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독점, 참으로 달콤한 단어였다.
악마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인간의 감정을 흡수하고 있었다. 과학 기술과 초능력의 합작으로 평균
수명이 100세에 미개발 구역 따윈 없는, 콩나물 시루의 콩나물처럼 빽빽한 인간들은 언제나 과할 정도의
감정을 마구마구 흩뿌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간도 자신의 재물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돈을 그러모으는데, 악마가 자신이 지닌 것
에 만족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리 있나. 당연하지만 악마들 또한 ‘더 많은 것’ 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
는 것이다.
“독점이라...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지?”
“아냐 누나,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어. 오히려 좋은 일이라면 몰라.”
독점이라는 단어에 소희가 반응한다. 악마와의 거래도 찝찝한데 독점이라는 단어까지 쓰이니 더욱 기분
이 묘하겠지. 성경으로 시작해서 다양한 매체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악마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 놨으니
까.
인간의 감정에서 악마들이 얻어가는 에너지는 다양한 곳에 쓰인다. 약해 빠진 하급 악마들이라면 육체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어느 정도 먹고 살 길이 열린 중급 악마들은 감정을 먹고 마시며 쾌락을 느낄 때 쓴
다. 그 위로 올라가면 재화로 사용해서 거래를 하거나, 자신들의 무구를 만들거나 능력을 사용하거나 다
양하게 쓰이니.
인간의 감정이란 그들에게 있어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이 귀중한 것이다. 없으면 죽고,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 감히 돈과 비교할 수 있을까. 흡혈귀와 혈액의 관계보다 더욱 밀접한 것이 악마와 인간의 감정
이었다. 적어도 흡혈귀는 인간의 혈액 팩으로 거래를 하지는 않으니까.
“네, 저희는 인간과 공생하는 관계니까요. 가축도 노예도 아닙니다. 궃이 따지자면 악마가 기생충이라 봐
야 할까요? 인간이 없다면 결국 자멸하게 될 존재. 반대로 인간이 진화하고 발전할 수록 악마들은 기분이
좋죠. 과학의 발전으로 교회가 힘을 잃고 신이 죽었노라 선언한 철학자가 나오며 교회를 타락했다고 선
언하는 종교지도자가 나왔으니까요.”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이 딱! 하고 손가락 울리는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나타나는 다양한 디
저트들. 마카롱이나 파운드 케이크, 스콘처럼 알고 있는 것부터 이름도 모를 다양한 빵까지.
“산해 진미를 불러오는 것, 연금술로 금은보화를 만들어 내는 것. 사람의 감정을 다루고 사랑에 빠지게
하며 성벽을 세워 전쟁에서 승리하고 별들의 운행을 읽어 운명을 속삭여주는 모든 악마들의 권능.”
허공에 둥실 떠오른 찻잔을 양 손으로 잡아 한 입 홀짝인 김샛별이 마저 말을 이어 나간다.
“악마의 삶의 근원부터 그들이 가진 고유한 권능까지, 그 모든 곳에는 인간의 감정이 들어가니까요. 뭐,
한때는 악마를 속이려다 실패한 사람들 때문에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사용한다는 헛소문도 떠돌
았지만,”
소희가 대꾸할 말없이 조용히 찻잔을 쥐자, 악마는 마저 말한다.
“천사의 활동 반경이 줄어들며, 신을 부정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반대로 재물에 대한 욕망과 쾌락에 대
한 역치는 높아져가니, 우리가 인간의 발전을 얼마나 바라고 있을지, 아시겠나요?”
※
“정말로 괜찮은 거 맞겠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소희는 여전히 찝찝하다는 얼굴이었다. 하기야 ‘마왕을 무찔러 인류를 구한다’ 와
‘악마와 거래한다’는 어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악마에 대한 기본적인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악마와의
거래를 반길 리 없지.
히어로 직종과 관련된 금수저로 태어나, 운동 선수로 살아와 이제는 정말 히어로가 된 용사가 보기에는
꺼림찍이 아니라 끔찍한 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악마의 입에서 신을 부정하는 인간이 늘어나서 기쁘다
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나 같은 놈이나 신경을 안 쓰지.
“누나, 이거 읽어봐요.”
김샛별이 택시에 타기 전 쥐어 준 대본 사이에는 몇 장의 서류들이 같이 끼워져 있었다. 마치 돌아서면 소
희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하긴 나이로 따져도 천 년은 먹은 악마인데 사회 초년생
심리 상태를 못 읽으면 우습겠지.
“이게 뭐... 하, 이건 뭐.”
서류는 간단하게 추려진 보고서였다. 평범한 보고서라고 볼 수는 없었다. 김샛별, 아니 루시퍼 휘하의 회
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이끌어 내는지에 대한 기획서였으니까. 소희의 마음을 조금이나
마 건드릴 생각인가.
“이걸 좋다고 봐야 하나? 아니 악마답다고 봐도 좋긴 한데...”
간단하게 추렸다고 해도 대 여섯 장은 되는 서류. 소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그 내용을 읽는다. 호기
심이 생겨 그녀가 읽지 않는 낱장을 하나 손에 쥐고 슬쩍 읽어보았다.
‘햐, 이 창의적인 악마 새끼들.’
좋은 감정이던 나쁜 감정이던, 인간의 감정이 격렬히 흔들릴 때 악마는 인간의 감정을 취할 수 있다. 애시
당초 악마가 나쁜 감정만 가져간다면 사랑을 이루어 주는 악마, 보물을 찾아주는 악마, 성벽을 세워 적을
막아주고 축성술 지식을 전파하는 악마 이런 애들이 없었겠지.
