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킥
지하 도시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없는 것들도 꽤 많다. 한반도에서 보기 힘든 총도 있고, 히어로 협회
에서 훔친 히어로 전용 도구들도 있고, 마약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중이고 정치권의 높으신 분들이랑
거래라도 하는지 무슨 미술품이랑 고문서랑 금괴 같은 금은보화도 있지만... 명예는 없지.
‘지하 도시 범죄자 새끼들이 명예가 어디 있어.’
히어로랑 싸우는 게 무서워서 숨은 범죄자들. 이익과 자존심은 챙겨도 명예는 찾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
기였다. 애당초 간부가 고등학생한테 습격당해서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폭탄을 빼앗겼다고 지하 도시에
다 공문 방식으로 의뢰를 한 바퀴 돌리지 않았나. 명예를 챙길 거라면 그냥 물건 가져오라고 시켰지 즈그
들 간부 뒷통수에 혹난 사건을 왜 떠벌리겠어.
“어, 어쩌지? 지금 당장이라도 아지트 옮겨야 하는 거 아니야?”
“야! 여기 건물들 공사 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지금 옮기면 애들 다 얼어 죽어! 1월 이 날씨에
노숙하면 진짜 수십 명 단체로 동사한다고!”
“그럼 어쩔 건데!”
“아니, 씨발 니들이 지랄해놓고 왜 나한테 그래! 니네 둘 때문에 애들 다 뒤지면 책임질 수 있어? 지금 당
장이라도 봉고차 타고 칼 든 조폭들 수십명이 쳐들어와도 이상할 게 없는데!”
물론, 가오와 겉멋이 생명인 고등학생들 머리로는, 억 단위의 돈을 던지고 다니는 거대 범죄 조직이 복수
하러 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 네 명이 왁자지껄 떠드는 동안 땡강 땡강 소리가 나도록 금괴 위에
금괴를 던진다.
“아니, 일단 애들을 흩어 놓으면 일일이 잡겠어? 금괴 팔아서 돈 좀 쥐어 주고 흩어지... 면?”
“왜? 하던 이야기 계속 해.”
덜그럭 거리는 금괴는 어느새 책상과 비슷한 높이로 쌓아 올려졌다. 음, 생각보다 많이 삥땅 쳤구나. 어느
좆밥 연금술사의 공방을 털고, 굴라를 만드느라 조직 두어 개 털고, 이번에도 마약 조직을 털어먹어서 그
런가. 역시 황금은 중세 무림 세상에서 미래 SF세계관까지 영원히 사랑받는 금속.
“아니, 무슨...”
“아무튼, 열심히 살아봐. 나는 물건 가지고 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난 번 지하 도시에 미술품을 풀었던 것과 같이 마법을 걸었다. 지금은 슬슬 돌아가
서 소희랑 놀아야지. 아무리 땡땡이 치는 것에 관대하다 해도 이렇게 오래 비우면 안되지. 시간을 보니 슬
슬 해가 지기 시작한다. 순찰 나간다고 나가선 퇴근 시간까지 꽉 채웠으니 맥주나 사 가야겠다.
안개로 몸을 바꿔 창문 밖으로 흩어진다. 방 안에서 금괴 가져가! 아니 가져가면 안되지! 이걸 어따 처분
해! 같은 고함 소리가 왕왕 들려오지만 내 알바 아니고.
‘아 씨... 생각보다 늦었는데.’
협회 주변에 슬쩍 내리 앉으니 소희로부터 문자가 왔다. ‘설마 먼저 간 건 아니지?’ 라는 말에 모바일 게임
을 하다 늦었다는 핑계를 문자로 보냈다. 맥주는 가는 길에 같이 사야겠다. 조직에 던져준 금괴는 정확히
50개. 단말기로 순금의 시세를 검색해보니 순금괴 하나에 6,700만원 선에 거래되고 있었다.
만약 고등학생 일진 조직에 31억가량의 돈을 쥐어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건 앞으로의 재미로 남아있겠지.
※
히어로는 아이돌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아이돌 문화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히어로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이 고결하고 위대해서, 같은 이유도 있긴 하지만 다른 점을 더욱 좋아한다. 잘생기고 이쁜 동
네 옆집 누나 형님이 알고 보니 도시를 지키는 영웅?! 같은 친근감을 요구하는 것이다.
매사에 도덕적이고, 길가에 쓰레기 한 번 버린 적 없고, 욕도 안 하고 금연 금주 금욕 생활을 하는 A급 슈
퍼 히어로보단, 반바지 입고 엉덩이 긁적이던 멋진 누나가 PC방에서 뛰쳐나오고, 예쁜 형님이 카페 알바
하다가 뛰쳐나와서 B급 히어로로 변신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무슨 아이돌 트렌드 마냥 사람들이 좋
아하는 히어로의 유형이 있다는 것도 좀 웃기지만.
그렇기에 히어로가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3가지. 초능력, 외모, 스토리다.
초능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아무리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D급, C급 히어로를 좋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워낙 초능력자가 많은 동네라 적어도 B급은 되어서 초인의 모습을 보여야 사
람들의 마음 속에서 히어로로 인정받는다.
그 다음은 외모. 너무 당연해서 할 말이 없다. 히어로다 보니 여자는 늠름하고 듬직해야 하며, 남자는 아
름답고 야무져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 조금 있지만 외모는 뭐... 중세 시대부터 미래까지 외모는 취향을 타
니까 패스.
