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89)

사이드 킥

내가 게임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은 ‘상대방의 당황’ 이다. 몰래 카메라나 깜짝 파티를 성공했을 때 온갖

감정이 순식간에 휘몰아쳐서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는 것은 질리지 않는 즐거움이니까. 왜, 고전 게임 중

에서 ‘게임은 상대방을 화나게 하려고 하는 것’ 같은 대사를 떠올리면 된다.

“시, 십억? 농담이 과하다. 아니, 네가 거래를 하러 온 사람이 맞는지 검증부터 해야-”

“금괴 1KG 시세가 얼마일까~”

덜그럭, 손바닥만 한 네모난 금 덩어리. 중앙에는 1KILO라는 글자와 함께 히어로 협회의 초능력 보증 마

크가 꾹 눌려 있는 묵직한 녀석. 아공간에 몇 개 장난삼아 챙겨 놨던 금괴를 책상 위에 던진다. 후다닥 소

리가 날 정도로 달려 든 두 여자가 양 손으로 고이 금괴를 집어 든다.

“요즘 금 시세를 잘 몰라서, 1kg에 대충 7천만원 하던가?”

금괴 하나를 휙 꺼내 던질 때 마다 눈동자가 황급히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처음의 맛깔 나던 분위기는 온

데간데없고 입에서 억억 소리를 내며 금괴를 조물딱 거리는 푼수만 둘. 비밀 호위라도 있는지 당황하는

숨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보스의 이름이 언급되자 귀신같이 입을 다물고 호흡을 가다듬지만, 눈

앞에서 자기 또래 남자애 손 끝이 허공을 까닥일 때 마다 7천만원이 쏟아지면 대체 누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자, 금괴 10개면 대충 7억 조금 넘겠지. 이 정도면 믿어 줄 수 있는 거야? 가서 순금인지 아닌지 확인해

봐도 좋아. 시간은 생각보다 많거든.”

“잠깐, 잠시 시간을 줘.”

“그래, 1층에서 음료수나 마시고 있을 게. 아, 이건 음료수 값.”

금괴 하나를 허공에서 꺼내 다시 한 번 휙 던지고 몸을 안개로 바꾼다. 엘리베이터 문 틈으로 파로 들어가

1층에서 다시 몸을 되돌린다. 아마 위에서는 금괴를 손에 쥐고 CCTV로 나를 보고 있겠지. 내 쪽으로 슬

그머니 렌즈가 향하길래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주고 작은 캔커피를 그대로 들이켠다.

당황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잘 가꿔 둔 조직이 갑자기 습격해온 미치광이 사이코패스 킬러에게 몰살당

하는 것도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그건 반응이 뻔하다. 공포, 혹은 분노 둘 밖에 없는 이지선다의 놀이. 이

렇게 유능한 녀석들을 고작 심심하다는 이유로 죽여버리면, 한 5분 얼굴 구경하고 끝 아닌가.

“이야... 기강이 잘 잡혀 있네?”

시선을 맞추려 하자 모두가 눈을 돌린다. 인간은 돈을 좋아하지만 당황스러운 거금이 던져지면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현대 재벌물을 몇 번 했을 때 다들 그런 반응을 보였다. 제 손에 갑자기 쥐어진 거금에

반응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강이 잘 잡혀 있고 조직 구성이 탄탄하다 하더라도 결국 고등학생 조직. 이번 EMP 폭탄의 건도 조직의

수입이 불완전해서 밑의 똘마니 들이 퍽치기 범죄를 시작해서 생긴 일 아니던가? 많아 봐야 천만원 남짓

한 돈을 관리하던 녀석들의 손에 10억이 쥐여진다.

복권 당첨되고 인생이 망가진 사람이 괜히 넘쳐나는 게 아니지?

우정과 충성심이 있다 해도 7억이라는 돈은 사람을 뒤바꾸기 충분하다. 그 것도 사업하던 어디 어르신들

도 아니고 고작해야 이제 20살 된 청춘들에게는 말이지. 인생 살면서 알바비 70만원 받고, 조직 생활하면

서 백만원 하면 와! 거금! 하던 애들 손에 7천만원짜리 금괴를 쥐어 준 거다. 주머니에 넣고 후다닥 튀어

버리면 잡을 수도 없지.

“올라오라고 합니다.”

