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인간의 정신은 기묘하기 짝이 없다.
극한의 고통을 주는 고문을 버티는 사람도 있고 피부 겉 가죽만 베여도 오도방정을 떨며 망가지는 사람이
있다. 죽음 앞에서 미쳐버리는 사람이 있고 타인을 위해 죽음을 극복하는 사람이 있다. 가장 연약하면서
도 가장 단단한 것.
하지만, 테러리스트 잡졸들의 정신은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나보다.
“발정 난 년, 이 와중에 붙어 먹으려다 실패하니까 발악하는 거 봐라...”
“미친, 미친년아! 잘 구슬려서 탈출할 생각을 해야지 왜 옆에서 초를 치고 지랄이야! 쟤 팔뚝 안 보여? 심
기를 맞춰도 모자랄 판에 왜 옆에서 지랄을 해서 이 사단을 만드냐고!”
“둘 다 닥쳐, 이 병신 새끼들아. 나, 나 이거 팔뚝 뜯기면 과다 출혈로 죽겠네...”
어거지로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거는 여자, 창고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나 때문에 화가 난 여자, 자기
팔뚝에서 흐르는 피가 언제 바닥으로 질질 새서 죽을 지 모르니 그저 삶을 포기한 여자. 창고 안을 몰래 비
추는 CCTV에서 인간의 악감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씨발 저 팔, 어쩔 건데! 괴물이던 뭐던 발정나서 들이미는데 저 팔은 고쳐주고 뭘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냥 닥쳐, 더러운 새끼야... 이 와중에 붙어먹을 생각만 하네...”
구속된 걸 풀어주고 올 걸 그랬나? 입으로만 싸우는 건 생각보다 재미가 없어 CCTV의 화면을 끄고 개인
SNS에 들어갔다. 얼굴에 반해서 온 여자들도 많고 게임 정보 때문에 온 사람들도 많다. 희귀 몬스터를 잡
는 게임인지라 일단 잡은 사람들이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거니까.
‘사람이 또 올랐네.’
뭔 놈의 모바일 게임이 공격적으로 전 세계를 노리는지 번역기가 없으면 알아볼 수 없는 댓글들도 잔뜩
달려 있었다. 셀카가 몇 장 있는 게시글 에는 하트가 잔뜩 있었고, 희귀 몬스터를 잡아 둔 게시글에는 느
낌표가 잔뜩 있는 걸 봐선 욕 아니면 감탄이겠지 뭐.
내 게시글을 보는 사람과의 소통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저 사람들이 내 게시글에 댓
글을 달았다는 사실이니까. 관상용으로 잡아 둔 희귀 몬스터를 추첨으로 뿌린다는 게시글을 마법을 더해
작성하고 소희에게 저녁 식사에 관한 문자를 보낸다.
‘몇 분 지났다고 댓글이 백 단위래.’
역시나 알아볼 수 없는 댓글들이 잔뜩 올라와 가슴 한 구석에 마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든다. 뭐, 무작위
프로그램으로 뽑아서 번역기라도 돌리면 되겠지. 내가 게임 회사인 것도 아니고 안 쓰는 몬스터 뿌린다
는데 외국어 번역 능력으로 태클 거는 사람이 있겠어.
“그래서, SNS는 잘 되어가?”
“엄청 잘 되어가지.”
게임에는 그닥 흥미가 없는 소희가 지나가며 물어본다. 운동으로 청춘을 보낸 그녀에게 게임이란 출퇴근
길의 심심한 30분을 달래 주는 수단일 뿐이니까. 그녀에게 있어서는 내가 잡은 0.001% 확률의 유니크
몬스터 보다 몬스터 도감 사진에 좋아요를 누른 십 만 단위의 사람이 더 놀라울 것이다.
“대놓고 가슴을 까버린 사람보단 못하지만, 게임 포스터로 여기까지 올라온 게 어디야. 그나저나 거의 백
만 가까이 되어 가네. 이야... 이 정도면 게임으로 먹고 살, 고 있구나?”
소희가 내 계정을 살펴보다 말을 흐린다. 지하 도시에서 받은 돈을 게임 현거래라고 속인 다음 내가 쓸 돈
말고는 소희에게 통장 째로 넘겨줬었기 때문이다. 소희가 내게 신분증을 발급하고 먹여 살리며 방 하나
를 내줬던 것과 비교해봐도 차고 넘치는 금액.
“또또, 지난 번처럼 선배들 긁다 머리 산발이 되어서 돌아오지 말고.”
“아냐, 그 때는 내가 좀... 아니다. 안 그럴 게.”
10살 어린 미소년을 주워서 길렀더니 애인이 되고, 그 애인이 쥐어 준 통장에 억 단위의 금액이 들어 있었
다는 상황. 당연히 술자리 안주가 되어 자랑거리가 새어 나가고, 내 사진과 내가 준 통장을 본 그녀의 선
배들이 소희의 머리카락을 지푸라기 꼬듯이 묶어 놔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다들 히어로 직장에 다니다 보니 소희가 A급에 가까운 육체 강화 능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등 짝을
두드리거나 술을 먹이는 대신 머리카락을 일일이 꼬아버리는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
은 그녀가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안방으로 향했다. 일이 없는 주말이니 데이트 겸 외식을 하러 나가는 길이
었으니까.
‘이건 또 뭐여, 시벌.’
무의미하게 인터넷 서핑을 하다 다시 CCTV를 돌려보았다. 의미는 딱히 없었고 늘 습관적으로 보던 사이
트를 전부 체크한 뒤, 시간이 남아서 봤던 페이지를 새로 고침 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다. CCTV에 보이
는 텅 빈 창고와 널브러진 의자.
‘얘들이 왜 여기 있어?’