그 다음은 스토리다. B급 초능력자가 되면 육체가 발달하고 교정되기 때문에 아무리 못생겨도 훈남 훈녀
정도는 된다. 이목구비의 균형이 맞춰지고 피부가 깨끗해지며 치아 교정 등 다양한 부과 효과를 받는데
추남, 추녀라고 불리기는 힘들지. 그렇기에 사람들이 열광해야 할 스토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18살 여고생이 빌런에게 습격당한 상태에서 반 친구들과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초능력이 각
성과 함께 폭주, 첫 능력 사용임에도 불구하고 폭주한 초능력을 제어해 빌런을 무찌른 멋진 외모의 여학
생이 있고, 그냥 학교 다니던 초능력자가 있다면 사람들은 누구를 좋아하겠는가?
‘그냥 학교 다니던 애가 좋은 것 같은데.’
“아, 심심하다고오오오!”
방송국에 직업 체험 학습을 갔다가 빌런에게 습격당해 생방송으로 초능력 각성을 데뷔하고 그대로 사탕
발림에 넘어가 연예계 생활까지 한 대한민국 최고 아이돌, 이하린 같은 애 말이야. 어린 나이, 위기 상황
에 각성, 폭주 상태에서 힘겹게 자신을 제어해 사람들을 구함. 히어로 빠돌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정석 적
인 스토리.
“걍 뒤졌으면 좋겠다.”
“너 점점 나를 대하는 태도가 심해지는 것 같은데?”
그런 새끼가 평일 저녁부터 심심하다고 우리 집 앞에서 농성을 하는 중이라는 사실에 나는 이 사회를 성
토하고 싶었다. 아무리 그 3개가 중요하다지만 이딴 똥멍청이를 거진 10년동안 아이돌 취급하고 사랑하
다니. 아무리 겨울 방학이라지만 교사라는 새끼가... 아, 특별 강사였지 얘.
“하아... 야, 연락이라도 하고 와라.”
“그래도 퇴근 시간 생각해서 치킨이랑 맥주는 사 왔는데.”
“주고 갈래?”
“아뇨, 누님. 그러지 마시고.”
이하린 같은 녀석을 연예인으로 받든 사회가 잘못인지, 아니면 연예인으로 받들어서 얘가 이렇게 된 건
지 고민하는 찰나 자연스럽게 치킨을 넘겨 받은 소희가 문을 열고 이하린을 집 안으로 슬그머니 들여보낸
다. 멍청함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행동은 둘째 쳐도 소희랑 이하린은 성격면에서 생각보다 잘 맞는다.
운동부 태생으로 은근히 고지식한 면모를 보이는 소희와 연예계 생활로 눈치가 빠르고 너스레를 잘 떠는
이하린. 소희가 연장자지만 먼저 예의를 지키고 이하린이 선을 넘지 않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유쾌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건데?”
치이익, 캔이 따지면서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탄산의 소리가 울려 펴진다. 두 사람이 술을 마시며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술 취한 사람들 특유의 중구난방적인 이야기. 소희가 히어로의 서류 업무에 대해
떠들면 이하린이 교사의 서류 업무에 대해 떠든다. 그러다 상관 욕을 하다가 과거에 만났던 꼰대 이야기
가 나오고, 거기서 얼떨결에 정치 이야기까지 흘러 가고.
“아니, 그래서 그 늙은이가 나한테...!”
“그래, 그건 좀 그렇네.”
물론, 이쪽 세상에 와서 뉴스를 읽어본 적이 없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히어로가 빌런을
때려잡았다는 소식을 몇 번 보기는 했는데 정치권 관련된 뉴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 뭐 현실이랑
똑같이 뭐시기 게이트에 뇌물에 국회에서 싸움나는 건 똑같았으니까.
“아, 맞다. 이거 전해주려고 왔는데.”
“빨리도 떠올린다.”
열 캔의 맥주가 세 사람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국
회의원이 꺼내든 초능력자법 개정안에 대해 침 튀기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모습에 소희도 빤히 바라본다.
“이게 뭔데?”
“그 뭐냐, 두 사람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연예계나 서류계 말고 현장직으로 뛰고 싶은 거 아니야? 그쪽 신
청 관련된 서류랑 내 추천장.”
“그런 공문서를 왜 구식 USB에 넣고 다녀?”
“이래야 안전하지.”
툭 던져진 USB를 집어 든 소희가 끙차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안방으로 향한다. 저게 뭔진 몰라도 손목의 단
말기랑 연동이 되지 않는 녀석인가? 구식이라고 불릴 만하네. 단말기에 연동이 되지 않으니 해커들이 노
릴 이유도 없는 건가?
“야이, 씨발! 신청이 1월 말 까지네! 진작 가져오던가!”
안방에서 들려온 외침에 멍하니 손목의 단말기를 눌러보았다.
1월 24일 오후 11시.
“실기 시험이랑, 서류랑, 인적성 검사랑, 아오 씨발!”
“으하하, 미안 미안. 그래도 1주일은 남았잖아.”
소희와 이하린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나는 슬그머니 세 번째 닭다리를 뜯어 먹었다.
[작품후기]
저는 문과인데 교양 수업으로 듣는 과학사에서 기말 과제로 '중세 과학자 중 한 명의 일대기를 정리해서
10장짜리 레포트 써오기'를 내줬습니다. 친구가 저를 존나게 비웃더라구요. 근데 친구가 이과라서 실험
을 했는데, 실험 보고서 15장을 수기로(손으로) 서서 제출하라고 과제를 받았습니다. 거의 1주일간 스터
디 카페에서 마주 앉아서 과제만 했습니다.
진짜 다른건 다 참아도 수기로 제출하라는 교수들은 무슨 심보지.
C언어 손프로그래밍 같은거 시키는 사람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