그렇기에 대악마 루시퍼는 기존의 악마들과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들의 감정을 흔들기 시작했다.
‘불행해 질 사람을 골라서 고용해?’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점성술 등으로 인간의 운명을 읽는 악마를 면접관으로 채용, 커다란 불행이 닥
쳐올 인간을 고용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미래를 읽지 않아도 되니 감정의 소모율은 절약되고, 자연스럽
게 커다란 불행을 겪을 될 인간과 계약했으니 얻는 것은 많다.
회사에서 보너스를 받고 아내와 여행을 떠났다 사고를 당한 남성, 명절 선물을 받고 시골에 올라가니 아
버지가 중병에 걸린 사람 등. 회사 복지에 어마어마하게 투자해서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악마
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감정이니까.
“아니 이건... 나쁜 일이라 봐야 하는 게 맞나?”
남편이 암에 걸릴 예정인 여성이 커다란 실적을 올리도록 유도한다. 그녀가 다니는 회사도, 거래처도 둘
다 김샛별의 소유. 일에서 승승장구해 초고속 승진을 한 여성이 신혼생활에 행복해할쯤 남편이 암에 걸
린다. 행복이 절망으로 바뀌면 회사는 다시 그 남편이 완치할 수 있도록 무한대에 가까운 지원을 해 준다.
“아니, 병주고 약 줘서... 병은 안 준건가?”
그 외에도 김샛별은 다양한 방법들로 인간의 감정을 흔들고 있었다. 막장 드라마로 사람들의 심리를 건
드리는 것은 기본. 연봉을 5배, 10배 책정하고 인간을 유혹해 주 90시간 근무같이 육체를 혹사 시키도록
유도해서 삶의 질을 떨어트리거나 큰 돈을 노력 없이 얻게 만들어 불행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등.
“이건 비난하기도 그런데... 우리한테도 이럴까?”
“아니지, 이번에는 우리가 주는 입장이니까. 어느 정도 유혹은 해 오겠지만.”
선악을 따지기 어려운 방식으로 인간을 꼬드기고 있었다.
막말로 연봉을 3배 늘리는 대신 업무 시간이 늘어난 사람이, 업무에 치여 가정 불화가 생겼다고 해서 연
봉을 늘려준 사장이 나쁜 사람일까? 남편이 암에 걸릴 예정이니 아내를 승진시키는 게 나쁜 일일까? 소희
는 이 것에 대한 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니 우리 동 앞에 다양한 택배차들이 모여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유혹이 시작된 거지. 들어가자 누나.”
아니나 다를까 집 앞에 쌓여 있는 다양한 상자들. 주먹만 한 상자부터 내 허리까지 오는 상자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계단 쪽에 쌓여 있었다. 들고 들어가기 귀찮을 정도로 많은 양이라 현관문을 열어 둔 상태로 내
가 그림자를 이용해 집 안에 구겨 넣기 시작했다.
거실을 가득 채운 택배 박스의 모습은 거의 홈쇼핑 중독자의 거실을 떠올리게 할 정도, 숫자만 따져도 20
개는 넘어갈 상자를 하나씩 살펴본다. 작은 상자는 수백만원이 넘는 최신형 스마트 기어.
“우와... 너무 노골적이긴 한데, 이건 착즙기인가? 식기 세척기도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전자 제품들이 박스에 다소곳히 포장되어 있었고, 강화된 청력에는 아직 도착하지 못
한 물건들을 나르는 택배 로봇의 엔진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택배 로봇이 아니었네.
“아니, 이거 가격이 장난 아닐 텐데...”
심지어 업소용 A.I.가 설치된 주방 보조용 로봇까지 제 발로 걸어서 우리 집 주방으로 향하더니. 마법으로
정화하느라 뒤죽박죽 섞인 그릇을 크기 순서대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마법이 있으니 필요 없는 애들이긴 한데 집안일에 신경 끄고 놀 수 있겠네.”
AR과 VR이 있고, 자기부상 자동차가 돌아다니며 과학으로 초능력을 밝혀내는 시대라 해도 A.I.는 비싸
다. 게임 속 세상이 아니라 바깥 세상에서도 집안일을 능동적으로 하는 로봇은 도시 중앙에 사는 상류 계
층들이나 가지고 있는 녀석이지. 주방 담당과 거실 담당이 따로 있는지 슬그머니 안방으로 기어들어가는
로봇이 보인다.
열어 둔 현관 문을 닫기도 전에 멋대로 들어와서 우리 집 소파를 최고급 가죽 소파로 바꿔 치기 하고, 벽에
붙은 TV를 떼어내더니 홀로그램형 최신 TV로 변경하는 로봇들을 보며 소희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때
아닌 소란에 이웃집이 슬그머니 문을 열고 구경할 지경.
“지금 여기 있는 가구들만 해도 우리 연봉 10년치는 가뿐하게 넘었네...”
[작품후기]
악마에 대해 생각해보면 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금을 만들어낼 줄 알면 그냥 돈으로 사람을 쓰는게 제일 좋지 않을까? 예를 들어 신을 모욕하도록 꼬시
는거랑, 10억을 쥐어주고 '신이 없다는 것에 대해 증명하는 논문을 써오게 하는거랑 뭐가 효과적일까요.
백만원도 되지 않는 돈 때문에 살인강도가 생기는 마당에 1억 10억씩 주면서 사람을 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