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건물의 천장 위에서, 소희가 빛의 날개를 웅장하게 펼친 상태로 허공에 떠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빠직빠직 전류가 흐르는 새하얀 검을 오른 손에 꼬나 쥔 상태로, 2m를 넘는 날
개를 활짝 펼친 그 아름다운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A급에 도달하고 용사 버프까지 받은 소희의 미모는 아름답기 그지 없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고.
집에서 편하게 있다 급히 뛰쳐 나왔는지 헐렁한 반바지에 목 늘어난 티셔츠 차림이지만 패션의 얼굴은 완
성이 아니던가.
뇌로 가는 산소가 부족해지니 생각이 꼬이고 말도 꼬이고 인생도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누나, 나 죽어-'
진짜로, 죽는다.
턱턱 막혀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소희한테 분명 함정 수사를 해 보겠다고 박쥐를 보냈는데, 받지 못했다. 메세지를 전달하는 그림자 박쥐
를 중간에 가로채거나 방해 할 능력자가 우리 집 근처에 있다? 그럴 리 있나.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는 손
가락만한 박쥐를 눈치 채고 죽일 능력자면 벌써 내가 밤에 돌아다니다 싸움이 났지.
"잠깐만, 뭔가 오해가-"
"닥쳐."
그럼 뭐, 소희가 모르고 죽였거나.
반짝, 하고 날개 끝자락에서 튀어 나온 섬광이 양 어깨에 구멍을 뚫는다.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불
쾌한 고기 굽는 냄새. 근처에 있다는 것 만으로 흡혈귀 하나를 말려 죽이는 어마어마한 후광.
'미친, 각성을 또 했구나.'
용사라는 것은 불합리하기 그지 없다. 뭐, 집에서 택배 박스 테이프를 과도로 뜯다가 검에 대한 능력을 깨
우치거나, 화장실 전등을 키다가 빛에 대한 각성을 했을지도 모른다. 특별 NPC라는 존재는 그런 녀석들
이니까.
문제는 그 타이밍에, 내가 보낸 박쥐가 불타 죽었다는 것이다.
일전 고등학교가 테러를 당하고 첫 각성을 한 소희에게 껴안겨서 잠들었을 때, 나는 소희의 왼손에 닿아
서 불타 죽을까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 있었다. 그때의 나는 살았지만, 오늘 내가 보낸 그림자 박쥐
는 죽었다. 아군이 되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갈 거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너희,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무 짓도 안 했, 끄아아악! 내, 내 팔!”
아직은 이성이 남아 있는지 삼단봉을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조직원들의 팔 다리를 레이저 빔으로 구멍
을 송송 뚫는 모습에 말을 걸려고 했지만, 날개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와 주변을 꽉 막아버린 신성력 때문
에 접근은 커녕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첫 각성으로 다양한 기술들을 깨우쳤고, 이제 두 번째 각성으로 사악한 것들을 상대하기 위한 신성력을
깨달은 것 같다. 마왕 하면 악마쪽이고 신성력은 당연하게도 악마의 카운터. 분노한 용사가 내뿜어내는
신성력이라면 어지간한 중급 악마는 사르르 녹아 내릴 것이다.
그리고 흡혈귀는 게임 분류상 악마종이다.
‘상급 진화 못했으면 잿가루 엔딩 찍을 뻔-‘
※
창백한 피부의 소년이 입을 뻐끔거리다 흐윽, 하고 단말마의 숨결과 함께 쓰러진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떠 있는 새하얀 날개가 마치 방전을 일으키는 전선처럼 백색 스파크를 사방 팔방에 흩뿌리기 시작한다.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새하얀 빛과, 천사의 것 처럼 보이는 순백의 날개, 아름답고 고풍스러워 무기 보
다는 예술품에 가까워 보이는 새하얀 장검을 쥔 여성. 하지만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짐승의 울부짖
음에 가까웠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허공에 떠 있는 여자를 잘 아는지 누나, 라고 부르다가 갑자기 기절한 소년의 주위로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지하 도시에서 먹어온 눈칫밥이 있는데 이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모를 리 없는 것이다.
‘일단 지하 도시 사람은 아니지?’
‘저 정도 능력자가 지하 도시에 있었으면 조직이 개편되었겠지.’
초능력을 이용한 범죄자들과, 화학 폐기물로 만든 불량 마약이 모여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는 지하 도
시 출신의 남자들. 연기가 일상이고 거짓말이 숨 쉬듯 나오는 남창들이 고작해야 몸에 구멍 뚫리는 것을
직관한다고 흐트러질 리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상태로 보이니 구태여 대화를 시도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슬그머니 모여 들어
동그랗게 무리를 지어 감싸 안는다. 기절한 소년을 가장 가운데에 놓고, 울먹이던 가장 어린 학생이 소년
을 품에 껴안는다. 웅크려 주저 않은 소년들을 지키는 모양새로 굳건히 서 있는 남자들이 눈빛을 교환한
다.
‘이 쪽으로 오면, 쏴?’
‘실탄 발사하면 이야기를 지어내기 힘든데.’
‘아까 간부 품에서 테이저 건 슬쩍 훔쳤는데 이걸 쏘자.’
