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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실마리는 아주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음... 전에 조직 통합이 되기 전에 양아치 애들이 식당에서 쓰던 방식인데, 가게 안에서 패싸움을 하는 식
으로 식탁이나 그릇을 모조리 망가트리는 겁니다. 싸우는 녀석들은 대부분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니 배째
라는 식으로 배상을 하지 않거든요. 그럴 때 가게 사장님한테 가서 싸게 해준다는 식으로 거래를 트는 겁
니다.”
“설마 히어로 협회도 잡지 못하는 테러범들이 그렇게 허술하게 움직이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씨 자매들을 찔러보러 가는 와중, 고등학생 조직원 하나의 중얼거림에서. 사실 밑
져야 본전이라고, 그래도 조직을 이끄는 애들은 나보다 똑똑하지 않을까 싶어서 온 건데. 사실 중요 NPC
로 보여 엮였나 안 엮였나 관찰하러 온 것도 있긴 하고.
“화재 난 건물 수리를 맡은 곳이 금성건설, 폐기물 처리 업체 이름은 외국 회사인 Venus...”
“1구역 쪽 계약은 백성이라는 회산 데요. 예, 예? 아뇨, 그 사람 말고 흰색 별, 예, 흰 별 해서 백성이요.”
어차피 조사라 해 봐야 인터넷 검색. 청렴을 목표로 하는 히어로 협회 답게 공인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사
업 목록이 있으니 알아내는 것은 쉽다. 더군다나 요즘 가장 핫 한 이슈다 보니 뉴스 기자들이 알아서 신문
기사를 작성하기도 하고. XX 회사, 히어로 협회와 계약 체결! 같은 느낌으로.
물론 내가 하려면 귀찮으니까 검색을 하는 일은 떠넘긴 상태.
“저기 대장, 아무리 생각해도 돈을 받는 게 무서워서 일을 하는 건 이상하다고...”
“닥쳐! 나는 그 금괴 때문에 위에 구멍이 뚫릴 지경이라고! 뉘 집 개이름도 아니고 십 억짜리 금괴만 해도
어지간해선 평생 못 만지는 돈인데! 혹시라도 보석이나 금괴 처리하다가 이상한 꼬리 달고 오는 새끼 있
으면 바로 제명 시켜 버린다고 해!”
조금 불성실하거나 멍청했으면 마음 고생도 하지 않았을 텐데. 지하 도시에 있는 조직의 존재와, 거기서
거래되는 물건의 규모, 오가는 돈의 액수를 알게 되더니 그 좋은 머리로 온갖 상상을 했는지 안색이 좋아
보이질 않는다.
보석이 내 손바닥 안에서 드르륵 구를 때 마다 창백하게 핏기가 가신 상태로, 자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
리는 백정아. 머리를 좀 쓰는 애들을 모아 참모진을 만들어 뒀는지 검색해야 할 것을 세세하게 나눠 빠르
게 정리하는 것이 학생이 보여줄 정보 처리 능력은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서류가 정리되고 어디선가 끌고 온 화이트보드에 글씨가 조금씩 적힐 때 마다 몇몇 학생들의 얼굴에 의아
함이 깃든다. 하지만 대놓고 말하는 녀석은 없었다. 얘들 입장에서는 그저 우연의 일치로 보일 테니까.
“그래서, 이게 뭔 데?”
“야, 이 뇌근년아...”
오직 심백림이라는 무투파 여학생만 화이트보드에 적힌 이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령을 만지작거리며
팔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음, 내가 저 정도 수준까지 떨어지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정작 그 여학
생이 준 힌트가 결정적이긴 했지만.
금성(金星) 건설, 주식회사 Venus, 백성(白星) 미화산업, 샛별 자원회수처리반, (주)개밥바라기, 계명
제약, 효성 약품...
화이트보드에 점점 더 많은 이름들이 적혀가며 흰 공간을 메꿔 나간다. 한국어, 라틴어, 영어 등 글로벌한
미래 세상 답게 다양한 국가의 온갖 회사들의 이름이 삐뚤 빼뚤 적힌다. 50위권 안에 드는 건실한 건축 회
사부터, 검색해도 정보가 거의 없는 소규모 외국계 폐기물 처리 회사까지.
“아니, 그... 조금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조금 이상하긴 해도.”
“그래, 검색 수고했어. 이건 용돈.”
“그만둬, 아니, 챙겨가!”
보석 주머니를 책상에 던지자 발작하듯 팔을 뻗는 백정아를 구경하며, 나는 그대로 그림자를 통해 집으
로 돌아왔다.
※
사실, 놈들은 매우 용의주도했다.
점 조직 형태로 이루어져 10~20명이 한 팀으로 행동하는 테러조직. 각 조직마다 받는 대가도 전부 다르
다. 돈, 마약, 가족의 치료, 구하기 힘든 물건, 복수 등등. 공통점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 난잡한
형태에 협회에 올라온 정보는 이들이 하나의 조직이 아닌, 빌런들의 연합이 제 멋대로 협회 소속 건물을
습격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약을 받고 싶어서 히어로 빌딩 주차장에 불을 지르다 걸린 20대 백수들과, 가족의 치료를 위해 50층 건
물 외벽으로 침투한 전직 특수부대원 겸 은퇴 히어로를 동일한 조직으로 생각할 수 없으니까. 단말기로
열람할 수 있는 정보 대다수는 그렇게 판단하였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 거지?”
