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89)

새로운 이벤트

그것은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지, 지베 보내주세요, 흐으윽...”

“왜 이러세요? 저희 소속된 곳 있어요...”

어두컴컴한 지하 창고, 삼단봉으로 무장한 험상궂은 여인들이 입구를 지키고, 그 안에는 여러 남자들이

감금되어 울고 있었다. 방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은 남자, 울면서 보내 달라고 애

원하는 남자, 조직에 속해 있다며 협상을 요구하는 남자.

눈물이 가득한 애원하는 목소리에 험상궂은 여성들은 전부 낄낄거리며 성희롱적 발언을 일삼으며 건들

거리고 있지만‘이야, 이걸 소지품 검사를 안 한다고?’

창고에 있는 감금당한 남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전부 죽여버릴 수 있는 상황.

내가 무력으로 전부 제압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 병신들은 놀랍게도 휴대폰과 지갑을 빼앗은 것으로

만족하고는 창고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놔 두었다. 허리춤이나 손목, 신발 밑창에서 화약 냄새가

풀풀 풍기는 걸 봐선 다들 총 한 자루는 들고 있네.

납치범은 회칼에 몽둥이를 들고 있는데, 피해자는 권총으로 무장한 상황. 다들 훌쩍거리지만 울고 있는

사람은 하나 없고, 겁먹어서 애원하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는 사람도 없었다. 이 정도 되면 대충 감이 오는

데.

‘이 새끼들, 첫 개시구나.’

지하 도시에 처음 온 녀석들인지, 아니면 어중이 떠중이들이 도시 소식만 듣고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는

건지 몰라도 미숙하다는 것은 잘 알수 있었다. 일단 문을 지켜야 할 보초가 슬쩍 내부에 고개를 들이밀고

남자 구경을 하는 것 부터 이상하다고. 더군다나 상대는 지하 도시에서 구를 대로 구른 남창들.

구석에서 쪼그려 울고 있는 어린 남학생에게 조금 성숙해 보이는 남성 두 명이 다가가 등을 토닥이며 껴

안아준다. 납치범들은 보기 좋다며 낄낄거리지만, 품에 껴안고 속닥이는 소리를 들어보면 그런 말을 못

할 텐데.

쭈그려 앉아 흐느끼던 남학생이 울음 잔뜩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형님들은 어디서 오셨어요?’

포옹하고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는 남자들이 답한다.

‘총포상 연합에서 파티 끝나고 오는 길. 너는?’

속닥속닥. 하다 못해 신체 강화가 된 능력자가 조직에 없는 건지, 아니면 초능력자를 보초로 사용하는 게

아깝다고 생각하는지 남자들의 소근거림은 여성들에게 들리질 않는다. 하지만 시선이 모이고 귀를 쫑긋

거리는 남자들을 보니...

‘총을 든 초능력자가 몽둥이를 든 민간인에게 납치된 상황이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아 씨, 오늘 페이 강하게 부른 곳 가는 길이었는데 재수 옴 붙었네.’

‘그래도 신생 조직 같은데 금고 하나 잘 털면 이득이지 않을까?’

‘우리 쪽 누나야들 부르면 좀 많이 나눠 먹어야 하는데, 우리끼리 콜?’

슥슥, 남자들의 눈짓과 귀엣말이 바쁘게 오간다. 겁에 질린 것 마냥 오들오들 떨며 창고 구석에 모여들어

서로를 다독이며 ‘잘 될 거야, 걱정 마, 해칠 거면 진작 당했어’ 같은 말을 다 들리게 떠들지만 훌쩍거리는

소음 아래로 바쁘게 오가는 속삭임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허리춤에 권총 몇 자루 있는 것 같은데.’

‘아냐, 손잡이 모양새를 봐선 수제 권총이거나 테이저 건인데.’

그래서, 끼어들었다. 너무 재밌어 보이니까.

‘화약 냄새 안 나는 걸 봐선 테이저 건 맞아요.’

‘초능력자? 후각쪽이 예민해?’

눈물을 한 방울 장착하고, 코를 훌쩍거린 다음 얼굴을 감싸 쥐는 척하며 코를 톡톡 두드리고 날카로운 송

곳니를 살짝 보여준다. 내 얼굴은 몰라도 흡혈 능력자가 있다는 것은 들었는지 달래주는 역할의 남성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아준다.

‘경매장 유명 인사구나. 이 쪽은 전부 비능력자니까 네가 3인분 정도로 하는 게 어때.’

‘뭐 공짜 용돈인데 그 정도면 납득되네요.’

‘제 권총 호신용이라 두 발 짜리에요. 정산 받을 때 조금 깎아도 좋으니까 저는 좀 사릴 게요.’

‘제가 세 명 까지는 눈을 가릴 수 있어요. 2인분 주세요.’

겁에 질린 대여섯명의 남자들이 오들오들 떠는 걸 기분 좋게 구경하는 여성들이지만, 그녀들의 망상과는

전혀 다른 대화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은 알 까. 원래 이쯤 되면 분위기 잡는 놈이 뭘 속닥거려! 하면서 떨

어트려 놔야 하는데.

“이야, 남자끼리 그러니까 보기 좋네~”

오히려 건들거리는 여자가 들어왔다. 대충 뒤로 묶은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에, 필터를 잘근 잘근 씹어

꼬부라진 담배. 음험해 보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여자가 들어오자, 창고 안에 있던 녀석들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팍 박는다.

“오셨습니까, 누님!”

