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89)

새로운 이벤트

사실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할 일이기도 했다.

인터넷이 발전하다 못해 가상현실 기기까지 조금씩 나오는 이 세상에서 악마들이 손 쉽게 활동하는 방법

은 당연히 인터넷 세상이니까. 나만 해도 SNS에 글을 쓰면서 전 세계의 무고한 겜순이들을 착취하고 있

지 않은가.

악마가 힘을 얻는 방식 대부분은 Give&Take 방식의 계약. 인간이 원하는 것을 주는 대신 대가를 지불하

게 한다. 물질적인 것을 받아갈 수도 있고, 영혼을 저당 잡아 명령 하나를 듣게 하는 방식도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거래를 하는 것이니 악마들이 인터넷 거래를 한다고 해서 이상한 건 없다.

파피루스에 혈서를 쓰던, 인터넷에서 공인인증서를 가져오던 악마와 인간 사이에 거래만 성립하면 되는

거니까.

“하늘아, 정말 할 거야?”

불안감과 체념이 반쯤 뒤섞인 소희가 또 다시 물어온다.

“이야기라도 들어 보자는 거지. 누나를 딱 집어서 말했다며? 그 정도로 원하면 대화는 나눠보는게 사회

인의 예의 아니겠어?”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는 소희지만 어쩔 수 없다. 김샛별이 찍은 드라마를 후원한 회

사 목록에 금성 건설이 있는 걸 보니 의심은 확신이 되어버렸으니까. 이쯤 되면 천사랑 악마랑 몰래 대립

하는 게 아니라 서로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 아닐까 싶을 정도.

솔직히 가명 정도야 사용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보다 더 자신이 루시퍼라고 주장하긴 힘들 텐데. 사실

그런 의심을 한 뒤, 인터넷에 이것 저것 검색해보니 다른 녀석들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중국요리 중 혐오 음식 먹방 전문 채널 만신전(萬神殿)의 V-Tuber 악식(惡食)이라던가,

SNS에 음란물을 모아 올리다 정지를 반복적으로 당하는 LUST라는 계정 같은 녀석들. 김샛별보다 대놓

고 자신의 이름을 쓰는 녀석들을 보면 아무리 찾으려는 의지가 없었다지만 모르고 있던 내가 창피할 지

경.

물론 지네 튀김이나 거미 꼬치, 전갈 구이등을 먹는 인터넷 채널이나, 음란물의 70%가량이 부메랑 팬티

를 입은 남자의 사타구니 사진인 SNS 계정 같은 걸 내가 찾아볼 리 없다는 핑계가 있긴 하지만 이름부터

숨길 마음이 없다는 티가 풀풀 나긴 한다.

‘어... 그런데 소희랑 악마가 만나도 되나?’

잘 모르지만 ‘빛의 날개’를 대놓고 언급했다고 하니 김샛별은 소희가 천사의 끄나풀인지 아닌지 알아보

려 할 것이다. 천사를 견제하는 중이라 그런지, 아니면 포섭하려 할 지 모르지만 빛의 날개에 관심을 가진

것은 확실하다.

문제가 있다면 김샛별이 악마라는 것.

용사의 피를 마셔 신성력이 섞인 변종 흡혈귀야 아슬아슬하게 선 안에 있다고 해도, 대악마는 그냥 선 저

너머에 있는 거 아닌가? 딱히 악마 세력이랑 척 질 마음은 없는데 소희랑 김샛별이랑 대본 주고받는 미팅

때 신성력이 반응한다면... 아니구나, 악마 세력이 문제가 아니네.

발작을 일으킨 성검이 김샛별을 ‘잿더미가 되어라 얍!’ 해버린다면?

내가 보기에는 용사가 악마 군주를 처단했다! 정의는 승리한다! 라고 외치면서 소희 옆에서 달달하게 레

벨업을 할 기회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잘나가는 드라마 작가를 산 채로 불태워 죽인

미치광이 A급 빌런을 목격하게 되는 게 아닌가.

‘그래도 명색이 신의 자리를 노렸던 대악마인데 설마...’

불안한 생각이 뇌를 잠시 스쳐 지나가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철부지 이하린의 말을 따르는게 맞다.

우연이 겹치기는 했어도 소희의 행보는 정석적인 히어로의 성장과 가까우니까. 빌런들과 엮인 히어로가

자신의 능력을 미디어에 노출하고, 그 것을 계기로 영화나 드라마 등에 출연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

신의 능력을 자연스럽게 뽐냄으로써 자기 PR을 하고, 유명세를 바탕으로 지명 의뢰를 받는다.

예를 들어 트럭에 치일 뻔한 아이를 지켜낸 육체 강화 능력자가, 드라마에서 보디가드 조연으로 나와 인

기를 끈 다음 그대로 비능력자 아이돌의 보디가드가 되는 식이다. 배역이란 게 폭이 넓다 보니 다양한 방

식으로 연줄이 생긴다. 불을 절묘하게 다루는 화염 능력자 중화 요리사 같은 배역도 있고.

소희 또한 마찬가지. 인신매매 조직을 소탕할 때 보여준 빛의 날개를 통한 고속 비행 능력, 레이저를 이용

한 저격으로 인질 구출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이번 드라마에 출연해 능력을 뽐내면 다양한 의뢰가

들어올 것이다. 초능력의 응용에 대해서는 나보다 이 쪽 세상 사람들이 잘 아니까 알아서 의뢰를 하겠지.

