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아무것도 안 하고 밍기적거리고 싶다.
잠이 불필요한 흡혈귀의 육체일지라도 애인의 커다란 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상태로 나신이 얽혀 껴안긴
상태라면 어리광 부리듯 그 순간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설령 출근 시간 30분 전의 아슬아슬한
시간이라도.
"...하늘아, 너 깨어 있지?"
"샤워는 마법으로 해결하고 먹는 건 가는 길에 샌드위치 사 가면 되는 거야."
꾸욱 껴안으니 탄력이 넘치는 살덩어리가 얼굴 위에서 이리 저리 짓눌려서 흔들린다. 콧속 깊이 파고드
는 부드러운 바디 로션 섞인 살 내음. 이불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포근한 감촉.
"자자, 일어나자."
물론 체육부원으로 매일 6시에 꼬박 꼬박 일어나는 부지런한 소희에게 아침의 게으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조금 아쉽기는 하네. 주말에도 번뜩번뜩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을 하니까. 포근함이 떠나가고
서늘한 바람이 훅 맨 살을 쓸고 지나간다.
"환기는 그냥 마법으로 하면 안 될까?"
"그래도 찬 공기를 마셔야 잠에서 깨지."
드르륵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자 서늘한 바람이 방 안을 가득 채운 눅눅하고 음탕한 공기를 말끔히 씻
어낸다. 내가 마법 구매하는데 든 돈이 얼마인데, 이걸 못 살려 먹네.
결국 게임 속 마법인지라 수학 공식 마냥 소모 값을 넣으면 결과값이 도출되는 방식으로 구현되었기 때문
에, 사람들이 데이터를 파는 것 마냥 온갖 마법을 만들어 팔았다. 그 중 제일 유용하고 많이 팔린 것이 실
생활 마법.
중세 시대에 떨어져도 샤워를 할 수 있고, 물이 없는 행성에서도 뜨끈한 물에 반신욕을 하게 해 준다. 낡
아 허물어진 초가집부터 우주 전함의 함장실까지 청소할 필요 없이 공식 하나로 청소가 뚝딱 되는 유용한
실생활 마법 모음이 묶어서 단돈 10만원!
"으, 추워... 어째 몸이 튼튼해져도 찬 바람은 적응이 잘 안되네."
뭐, 내가 쓰는 마법 대부분이 데이터를 팔아서 번 돈으로 주문 제작한 마법이니 놀고먹는 이런 생활도 그
닥 돈 값을 보는 생활은 아니긴 하지. 욕실 문에 마법진을 새기고 두드려 욕조 안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
고 그대로 들어갔다. 욕조에서 노곤하게 몸을 녹이고 있으니 옷을 훌렁 벗어 재끼고 욕실로 난입하는 소
희.
출렁이는 육감적인 몸매를 감상하고 있으니 욕조로 슬그머니 파고 들어온다. 온수와는 확연히 다른 뜨듯
한 체온. 슬금 슬금 손장난은 치지만 출근 시간이 가까워 그 이상 장난을 칠 수 없었다. 숨돌리기를 빙자
한 무단 외출은 허락하지만, 지각은 용서하지 않는 것이 소희의 엄격함이니까.
“으, 출근 시간이 고등학교 등교 시간보단 늦는데 왜 이렇게 일어나기가 힘든 건지.”
“너는 고등학교 때 부터 원래 아침마다 일어나기 싫어했잖아.”
“흡혈귀한테 너무 엄격한 사회에요 누나...”
말캉한 가슴을 뒷목으로 만끽하고 있으니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소희에게 몸을 기
대고 눈을 감으니 천천히 손으로 물을 부어 머리카락을 적시는 것이 느껴진다. 따듯한 물과 체온, 부드러
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간질이며 향긋한 거품을 낸다.
“아 진짜, 머리카락이 되게 가늘다.”
“앗, 그런 쪽 취향...?”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는 것을 멈추고 이내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는 그녀. 동거를 하며 이제 커플
보다는 부부에 가까운 모습일지라도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섹드립에 면역이 생기지는 않은 것 같다.
뭐, 자기 여자 선배들이랑 술자리에서 말하는 걸 보면 섹드립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는 섹드립이 문제
인 것 같지만. 항복이라고 양 손을 번쩍 드니 낄낄거리며 다시 머리를 곱게 감아주는 손길을 느끼고 있으
니 그녀가 그대로 욕조 밖으로 나갔다.
“진짜 시간 없어. 나는 마법으로 부탁해.”
“...아니, 그럴 거라면 나도 늦게 깨우지.”
쪽 소리가 나게 내 뺨에 입을 맞춘 그녀가 씨익, 잇몸이 보이는 쾌남의 웃음을 웃어 보인다. 그녀의 몸에
정화 마법을 걸어 있는지도 모르겠을 오물일 치워내고 조금이나마 묻은 거품과 물기를 사라지게 만들고,
내 몸과 욕조에 남은 물도 전부 사라지게 만든다.
와, 수도비가 0원!
사실상 B급 히어로 둘이 동거를 하고 있으니 이런 저런 혜택을 받으면 관리비는 원래 0원에 가깝지만, 우
리 동을 관리하는 사람이 서류를 보면 좀 이상한 집이라고 생각하긴 하겠다. 전기료는 평범하게 나오는
데 냉, 난방비와 수도비가 0원이라니.