전체적으로 미숙하고, 실전 경험은 전혀 없으며, 자신들이 우물 안에서 해 왔던 방식이 큰 물에서도 먹힐

거라고 믿는 어중이 떠중이. 백정아의 고등학생 조직과 비교해도 우위를 점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한 조

직.

창고에 와서 권위를 내세워 남자들을 희롱하는 자칭 간부의 모습을 보고 내가 내린 결론이다.

“하하, 햇빛 못 보고 살아서 그런지 피부가 고와.”

“후우... 애들은 건드리지 말죠.”

가장 어린 남학생의 뺨을 건드리자,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이 자발적으로 여성의 품에 안겨 학생을 구석

으로 밀어낸다. 아까부터 두 명의 연장자가 나머지를 달래는 걸 본 똘마니들은 부성애니 뭐니 하며 유부

남 취향이 꼴린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눈이 전부 옹이 구멍인지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발 빠르게 허리춤

의 권총을 옮기고 숨겨주는 걸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

“흐흐, 역시 농익은 몸도 좋긴 좋지. 그래, 나이가 있으니 분위기는 좀 읽는 것 같네.”

음흉한 손이 남성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린다. 5분 전 까지만 해도 저기에는 권총이 한 자루 매달려 있었지

만 이미 동료에게 넘긴 지 오래. 겁먹은 펭귄 무리처럼 밀착한 상태로, 시선을 흐트러트리는 안개까지 엷

게 두르니 무능력자들이 간파할 수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초능력자인 여성은...

“응, 어때? 한 겹 벗어 봐. 내가 기분이 좋아져서 어린 애 몇 명 풀어줄지 어떻게 알아.”

자기 품에 안겨온 남자에 인중을 헤벌쭉 늘어트리고 남자의 얇은 옷자락을 팔락거리며 속살을 훔쳐보느

라 인질들이 모여서 뭘 하는지 관심도 없었다. 그 때문에 남자들의 속닥거림은 한층 더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무능력자? 신체 강화가 된 것 같진 않은데.’

‘잘 해봐야 C급 언저리 아니에요?’

‘구두코나 소매 끝자락 보면 은근 헤져 있는 게 싸움은 많이 해본 것 같은데.’

‘화약 냄새는 나요?’

조직의 간부랍시고 거들먹 거리는 녀석조차 업신여길 수준이면, 점점 더 안전하게 한 탕 해먹을 수 있다

는 마음에 속삭임들이 빨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먹거리는 소리나 코 훌쩍이는 소리는 잊지 않으니

지하 도시의 남창이 아니라 어디서 연극 극단원을 붙잡아 왔나 싶을 정도.

‘초능력자 맞고, 화약 냄새는 안 나고, 물 비린내가 나요.’

내 다리에 매달려서 무릎 부분을 꼭 잡은 남학생의 머리를 토닥여주며 속삭여주자, 그 정도는 괜찮다는

듯 배시시 웃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발적으로 나선 남자는 여자의 온 몸을 더듬기 시작한다.

“아하하, 적극적이네! 실력은 별로지만.”

‘저 병신, 좋댄다.’

나긋나긋한 손길로 어깨부터 가슴, 허리춤과 엉덩이를 쓰다듬는 손길. 하지만 어떻게 봐도 성적인 의도

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남창으로 먹고 사느라 연합회 파티에도 불려간 사람이 미숙한 손놀림일 리 있나?

성감을 고무시키는 애무가 아니라 혹시라도 숨겨둔 무기가 있나 툭툭 건드리는 중인데.

여자의 품에 안겨 헤벌레한 얼굴 밑에서 슬그머니 입모양으로 ‘없. 어’ 라고 말하자, 타이밍에 맞춰 눈물

을 닦던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인다. 순조롭게 흘러가는 상황, 그저 타이밍만 잡아서 전부 제압하거나 사살

하기만 하면 되는데.

‘...뭐지, 씨발. 대체 뭐가 문제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호흡이 가팔라지고 등골이 덜덜 떨린다. 식은땀으로 손이 젖어 들어가자 나를 붙잡

고 있던 남자들이 불안하다는 듯 더욱 몰려든다. 귓가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라던가, ‘초능력에 뭔가 감

지 되었나요?’ 같은 속삭임이 들려온다.

“얘, 괜찮니?”

“이야, 생판 남끼리 지극 정성이네. 이런 남자가 많아야 사회가 아름다워지는 거 아니냐?”

귓가가 윙윙거리고 시선이 흐릿하게 느껴질 무렵, 익숙하다 못해 당연한 기운이 저 하늘 높은 곳에서부

터 느껴진다. 경박한 여성의 목소리도, 누군가 엉덩이를 만지작 거리는 손길도 그저 귓가에 웅웅거리는

삐익- 소리에 묻힌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 내 입술에 시선이 집중된 남자들에게 속삭였다.

‘피해자 연기, 계속해.’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눈동자에는 의문이 깃들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숨 쉬기

가 힘들어질 무렵“아, 이 씨발 새끼야. 내 남자한테서 그 더러운 손 치워.”

건물의 천장이 사라졌다.

[작품후기]

미시라는 단어의 반댓말을 찾다가 미시의 어원까지 파고들었는데 원하는 건 못찾았네요. 미시가 Miss의

변형어로, 미혼 여성처럼 보이는 젊은 기혼 여성을 뜻한다는 킹무위키까진 읽었는데... 이거 남자 버전이

있나?

독자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20년에는 남녀역전 소설이 좀 더 많이 나왔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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