대악마라면 괜찮겠지?

“앋, 아뜨, 아뜨것!”

“뭐, 뭐야 이거?!”

같은 소리를 한 과거의 내가 밉다.

“설명은 나중에 하고 힘을 제어해 주시겠습니까, 소희양!”

“제어라뇨?”

“누나, 그냥 나갓!”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만나는 일 자체는 주저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김샛별이 소희를 만나보고 싶다고 명함까지 건네 온 상황

이니, 문자로 연락을 해서 3구역 방송국 근처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인기 드라마 작가 답게 고급

스러운 한옥처럼 꾸며진 한식당에서 저녁 약속을 잡고,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가니“초, 초대면부터 다짜고짜 방벽을 짓이겨버릴 줄 몰랐는데...”

안에서 기다리던 회색 머리의 남자가 노릇하게 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산 채로 불에 타오르는 그런 극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머리카락 끝자락이 탄 냄새를 내며 말려들

어가고, 방석과 식탁에 불똥이 튀며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이 불 붙은 휴지처럼 오그라들었을 뿐. 바닥을 뒹

굴다 소희가 방문 밖으로 나가자 숨을 가다듬은 그가 묻는다.

“일단 천사의 끄나풀은 아닌 것 같고... 정체가 뭡니까?”

“무,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아무 일, 없어, 돌아가.]

“네... 그러시군요...”

화들짝 놀란 안내 담당 종업원이 소화기를 들고 달려왔지만 김샛별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돌아 나

간다. 그리고 그런 와중,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도 못하고 멀뚱히 복도에 서 있는 소희.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는 벌어져서 닫히지 않는 입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음... 루시퍼씨, 맞으시죠?”

“그래, 그 이름 말고 그냥 샛별씨라고 불러.”

“아니, 그, 악마...라면서? 악마잖아?”

당황했는지 같은 말을 반복하는 소희에게 설명하는 것은 귀찮다. 사실 그래서 그냥 데려온 거고. 당사자

가 떡 하니 있는데 내가 설명할 필요 있나? 적대한다면 소희가 죽인다, 적대하지 않는다면 설명은 니들이

해라. 나는 옆에 붙어 있다 경험치나 얻어가는 입장.

“적대할 생각은 없으니, 앉으실래요? 드라마의 일은 꽤나 진심이니까요.”

“어, 악마의 말을 들어도 되는 건가?”

“누나, 난 흡혈귀야.”

자신이 용사고, 언젠가 지구를 멸망시킬 마왕이 등장하는데 우리 동네 드라마 작가는 대악마 루시퍼고,

눈이 마주쳤더니 사람이 불똥을 튀기며 노릇하게 구워지다 종업원이 말 한마디에 최면에 걸려서 돌아가

고... 어처구니가 없겠지. 하지만 내가 설명하긴 귀찮은 걸.

혼란스러워서 주먹을 쥐락 펴락 하는 소희의 모습에 팔짱을 휘감아 그대로 방석으로 이끈다. 이러다가

창고에 이어서 식당까지 날려버리면 귀찮아지니까.

“후... 천사보다 강렬한 빛, 하지만 우리의 아버지가 내린 빛은 아니군요. 당신은 누구... 아니, 당신은 뭐

죠?”

“어, 용사입니다.”

“용사?”

아니 씨발, 루시퍼가 용사를 모를 수... 있구나. 천사와 악마보다 용사와 마왕이 더 상위 모드니까. 두 남

녀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한다. 그래, 두 번 설명하는 것 보단 한 번에 설명하는 게 낫지. 귀찮아서 설명을

떠 넘기려다 되려 설명을 하게 생겼네.

가벼운 손짓에 머리카락부터 대본까지 완벽하게 원상복구되는 모습에 소희가 주먹에서 힘을 푼다. 정체

를 모르는 악마에서, 애인이 자주 쓰는 능력을 보여준 사람으로 바뀐 건가. 소희는 은근히 단순하게 생각

하는 기질이 있으니까. 악마가 보여주는 능력이 전혀 모르는 미지의 것이 아니라, 내가 자주 보여주는 마

법이라는 점이 소희의 경계를 풀었다. 김샛별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경계를 낮춰도 즉각 대응할 수 있

다는 점에서.

“이쪽은 드라마 작가 겸. 지옥의 7대 군주 중 교만의 악마인 김샛별씨.”

“저를 잘 아시네요?”

자연스럽게 찻잔을 들어올려 입을 축이는 그의 모습에, 소희가 다시 한 번 주먹을 쥔다. 너무 알기 쉬운

반응에 나도, 김샛별도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야 비어 있는 식탁 위에 갑자기 김이 모락 모락 나는

녹차가 생기는 걸 눈치채지 못하면 긴장할 수 있긴 한데 너무 대놓고 그래.

“이쪽은 A급 히어로 겸 용사 겸 내 애인인 전소희.”

“하늘아, 설명이 전혀 되질 않아...”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을 옆에서 바라보는 방식으로 식탁의 다른 면에 앉자 두 사람의 고개가 자연스레

내 쪽으로 향한다. 이제 설명하려면 천사와 악마, 용사와 마왕부터 시작해서 전부 설명해야 하는 건가.

“해야 할 말이 좀 많겠네.”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하셔도 괜찮아요.”

어느새 내 앞에도 나타난 녹차를 자연스럽게 마시며, 나는 입을 열었다.

아, 긴 설명은 취향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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