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남녀 정조 역전 세계라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확 체감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 문득,
아 여기가 시발 뭔가 잘못되어 있구나~ 라는 감상이 든다. 예를 들어서 길을 걷는데 건물의 거대한 광고
용 홀로그램에서 빵뎅이를 위아래로 씰룩이는 비능력자 아이돌이라던가, 와이셔츠 단추를 풀고 가슴골
을 내놓은 보디빌더 사진이 성인관에 떡하니 걸려있거나, 소희가 조금 가부장적인 면모를 보여서 인생이
편안한 것 같은 일.
“이 서류만 챙겨주면 나머진 내가 해 줄게.”
“그랭.”
침대 위에서도 그렇고 일상 생활에서도 그렇고, 소희는 연장자 겸 여성에 내 보호자를 겸한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일을 자신이 처리하기를 원한다. 남녀평등을 외치는 쿵쾅이들이 보면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는
다고 부르짖을 상황이지만, 나한테는 그저 편하기만 하니 상관없겠지.
지난번 똥멍청이가 주고 간 서류 업무만 보아도 그렇다. 1주일 안에 구청에서 몇몇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
하는데 서류 발급에 필요한 시간이 3일 조금 넘는다. 빠듯한 시간 속에서 소희는 어느 서류를 먼저 준비
해야 할 지 척척 정리해서 내 신분증을 가지고 갔다.
그동안 나는 지상이나 지하를 돌아다니며 게임이나 하고 있었고.
‘가정주부 개꿀이고.’
설거지도 세탁도 빨래도 마법 하나로 완료할 수 있으니 내가 해야 하는 집안일은 장보기와 요리가 전부.
거기에 장보기는 데이트를 겸하느라 둘이서 같이 하고, 요리는 취미다. 현실에서 무미 무취의 에너지 바
를 씹다 보면 게임 속에서 라도 맛있는 걸 잔뜩 먹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어째 신랑 수업 마냥 되었네.
시간이 남아 돈다고 해서 심심하거나 할 일이 없지는 않았다.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이 발달해서 오락실을
시작으로 혼합현실 기술이 적용된 영화관, 가상현실게임 전용 게임방이나 홀로그램이 동봉된 보드게임
등 내가 이 미래 세상을 즐길 거리는 넘쳐났으니까.
뭐라 해야 하나... 과학 기술이 발달했는데 내가 살던 현실은 절망편, 여기는 희망편이라는 기분이 들 정
도. 학업 지구에 살다 보니 학생을 대상으로 한 온갖 오락거리가 넘쳐나는 거리를 돌아다니면 하루가 짧
을 정도다. 건물 위 허공에 투영되는 홀로그램 광고판부터, 홀로그램이 통행에 방해된다는 내용의 법안
까지. 길거리를 걷고 모바일 뉴스만 읽어도 재미난 볼거리가 넘쳐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신성력이 듬뿍 함유된 먹거리는 자연스럽게 신선함을 유지하게 된다. 먹거리 골목에
있는 수십개의 음식점에서 메뉴 하나씩 간식거리로 먹어도 하루가 뚝딱. 오전에 업무를 끝내 두고, 오후
에 소희에게 부탁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와서 놀다 그대로 퇴근하고 집에서 휴식. 한 소파에 앉아 TV를 함
께 보거나, 혼합현실영화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거실에 홀로그램을 투영하던가, 게임에 흥미는 있지만 서
투른 소희를 가르쳐주며 게임을 이것 저것 하는 식으로.
그러다 밤에 슬그머니 빠져나와서 지하 도시를 돌아다닌다. 흡혈귀의 특성 때문이라고 말 하면 그녀가
대충 넘어가준다. 나야 지하 도시에서 먹고 싶은 거 먹고, 마시고 싶은 거 마시면서 신나게 놀고 있지만
소희가 보기에는 내가 흡혈귀라는 종족에 점차 익숙해 지고 있는 걸로 보이겠지.
10살 연하의 애인이 사실 인생을 여러번 겪어서 인간에서 흡혈귀로 변하는 게 익숙한데, 사실 내가 사는
세상이 게임 속이라 나는 NPC고 애인은 플레이어라서 퀘스트를 찾아 다닌다고 생각하며 의심하는 사람
이 있다면 오히려 만나보고 싶을 정도. 의심을 하려고 해도 할 건덕지가 없는 것이다.
뭐 의부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맨날 밖에서 뭐 하냐고 따지고 들겠지만, 소희는 그런 쪽에서 털털해서 지
하 도시에서 백날 천날 돌아다녀도 제 시간에만 돌아오면 뭐라고 하지 않는다. 어차피 소희랑 침대에서
뒹구는 날이 많아서 매일 나가는 것도 아니고
서류를 소희에게 넘겨줘서 빈 시간동안 지하 도시를 돌아다니며 처음 보는 거리를 걷는다. 푸줏간에 걸
린 정체 불명의 고깃덩이와 보라색 연기와 연두색 연기를 모락 모락 피워 올리는 물 담배 가게를 지나 정
화 장치 때문에 조직이 차지하지 않은 빈 공터에 발을 디딘다.
“그래서, 간만에 보네. 한 3년 만인가.”
“...그래, 역시 너였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빨간 머리의 여성. 백, 백... 백아영이었던가. 특이하게도 인간이 아닌 아인종의 피를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장이라도 이 쪽으로 달려들 것 같은 자세로 있는 그녀를 보니 3년 전
의 일이 생각난다.
