변화

하며 소희만큼은 아니지만 하루 4시간만 자도 충분할 지경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잠도 별로 자지 않는 초

인들이 뭘 하겠는가. 물론 전쟁터 한 복판이라 잠을 극단적으로 줄여야 한다면 버틸 수 있겠지만.

“우와, 샴푸 내용물도 리필 되었는데. 요즘 로봇 정말 대단하네...”

‘그거 로봇 아니야...’

뭐 하러 하루 1시간씩 자는 극단적인 생활을 하겠는가. 안전하면 늘어지게 자면 되는 거지. 늘어지게 잔

다 해도 하루 5시간 이상 자지 않지만.

바디 워시를 쭉 짜서 거품을 내던 소희가 옆에 나란히 놓인 샴푸와 컨디셔너 병을 보고 감탄한다. 다 쓴 것

도 아니고 반쯤 쓴 병을 골라서 꽉 채워 놓다니, 요정들이 결벽증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튼 이 쪽 세상 TV 프로그램이 취향에 맞지 않는 나와, 원래부터 TV를 잘 보지 않던 소희. 하는 게임은

출, 퇴근 시간을 보내는 모바일 게임뿐이니 남는 시간동안 할 거라고는 딱 하나밖에 없지 않나. 요 근래의

시간들은 정말 본능에 충실하다고 보아도 좋았다.

욕조 밖으로 나가 몸에 거품칠을 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기 가득한 연갈색 매끈한 피부, 육

체 강화 능력자 답게 늘씬하게 빠져 있는 등 근육과 국적을 의심하게 만드는 풍만한 엉덩이. 새하얀 거품

이 흘러내리는 모습에 나 또한 욕조에서 빠져나온다.

물소리를 듣고 내가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등을 맡기는 모습에 맨 손으로 거품질을 한다. 손바

닥 가득 느껴지는 탄탄하면서도 매끈한 등 근육에 자연스럽게 아래에 피가 몰린다. 어깨에서 등허리까지

살살 힘을 뺀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녀가 몸을 돌린다. 손 안 가득히 느껴

지는 풍만한 가슴의 감촉.

서로 씻겨주며 거품을 칠하고 있으니 소희가 자연스럽게 나를 안아 든다.

“뭔 인공지능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교하네.”

뜨듯한 물에 몸을 지지다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려서 나가는 김에 몸에서 힘을 빼고 나른함을 즐기고 있

으니 소희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니 옷장을 정리하던 로봇이 바퀴를 부지런이

굴려 문 밖으로 사라지는 게 보인다.

알몸의 남녀를 보고 분위기를 읽는 인공지능 같은 게 벌써 존재할 리 없는데 그걸 끝까지 인공지능이라

믿는 소희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흡혈귀를 애인으로 삼고 용사로 각성해서 악마와 계약을 했더

라도 30년 살아온 인생 동안 쌓아 올린 고정 관념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뭐가 그렇게 재밌어?”

“안겨 있는 게?”

“그래? 자주 안고 다녀줄 걸 그랬네.”

바람이 새어 나오는 수준의 작은 키득거림도 놓치지 않는 그녀가 나를 침대 위에 올려놓을 즈음 내 몸에

물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귓가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거품도 몸에 잔뜩 있던 물

기도. 내가 루시퍼의 마법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이제 소희도 마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무섭네, 용사. 나 하나로는 부족했지만 마법 쓰는 사람 두 명 보니까 따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도대체 이 게임 만들 때 NPC를 기획한 놈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캐릭터를 만든 걸까. 방대한 넓이와 무

한한 다양성을 자랑하는 게임에서 그 ‘무한한 다양성’을 전부 최고 등급까지 올려 둔 캐릭터라니. 육체를

다루는 능력부터 신성력과 초능력으로는 모자라서 마법까지. 이제는 너무 잡다해서 귀찮아 보일 지경.

그런 만능 사기캐가 내 완전한 아군이니 앞으로 남은 인생은 편안하게 즐길 일만 남았다. 마왕만 제거하

면 말이지. 침대에 누워서 내 온 몸을 어루만지며 성감을 고조시키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매일이 오

늘과 같아라~ 같은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야, 대단하네 진짜.”

순찰하고, 연기를 배우고, 집 안에서 나태하게 뒹굴고. 그렇게 평범한 일상이 반복될 리 없다고 예상은 했

었다. 대놓고 빌런 조직들이 테러 성명을 내는 와중에 뒷세계에서 악마들이 사업 다툼을 하는 세상. 그런

와중에 히어로가 되어 전쟁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는데 평화가 오래 갈 리 있나.

하지만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게 벌어지는 사건에 머리가 아파왔다.

[이번 습격 사태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

순찰 중 스마트 기어가 웅웅 불길하게 울린다. 나의 손목에서, 소희의 손목에서. 음식점에 걸려 있는 낡은

벽걸이 TV에서, 길거리의 홀로그램 광고판에서, 우리를 구경하며 사진을 찍어 가는 시민들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서.

[...... 이에 히어로 협회는 빌런들의 행동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

새하얀 금발을 가진 여성이 유리 관 안에 곱게 누워있는 영상이 보인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은 평온하

게 잠든 것 같아 보인다. 관 주변에 새하얀 국화가 가득 놓이고, 협회의 동료들인지 오열하며 관을 붙잡고

국화를 짓이기며 바닥을 뒹구는 사람들이 보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인망 좋은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했겠지.

“하늘아, 저 사람들...”

하지만 나는, 악마를 직접 본 소희는 화면 속 사람들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아니, 화면 속 천사들을.

[빌런들을, 가만히 놔둘 수 없어요. 아희는 평소에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빌런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남자가 있었다. 억울하게 스러진 청춘에 분개

하는 중년인이 있었다. 복수해야 한다며 마이크에 열변을 토하는 여자가 있었다. 감정이 흐트러졌는지

제 능력 하나 가누지 못한 상태로 카메라 앞에 그들이 있었다.

새하얀 날개가 일렁이고 나팔검과 불꽃 갑주를 준비하는 천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 씨발... 진짜 좆된 거 같은데.’

관 속에 누워 있는 저 사람도 천사겠지. 저 정도 격렬한 반응을 보면 꽤나 고위직일 것이다. 천사가 영역

으로 지정한 협회 내부에서, 고위급 천사를 암살하고 사라진 테러범. 사람들은 빌런 조직에 치를 떨겠지

만 천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정말 초능력자가 천사를 죽였다고 생각할 까? 아니면...

-저희 아닙니다. 상황이 ㅁㅛㅎ게 돌아가는데 정말 아니에요

영상이 끝나기도 전에 김샛별에게서 다급한 문자가 왔다.

[작품후기]

주말 잘 보내셨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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