당연하지만 쏘겠다는 것은 허공에 떠 있는 초능력자가 아닌 어리숙한 조폭의 똘마니들. 하지만 예상 밖
의 상황에 당황했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레이저 빔으로 어깨나 무릎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잔혹한 손속에
겁먹었는지 남자들에게 달려오는 녀석들은 없었다.
아무리 첨단 의학이 잘려나간 팔 다리를 붙여 준다고 해도, 레이저 빔에 맞아 몸에 구멍이 나고 고기 굽는
냄새를 피워 올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테니까.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은 눈 앞에서 바닥을 뒹굴며 게거품을
물다 쇼크로 기절한 동료들에 의해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새.
“진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저, 저희는 똘마니라 그냥 창고 문 밖에 서 있기만 했습니다!”
“예, 맞습니다! 그, 갑자기 창고 안에 있을 사람들 감시하라고 해서 창고 밖에 서 있었습니다!”
“저희도! 저희도 그냥 창고로 오라고 해서 오는 길이었습니다!”
기절한 소년의 엉덩이를 만져서 그럴까, 간부는 이미 양 팔 양 다리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기절
한 상태. 간부 하나에 똘마니들만 잔뜩이라니. 대충 납치해 온 남자들을 강간해서 사기 진작 겸, 손을 씻
지 못하게 하려는 행위였나.
그럼 저 여자는?
‘어림잡아도 A지?’
‘S는 뜬소문 아니었어?’
‘일단 피해자 어필부터 하죠.’
백색 날개가 사라지고 그녀가 천천히 창고 바닥에 내려 앉는다. 한 명이 겁에 질려 무너진 벽 너머로 뛰쳐
나가자 마치 도망치는 벌레 무리먀낭 뿔뿔히 흩어져 전부 사라진다. 창고에 남은 것은 다리에 구멍이 나
서 도망 치지도 못하는 녀석들 뿐.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조폭도 안 죽였는데 납치된 남자들을 죽이겠어?’
‘고작해야 구멍 한 두개 뚫고 마는데. 수표 다발 하나만 잘 챙기면 치료비 빼도 이익이다.’
팔에 힘을 잔뜩 줘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연기하며 테이저 건을 겨눈다. 얌전히 소년을 넘겨주고 지하 도
시로 돌아가면 되겠지만 그래서는 손해다. 조직 금고를 뒤지고 물건을 챙기기에는 애매한 상황.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제압한 모습과 고작해야 엉덩이 조금 만졌다고 화를 내는 모습에 남자들은 안심하고 연기를
마저 이어 가기로 정했다.
“후우, 나쁜 사람 아닙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죠?”
테이저건을 들고 있는 남성의 뒤로, 납치 피해자로 보이는 남자들이 전부 모인다. 그들이 품 안에 소년을
껴안고 보호하는 모습을 보이자 양 손을 들어 올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선다. 냉혹하게 사람 팔 다리를 꿰뚫
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
‘남자한테 익숙하지는 않은 것 같지?’
‘음, 전형적인 체육인 같은데.’
‘엘리트 히어로 코스려나? 좀 탐나긴 한데...’
‘미쳤어요? 그 흡혈귀의 애인이라면 야밤에 사라지려고. 근데 아는 사이는 맞나?’
수려한 외모에 강력한 초능력, 남자에게는 무른 모습까지 보이자 몇몇 남자들이 입맛을 다셨지만 겁먹은
척 소년의 품에 얼굴을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게 있다면“체육인 맞고, 히어로도 맞습니다. 흡혈귀가 거기서 기절해 있는 제 애인 말하는 거면 네, 사귀는 사이 맞
아요. 약속 시간이 다 되었는데 돌아오지를 않아서 찾으러 나왔습니다. 상태를 좀 살펴 보고 싶은데요.”
“애인이라면 사진 한 장 정도는 있겠죠?”
“예 뭐, 제 단말기에도 있고 제 애인 단말기 배경 화면도 같은 화면입니다.”
단말기의 암호를 풀고 던진다. 휙 날아오는 단말기의 배경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와, 그녀의 어깨에
기대 있는 소년이 보인다. 지하 도시에서 청부 업자로 이름을 날리는 소년과, 어떻게 봐도 A급 히어로인
여성이라니 대체 무슨 조합이람. 그런 쓸모 없는 불평을 한 번 해본 남자가 슬그머니 길을 비키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천천히 비킨다.
자신의 품 안에 안기자 끙끙 앓는 소년의 모습에, 여성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그 모습에 남자들이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벌리지만, 소년을 품 안에 소중히 껴안은 여성은 아
랑곳하지 않고 건물 밖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그 와중에 목이 다치지 않게 뒷머리를 소중히 받쳐주는 걸
본 남자들은 기쁘게 웃었다.
"천장만 날아갔으니 금고는 멀쩡하겠죠?"
"이 난리가 났는데 지원군이 안 오는 걸 봐선 남은 병력도 없는 것 같지? 빨리 빈집부터 털고 튀자."
[작품후기]
요즘 글 쓰기가 힘드네요
노블레스에 역전물이 부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