적정 습도를 유지하는 지하 도시에서, 5분만에 90%가 넘는 습도를 만들 정도로 콸콸 틀어진 스프링 쿨
러. 시야가 보이지 않는 물줄기 안에서 온 몸으로 증기를 피워 올리며 난투를 벌이던 그녀의 모습과, 제압
당해서 사슬에 묶여 헐떡거리던 모습까지.
‘역시, 슬슬 시작될 때가 되긴 했지.’
고등학교 이벤트가 끝난지 1개월. 이제 곧 2월이 되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섭섭하긴 하지.
“너, 무슨 생각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그르렁거리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그녀가 낮게 뇌까린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그저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
가 이쪽으로 무언가 휙 던진다.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꽤 빠른 속도로 날아온 물건을 붙잡으니 익숙한 녀
석이었다.
금괴
“아, 음... 백씨? 아, 그러네. 이게 이렇게 되는구나?”
20살, 고작해야 똥통 고등학교 출신 일진 무리의 대장으로 조직을 체계적으로 가꾸며 고등학생들을 이끌
어 사업을 해 백 단위의 가출 청소년을 먹여 살리며 건물까지 인수해 개조해 사용하는 백정아. 23살, 아
인종의 피가 섞인 이질적인 존재로 타락한 협회의 비리를 파헤치며 단신으로 지하 도시를 침투해 정보를
훔쳐가는 백아영.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붉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몸에서 또 스팀이 올라오는 건가. 온갖 능력이 있으니 용의 심장을 가지게
되는 초능력도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장난 삼아 고등학생 일진한테 금괴를 쥐어 줬더니, 그 언니가 히어로
였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음, 심심해서 그랬어.”
“말장난이냐!”
쩡! 소리와 함께 그녀가 달려든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뜨거운 열풍 너머, 날카롭게 뻗어오는 주먹. 발을
굴러 먼지구름으로 시야를 가리고 열풍을 먼저 날려 눈을 공격한 뒤, 자세를 낮춰 턱을 공격해오는 모습.
3년전보다 확실하게 발전한 모습이었다.
물론, 3년간 가장 많이 진화한 것은 나와 소희지만.
턱으로 뻗어오는 주먹의 경로에 커다란 물방울을 소환한다. 철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확 일어
나 시야를 가린다. 후속타로 날아든 발차기가 먼지구름과 수증기를 갈라버리지만 그녀의 눈에는 내가 보
이지 않겠지.
“뭐, 뭐야! 어디냐!”
삐이이익 소리가 들릴 정도로 끓는 주전자 마냥 증기를 피워 올리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알까, 그녀가 만
들어낸 먼지 구름과 수증기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개로 변한 상태에서 슬그머니 마법을 사용한
다.
“그쪽이냐!”
후웅, 난폭하게 흙먼지가 갈라지며 그녀의 발차기가 공기를 가른다. 아스팔트 바닥을 깨부수고 가로등
허리를 끊어버리는 폭력.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발길질이라 해도 안개를 부술 수는 없었다. 허공에 휘날
리는 안개가 되어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의 마법을 사용했다.
“우리, 꽤 좋게 헤어졌던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흉포하게 달려들어?”
“닥쳐, 지하도시의 남창새끼가!”
온 몸에서 증기를 뿜어내며 그녀가 안개로 변한 내 몸을 찢기 위해 마구잡이로 공격을 해 온다. 묵직한 주
먹이, 날카로운 발차기가 파공성을 내며 공기를 찢어 발긴다. 하지만 그게 전부. 안개가 된 내 몸은 허공
을 흩날리며 갈라졌다 다시 한 곳으로 모인다.
“에이, 그렇게 뜨거운 밤을 보내고선, 너무한 거 아닌가?”
“닥, 치라고!”
얼굴이 붉게 변한 그녀를 향해 계속해서 마법을 이어 나간다. 공격이나 저주 마법은 아니다. 흡혈귀가 사
용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마법들. 예를 들어, 내가 그녀를 창고 바닥에 쇠사슬로 묶어 놓고 범했던 날의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하거나 그때의 쾌감이 조금씩 느껴지게 하는 과거를 재현하는 꿈 계열의 마법.
분노로 얼룩진 전사의 얼굴이 점차 발정난 여자의 표정으로 녹아내린다. 증기를 뿜어내는 색스러운 몸뚱
아리는 이제 전투로 인해 달아오른 것인지, 성욕으로 인해 달아오른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상태. 나는
끊임없이 그녀의 주위를 안개 상태로 맴돌며 내 페로몬을 듬뿍 만끽하게 해 주었다.
“후우... 무슨, 남자가 이딴 미약이나 쓰고, 씨발!”
파앙-! 숨을 고르는 척하며 휘둘러진 주먹이 정확히 내 인중을 가격하지만, 어차피 안개로 만든 형상이라
그대로 흩어지는 게 전부. 오히려 흩날리는 안개를 들이 마신 그녀의 호흡이 더욱 거칠어진다.
다리가 점차 풀리는지 조금씩 자세가 흐트러지는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가며 끊임없이 마법을 사용한다.
[작품후기]
흡혈귀 특 : 물리 면역
C언어를 손으로 써 오라는 것은, 코딩을 Ctrl + C, Ctrl + V 방지라고 이해라도 하지. 친구가 하고 있는 과
학 실험 수기로 작성하기(15장)은 전혀 이해가 안가네요. 자기가 진행한 실험인데 인터넷에서 베낄 게 어
디 있다고 손으로 작성해서 내라는 건지.
기말고사가 코앞인데 겨울방학 생각밖에 안남.
아 ㅋㅋ 학점 조졌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