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의식이 조금씩 돌아 왔을 때, 나는 호흡부터 조절했다. 기절한 사람의 호흡과 깨어난 사람의 호흡은 전혀
다르다고 몸 쓰는 녀석들이 그러니까. 하지만 어림도 없지, 상대는 이미 2차 각성을 한 용사였으니.
“후우... 하늘아, 깼지?”
“...응, 일어났어.”
낯선 천장이다, 같은 대사를 할 수 없었다. 그야 우리 집 내 방 침대였으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한숨
섞인 소희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결심했다.
“나한테 할 말-“
“많은데, 들어줄래?”
일단, 사실을 좀 불어야겠다.
“그래서, 내가 용사라고? 하, 참... 이상한 소린데 믿을 수밖에 없네.”
물론 게임 데이터를 팔다 이쪽 세상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
너는 용사다. 곧 마왕이 악마들을 이끌고 나타날 거다. 네 하얀 날개는 마왕을 죽이는 특효약이다. 근데
너무 빠르게 강해져서 나도 다쳤다.
2차 각성을 한 용사는 이제 인간의 틀을 벗어나서 OP급 NPC의 최고봉에 선다. 거짓말, 사기, 악의가 서
린 행동, 살기 등 용사에게 부정적인 모든 행동은 알아서 카운터를 먹게 되니까. 물리적으로 얻어 터지던,
저주 되돌리기의 방식이건 일단 카운터를 맞는 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여기서 대충 얼버무린다?
소희가 마왕이랑 싸우느라 성검을 꺼냈을 때 잿더미(흡혈귀였던)으로 진화하게 될 테니까.
“다른 세상에서 지하 도시라는 곳에 떨어져서 적응하느라 숨어 살았고, 내가 신분증을 줘서? 아니 안 믿
는 건 아니고 너무 당황스러운 이야기라서. 그러면 막 드래곤이나 그런 게 있는 세상에서 온 거야?”
“갈 곳이 없기도 했고, 용사인 건 몰랐지만 일단 어떤 상황인지 혼란스러울 때 도와줬으니까...”
그러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다른 세상에서 온 것도 사실이고, 소희가 용사로 각성할 것이라고 상상
도 못한 것도 사실. 혼란스러울 때 도와준 소희가 마음에 든 것도 맞다. 오직 진실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
게 열심히 말을 골랐다.
다행스럽게도 소희는 다른 게임 세상에 대한 썰에 더욱 집중하느라 정신이 팔렸고, 딱히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일 또한 없었다. 더군다나 소희가 왜 위험한 일에 뛰어드냐
고 잔소리를 하려 했지만...
“어, 그게 전부였다고?”
“그렇다니까? 애들이 초짜 조직인지 대 능력자용 장비도 아니고 식칼로 나를 위협하길래 따라간 거야.
누나도 거기 제압할 때 봤잖아? 얌전히 따라온 남자들도 호신용 테이저 건 하나는 들고 있는데 경비랍시
고 서 있는 애들이 플라스틱 삼단봉 들고 누나 앞에 서 있던걸.”
“아무리 그래도 남자애가, 위험하게.”
“위험할 리 없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보호 하는 거 아니야? 나 기절한 건 오히려 누나 때문인데?”
“아니 그건, 나도 몰랐지...”
하기야, 그녀 입장에서는 자기가 각성을 해도 초능력자라 생각하지 세상을 지킬 용사라는 상상을 누가
할까? 더군다나 지하 도시에서 탈출한 사연 많은 가출청소년이, 사실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진짜 흡혈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하지.
하지만 뭐 어쩌랴, 나를 호흡 곤란이 올 정도로 지져버린 것은 그녀가 맞는데.
“그리고 스물 먹은 B급 초능력자가 저녁에 2시간 정도 늦게 들어왔다고 초능력으로 깽판 치면 사람들이
욕 해요, 안 해요.”
“아니, 평소에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 없는데 안 오니까 걱정이 되서...”
“평범한 사람이면 B급 초능력자가 약속 시간보다 늦으면 급한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지,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이 능력을 뿜어 대면서 건물 천장을 부숴버리지는 않죠?”
“아니 그게...”
“뭐가 아닌데요?”
“미안...”
2차 각성의 여파로 감정이 크게 흔들렸다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히어로 겸 지구를 구할 용사로서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해야 하는 그녀가 감정에 휘둘려서 도시에서 깽판을 치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은 아니
다.
그리고 과잉 대응도 맞고. B급의 초능력자는 어지간해서 소총까진 견딘다. 진짜 미친놈이 대 초능력자
제압 병기를 들고 와서 쏴 재끼거나 유탄 발사기를 갈기거나, 뭐 초당 천 단위의 총알을 쏟아 붙는 거대 개
틀링 건이라도 가져오는 게 아니면 사실상 대한민국에서는 무적이라는 소리다.
갓 스무 살이 된 남자애가 밤 늦게 돌아다니는 것은 걱정될 일은 맞지만, 치안 좋기로 유명한 중심부에서
고작 2시간 늦었다고 눈 뒤집혀서 A급 초능력 줄기줄기 흩뿌리며 다닐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 적어도 협
회의 경고장이 날아오지 않는 걸 봐선 지하 도시와 엮인 친구들이 알아서 처리를 해 준 게 아닐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벌금 고지서랑 경고장 날아오긴 했는데...”