“응, 그럴 가능성이 높아.”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정신에 장난질을 쳐 두면, 협회의 초능력자에게 걸린다. 아니, 그 전에 내가 피
를 마시고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보가 하나 없이 깨끗하다는 것은 초능력이나 마법이 아닌
아날로그 적인 방식으로 철두철미하다는 소리.
정신 조작의 초능력이 없어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움직인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알았는데?”
“이름. 대놓고 깔맞춤 해 둔 상태잖아.”
단 하나, 다른 게임 세상 속에서 녀석들을 겪어본 사람만 없었더라면. 과거를 읽는 초능력자도 미래를 예
지하는 예언자도 감히 알아낼 수 없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것. VR 가상현실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플
레이어의 특권이었다.
금성(Venus), 태백성(太白星)이라 불리는 가장 밝은 별로 샛별이나 개밥바라기 별로 불리는 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이름 그대로 미의 여신 비너스를 의미하지만 천사 vs 악마 모드에서는 딱 한 놈만이 이
이름을 쓴다.
“이 회사 사장 중 하나, 아니면 사장들이 전부 부하일거야.”
“그러니까, 루시퍼가 진짜로 있다고? 아니, 나도 용사고 너도 흡혈귀고 마왕도 있으니까 악마도 있나...
어, 그럼 천사도 있어?!”
추락한 샛별, 타천사 루시퍼.
다른 게임이었다면, 모드가 달랐다면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히어로
협회와 새로 계약을 맺은 회사들의 이름이 전부 금성의 다양한 이름을 쓰고 있으니까. 뭐 현실에서도 삼
성이니 럭키금성이니 하는 유서 깊은 회사들이 있지만...
“얘가 나름 지옥의 7대 군주인데 자기 이름을 멋대로 쓰게 놔둘 리 없으니까.”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여기는 게임 속이니까.
악마들의 이름은 흡혈귀의 피만큼 매우 중요하다. 애초에 인간이랑 계약을 할 때 사용하는 게 제 이름이
니까. 루시퍼는 수많은 악마 중 TOP 7 안에 드는 대악마. 남들이 멋대로 제 이름을 사용하게 둘 리 없다.
계약을 하던 협박을 하던 알아서 잡아먹었겠지.
악마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벌여온 일을 보면 견적이 나온다.
왜 협회를 습격했을까? 평화로운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악마는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먹고 산다.
히어로가 너무 활약해서 과도하게 평화로운 세상은 악마들에게 있어 가뭄과도 같다. 죽지는 않겠지만 배
가 고파서 고통스러울 정도의 상황. 가벼운 테러 정도야 적당히 비상식량 푸는 기분이겠지.
인명 피해가 전혀 없는 점도 마찬가지다. 히어로 협회에서 대놓고 천사들이 신성력 담긴 물품을 배급 중
인데 히어로 협회의 사람을 죽이면 전쟁이 일어날 테니까. 가뭄 상태라 배고프고 힘도 없는데 천사들과
전쟁까지 벌이는 멍청한 악마는 지구에 나오기 전에 지옥에서 다 죽었을 걸.
테러를 벌여 사회 분위기를 흔들어 부정적인 감정도 겸사겸사 채우고, 사람은 안 건드리니까 천사들이
할 말은 없고, 테러 조직과 계약해 소원을 이뤄주는 대신 건물에 불만 지르고 도망치라 하니까 실적도 오
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회사들이 협회랑 계약을 따서 돈을 버니까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기도 편해지
고.
“...근데, 이 사람, 악마를 우리가 어떻게 잡아.”
“그러게.”
문제가 있다면 대부분의 회사 사장들은 고작해야 1달차 신입 히어로가 의심스럽다고 들이 박아서 조사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 혼자였다면 슬쩍 침입해서 사장들 모가지를 따고 다니겠지만, 이
번 생의 목표는 소희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
아무리 고위급 변종 흡혈귀라 해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악마랑 싸우는데 흔적을 전혀 안 남길수는 없
다. 그렇다고 협회에 신고를 할 수도 없고. 아니, 신고를 한다고 해도 뭐라고 말해.
“그... 협회한테 사실 이 사람들이 악마랑 계약한 흑마법사들이고,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타락 천사 루시
퍼가 꾸민 음모라 하면 강제로 정신검진을 받으러 가지 않을까?”
“그것도 20명 중 한 명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20명을 전부 뒤에서 지배하는 흑막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
고.”
외국계 기업은 대놓고 뉴옥이나 베를린 같은 곳에 본사가 있어 물건만 보내오는 거래 상대라 사장을 보려
면 해외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고, 국내 기업들을 습격 하자니 대부분 1구역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1구역,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중심지. 민간인 거주 지역은 거의 없고 국가 기관
인 관공서와 히어로 협회 건물만 있는 동네. 막말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 중 절반이 초능력자고, 나
머지 절반이 협회 사원이라는 소리가 있는 구역.
‘아니 씨발, 그러면 결국 정보를 알아도 기다릴 수밖에 없네?’
아직 건드릴 수 없이 강제로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이가 갈렸다.
[작품후기]
워드 맞춤법 검사기가 [제명시켜버린다 해!]를 [절명시켜 버린다 해!]로 고치려 드네요.
고등학생 일진 조직이 사이코패스 살인귀 조직이 되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