그리고 입구에 서 있는 두 명의 굴라.
※
심심하다는 이유로 세 명을 가지고 놀다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전혀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뭐
만 하면 튀어나오는 그놈의 점 조직 때문에 그녀들의 혈액에는 유익한 정보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
니까.
기초적인 육체 강화는 유용하다. 일반적인 회사에 취직하더라도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생기니까. 하지만 초능력자가 되며 육체가 강화되면 반드시 배척 받는 곳이 존재한다. 당연스럽게도, 운
동 선수들이다.
초능력자가 등장하고 인기가 퇴색되어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축구와 야구를 본
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100m를 3초만에 주파하여 잔디밭이 폐하가 되는 드리블을 원하는 게 아
니고,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총알보다 빠르게 날아온 야구공을 후려치다 못해 풍압을 베어버리는 방
망이를 원하는 게 아니다.
일반인들이 하는 스포츠의 수요는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어중간하게 육체가 강화되어 히어로
도 운동 선수도 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녀들은 PMC로 흘러 들어가거나, 폭력 조직에 들어간다.
세 명의 기억은 이게 전부였다. 선수를 노리다 뒤늦게 각성. 어쩔 수 없이 협회에서 제명되고 선수직을 박
탈당한 다음, 돈을 준다는 꼬드김에 경호원 비슷하게 일 하다 흘러 흘러 불법적인 일에도 끌려가는 생활.
팀장이 어디선가 정보를 물어 오면, 팀원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일을 해결하고 보상을 받는다. 아마 중요
한 정보는 팀장만이 알고 있겠지. 하지만 내가 데려온 것은 당연하게도 팀장이 아닌 쫄따구 셋.
‘습격자를 지휘하는 팀장의 목소리가 그렇게 울려 퍼졌는데, 어떻게 빼돌려...’
대놓고 지휘를 하던 여성이 있었는데 빼돌리면 당연히 난리가 난다. 어둠 속 습격자의 머릿수가 정확히
사십 명이었는데 쫄따구 세 명이 비었다는 사실은 경찰도 모르고, 팀장이 ‘습격자는 사십 명인데 세 명이
없다! 왜 없냐아아악!’ 하고 떠벌릴 머저리도 아닐 것 아닌가. 제 부하가 탈출하면 한 거지 그걸 말하는 머
저리가 있겠어.
결과적으로 쓸모가 없는 세 명이라, 죽게 놔두려고 했는데...
“왜 처먹었냐?”
“”죄송합니다!!””
거의 1 년 만에 보는 얼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최초로 만든 부하 1, 2였다. 굴라가 되어 나이가 의미 없어
지긴 했지만 가끔 만나긴 했던 얼굴이다. 뭘 했는지, 어디에 갔었는지 제 경험담을 재잘재잘 늘어 놓기는
했었지. 나름 피를 주입해 만든 권속들이다 보니 유대감이 생성되어 있었으니까.
“아니, 왜 처먹었냐니까.”
유대감이고 나발이고 당황스러운 상황이긴 했다. 창고 안에 처박아 두고 부정적인 감정을 흘려내다 죽으
면 시체와 영혼으로 나눠서 흑마법 연습이라도 해 볼까 싶었는데.
“니들 뭐, 굶고 사니?”
“아뇨...”
두 명의 굴라가 어디서 냄새를 맡고 와서는 홀랑 먹어버렸다.
“내가 작년에 만났을 때 뭐 먹지 말라고 시켰던가? 몸매 가꾸라고 다이어트 명령을 내렸나? 술에 취해서
성희롱 하다가 굶으라고 시켰던가?”
“아닙니다...”
“근데 그걸 왜 처먹어?”
질책이라고 생각하는지 두 명의 고개가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건 분노 보다는 호기심인데,
아직 미숙한 두 명은 자기들의 주인인 내 심리를 읽는 것에 미숙했다. 하기야 지하 도시에서 회계랑 쌈박
질만 하고 다녔으니까.
각선미가 매끈하던 김세민은 범생이었던 과거를 잊지 못하고 조직의 회계를 담당해서 머리 굴리는 일을
했고, 태생이 날라리던 이소정은 굴라가 되며 금발 염색이 풀리질 않는다고 좋아하며 쌈박질만 죙일 하
고 다녔다.
‘지난번에 마법석인가 뭔가 돌 멕이고 더 이상 준게 없는데?’
그렇게 자유롭게 살라고 풀어둔 두 명이, 알아서 진화를 한 상태로 돌아와 대가리를 꾸벅 꾸벅 박고 있으
니 내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굴라는 흡혈귀의 피로 만들어진 존재. 당연한 이
야기지만 진화를 하려면 내 피를 먹어야 한다.
근데 준 적이 없는데.
‘어케 진화했냐, 씨발년들이.’
[작품후기]
주인공 입장에서, 필요 없는 포켓몬을 '야생에 놓아주기' 눌렀는데
1년 뒤에 봤더니 진화 해서 포켓몬 박스 속에 들어있는 상황
하데스 얼리엑세스 맞아요. 그래서 그런지 패치로 뭐가 자꾸 추가됨 ㅎㅎ
주인공의 외모는 우리 기준 병약 미소년(소녀에 가까움) 입니다. 대충 '미녀 그려놓고 또 남자라고 우긴
다' 짤 생각하시면 됩니다. 평소에는 중성에 가까운 아바타를 쓰지만, 이 세계는 자기가 아바타를 생성하
고 접속한 게 아니라 엿먹고 떨어진거라 남녀 역전 세계 기준 미소년의 얼굴임.
남녀 역전 세계를 기준으로 잡으면, 우락부락 빌리 같은 형님들이 헐리우드 섹시 미녀. 주인공 같은 미소
년은 아이돌 같은 귀염상이라 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