아니었네, 씨발.
※
익숙한 사무실에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소희가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성질 같아서는 뒤집어 엎어버
리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잔소리에 비해 그녀가 가져온 이익이 커다랗기 때문에 꾹 참을 수밖에 없었
다.
“소희야, 정신이 있니 없니? 아무리 어린 애인이 좋다지만 임마, 정도는 지켜야 할 거 아니야.”
“죄송함다...”
“그래도, 임마 나랑 희라 누님이랑 발바닥에 땀 나게 뛰어다녀서 커버가 된 거지, 원래대로라면 얄짤 없
이 커트였어. 안 그래도 지금 테러 때문에 보여주기 식 기강 다지기다 뭐다 말이 많았는데.”
“감사함다...”
지하 도시를 은폐하기 위한 수작도 없었고 김한나의 배려도 없었다. 왜냐하면 소희가 뒤집어 엎은 조직
의 본거지는 지하가 아니라 지상에 있었으니까.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건지 마약 팔던 놈들 인근에 있었
네. 당연하지만 구역 외각 폐공장지대의 물류 창고에서 솟아오른 빛의 기둥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
“어, 나 아니었으면 너 이거 빠꾸 먹었다고. 알아?”
“감사함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히어로 실무 쪽에 서류를 제출한 상태라는 것. 도시 순찰 업무에 지원한 A급 히어
로가 눈깔 뒤집힌 상태로 물류 창고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히어로에 미쳐 있는 대중들과 테러 사건
덕분에 카메라를 번득이는 기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있나?
“그래도 임마, 인신매매 조직 하나 잡아서 정상 침착 된 거야. 다음에는 좀 말이라도 하고 가라.”
“알겠슴다...”
다행인 것은 그녀가 10년간 다져 놓은 인맥이 꽤 대단하다는 것과, 할머니의 인맥이 포함된다는 것과, 그
녀가 습격한 조직이 정말 신생 인신매매 조직이라 불법 자금과 마약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일까.
공적은 부풀려졌고, 기자들은 피해자 인터뷰를 받아갔고, 나와 함께 있던 가짜 피해자들은 온갖 방법으
로 돈을 챙겨서 행복하게 사라졌다. 김한나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오
죽하면 이 남자들을 찾아서 내 구울 부하들로 만들까 고민이 될 정도로.
일단 그들은 조직의 비상금을 털어먹은 다음, 겁에 질린 피해자 마냥 폐허가 된 창고에서 버티고 있었다
고 한다. 히어로 협회에서 피해 보상금을 챙긴 다음, 눈에 불을 킨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하는 대가를 받는
다. 그 다음 진실을 아는 협회의 소희 인맥들에게 소희가 과잉 대응으로 인신매매 범죄자들에게 히어로
조약도 읊지 않고 팔다리에 구멍부터 뚫은 폭력 사건의 입막음 비용도 챙긴다.
“그래도 벌금으로 끝나긴 했네요.”
“그래, 뭐... 돈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그 과정에서 협회에서 새어 나간 돈은 대부분 소희의 벌금으로 충당하게 되었지만 우리가 돈이 부족한 커
플이던가. 초능력자 학교의 후계자 비슷한 것인 소희부터 지하 도시에서 천만원 단위의 의뢰를 슴뿡슴뿡
해결하던 내가?
“와 씨, 무슨 벌금이 3천만원이나 해.”
“그건 벌금이 아니라 수리비잖아요. 그냥 문으로 들어오면 되지 왜 멋 부리느라 천장을 부숴서.”
“멋 부린 거 아니야!”
“어, 큰소리?”
“죄송함다...”
물론 액수가 조금 강하긴 했다. 소희가 화를 못 참고 물류 창고 천장만 지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폐 공
장 안에 있는 낡았지만 멀쩡한 기계들을 전부 지져버렸으니까. 흡혈귀의 피부를 바싹 익혀버리는 빛은
사람에게는 축복이지만, 예민한 최첨단 기계들의 회로는 전부 태워버릴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오늘 저녁을 확 비건 식단으로 사 올까 보다.”
“아, 진짜 진짜 미안해. 이제 앞으로 감정이랑 능력 조절 잘 할 테니까, 응? 그 마왕도 잡아야 한다며? 어
떻게 풀 쪼가리 먹으면서 힘을 내냐.”
육식을 좋아하는 어린 아이 입맛 답게 반찬을 가지고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사르르 풀린다.
그래도 뭐, 나를 걱정한답시고 뛰어온 여자한테 모질게 대하기는 좀 그렇지. 나 말고 자기 선배들한테 수
시로 불려 가서 잔소리를 듣기도 했고.
“야, 전소희 어딨냐.”
“윽... 나 잠깐 다녀올게.”
체육부 인맥이 사라지니 고등학교 인맥이 찾아 온 상황. 소희 하나를 커버 치려고 몇 명의 공무원들이 발
로 뛴 건지 모르겠지만 벌써 4명이나 되는 선배들이 와서 소희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역시 용사의
씨앗이라 그런지 각성 전 부터 아군을 잔뜩 만들어놨네.
[작품후기]
역전물을 찾다 못해 TS물이랑 레바 방송까지 보게 생겼네
와 이상성욕!
글이 잘 안 써질때 머리 텅 비우고 그냥 야설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도 모이면 연재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