“빨리 옷 입어, 정말 늦겠다.”
“여차하면 날아서 가면 되지.”
이제는 비밀도 아니게 된 날개를 펼쳐 팔락거렸다. 뱀파이어의 얄팍한 날개였어야 할 것은 이제 박쥐 날
개보다는 흉기에 가까울 정도로 두껍게 변한 상태. 얇은 날개 지닌 것들, 박쥐나 와이번이나 드래곤 같은
애들은 맨날 얇은 날개 피막이 찢겨서 추락하는 운명인데 나는 그것으로 부터 벗어난 것이다.
“도시에서 허락받지 않은 비행은 벌금이 좀 강해. 그리고 지금 현직 히어로 서류 제출했는데 사고치면 안
되지. 너 그러다 걸려서 벌점이라도 쌓이면 진짜 5년동안 서류 업무만 보게 될 수 있어. 다른 일처리는 널
널해도 현직 히어로 발탁에는 엄청 깐깐하단 말이야.”
“그 정도야?”
“그래, 지난 주에 술 마신 이유도 선배 하나가 업무 끝나고 부서진 장비 파편 회수 안 했다가 쓰레기 무단
투기로 연봉 삭감 당해서 마시러 간 거야.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를 따르지 않으면 연봉의 반이 날아간다
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있는 줄 아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30분 전. 신소재로 만들어졌다는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
고 현관 밖으로 나서는 순간 띠링 하고 단말기에 알람이 울린다. 슬쩍 내려다보니 희귀 몬스터의 등장 알
람이지만 성능이 그닥 좋은 녀석은 아니었다.
“안 돼.”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잡을지 말지 고민하던 찰나 그대로 소희에게 팔목을 잡혀 팔짱을 끼게 되었다. 이전에도 출근 중에 몬스
터를 잡겠다고 지각을 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게임 알람만 울렸다 하면 일단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손을 잡힌 정도라면 슬쩍 뿌리치고 뛰쳐나갈 수 있지만, 용사에게 팔 전체를 껴안긴 상태에서 도망칠 수
있을 정도로 호신술에 숙련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안개화를 쓸 수 있지만 그래봐야 용사의 손아귀는
금세 내 목덜미를 잡아채니까.
“서류 신청 넣었고, 벌점만 안 쌓이면 아마 3월이 되기 전에는 현장으로 나갈 수 있을 거야. 나는 이미 해
둔 게 있어서 호봉 인정을 받아서 히어로와 사이드 킥으로 같이 가는 거고. 이해했어?”
“현장 투입되는 업무는 서류 업무에서 벗어나겠지?”
출근길은 늘 한결 같이 평화로웠다. 특이한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자기부상 버스가 돌아다니고, 능력 사
용을 허락받은 초능력자 몇몇이 가끔 머리 위를 날아다닌다. 높게 솟은 빌딩의 간판에서 홀로그램 광고
와 뉴스 속보가
[어제 오후 8시경 일어난 이 방화 사건은-]
속보가...
“어... 저거 우리 건물 아닌가?”
속보가?
아직까지도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익숙한 건물. 뼈대만 남아 흉물스러워진 건물 앞에서 우리에게 서
류 덩어리를 던져주는 상급자 공무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은 상태로 나와 소희를, 정확하게는 우리와 같
은 층을 사용하는 직원들 전부를 맞이한다.
“그... 방화로 예상되는 사건이 있어서 정리된 서류가 전부 불탔네요. 이번 주말까지 다시-“
“씨발년아!”
삐익, 하고 들릴 리 없는 감점의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자, 하늘아 화 풀고. 그래도 한 번 했던 일이니까... 그치?”
“아 진짜 존나 싫어. 잡히면 죽여버릴까. 피를 반쯤 뽑아버린 상태로 최면을 걸어서 대로변 사거리 한가
운데서 알몸으로 춤추게 만들 거야 씨발.”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담당관은 소희가 나를 껴안고 달래는 사이, 이번 주말까지 꼭 끝내 셔야 한다는 말
을 던지고 후다닥 도망쳐서 사라졌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얼굴이 150% 일그러진 상태로 임시 사무
실에서 열심히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었고.
‘설마, 설마 백정아냐?’
사무실로 사용했던 건물은 히어로 협회가 구매한 건물이다. 아래쪽 사무실은 우리 같이 신입 히어로들이
잡무를 처리하는 씨잘데기 없는 서류 창고에 가깝고, 상층부는 고위 공무원 급인 담당관들이 관리하는
데이터 서버와 서류들이 있었다. 불이 건물 위쪽에서 시작되어 무게를 견디지 못한 상층부의 외벽이 무
너져 내려, 아래쪽까지 불길이 번진 것이 이번 화재의 모양새.
‘진짜 백정아가 한 짓이면... 내가 지옥 마법을 다시 배워서 인큐버스라도 부른다, 씨발년.’
“자자, 하늘아 화 풀고. 마카롱 사 왔는데 아~”
이를 아득바득 갈자 뺨을 살살 주물러주며 익숙하지 않은 애교를 부리는 소희의 모습에 화가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았지만 3일 이내로 끝내야 하는 수백 장의 서류를 보니 다시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부글부
글 끓어오르는 것이다.
[작품후기]
시험 끝
끼얏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