“그래? 고마워. 자, 이건 선물.”

카운터의 전화를 받고 주저하며 다가온 여학생에게 금괴를 쥐여준다. 맞잡은 손에 부드럽게 힘을 줘서

바닥에 금괴를 떨어트리는 불상사를 방지하자 허어억- 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녀석. 이제 또 고민

이 되겠지. 니가 먹을래, 조직에게 바칠래? 개인이 받은 7천만원을 조직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너, 이거... 진품이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온 그 수상한 가방도 진짜라는 이야기겠군.”

“맞아, 너희가 모르는 지하 조직에서 빼돌리던 값비싸고 무시무시한 폭탄이지. 아마 내가 오지 않았더라

면 어디 조직에서 와서 이 동네 고등학생의 씨를 말려버렸을 거야. 물론 우리는 욕망에 충직해서 폭력보

다 돈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거든.”

“10억이라는 거금은...”

“거금은 너희 입장에서야 그런 거고.”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부추긴다. 등을 떠밀지만 목적지는 없다. 고꾸라져도 좋고 어디를 향해

맹렬히 달려나가도 좋다. 돌진하다 담벼락을 들이 받고 쓰러져도 상관없다. 나는 그저 그 모습을 보며 속

시원히 웃고 싶을 뿐이니까.

“알겠어? 도시의 30%를 단숨에 마비시킬 수 있는 EMP 폭탄이라고. 지난번 초능력자 학교 테러 사건에

서 사용했다면 히어로 지망생 1천명의 모가지를 날려버릴 수 있던 물건이야. 히어로 협회에서 터트리면

빌런 조직이 마음껏 히어로를 사냥할 수 있겠지. 테러에 사용한다면 히어로의 방해 없이 성공할 거고, 반

대로 빌런 조직의 심장부에서 터트린다면 피해 없이 거대 조직 하나를 소탕할 수 있는 물건이야.”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창백하게 변하는 두 명. 백정아는 다크서클이 그새 짙게 내려와선 꾸륵거리는 배

를 부여잡고 있고, 이름 모르는 근육녀는 근육 바보인 것처럼 10억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하

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네게 판매하면... 그 뒤는?”

“나야 모르지~”

조직을 이끄는 녀석 답게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우연히 얻은 물건이라면 주인에게 돌려주고 보상금을

받으면 되겠지. 하지만 녀석들이 물건을 얻은 방법은 무려 ‘퍽치기’다. 몰래 지상에 나와서 술 한 잔 마시

려던 지하 도시 간부의 뒤통수를 각목으로 내리치고 훔쳐 온 것이다.

곱게 끝날 일인가?

지하 도시의 중앙 조직 간부. 그게 어떤 위치인지 나는 감이 잘 안오지만 가벼운 자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맥 하나로 먹고 사는 김한나도 중앙 도시의 간부와 인맥 한 번 맺으려고 이 의뢰를 받아온 거니

까.

반대로 말하자면, ‘그 마당발’ 김한나도 중앙 도시의 간부와는 친목을 다지지 못하는 급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간부가 동네 고등학생한테 뒤통수를 각목으로 얻어맞고 가격을 따질 수 없는 물건을 빼앗겼다?

“으, 씨발... 너 가서 그 퍽치기 2인조 빨리 데려와.”

“그 두명으로 끝날 일은 아니지만... 알겠어.”

머리를 긁적인 근육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꼭대기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펜을 책상에 던져

버린 상태로 그녀가 내게 묻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자, 정보료.”

휙, 하고 금괴가 날아든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라 반응이 늦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바람이 차올라 깔

깔깔 소리를 내며 목 밖으로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알아서 바닥을 발발 기는 김한나와는 전혀 다른

재미.

“와, 그러네. 조언 한 번에 7천만원이라. 꽤 신뢰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래서, 그 물건의 원주인이 우리에게 보복을 할 확률은?”

“음... 한 90%가 넘지 않을까?”

“그럼 그렇지, 씨발...”

책상에 머리를 박은 그녀로부터 음울한 중얼거림이 흘러 들어온다. 일이 생각보다 커졌다느니, 돈에 눈

이 멀어서 멍청한 놈들을 받았다 같은. 조직의 덩치가 커지면서 충성심이 부족한 똘마니들이 늘어나서

생긴 일인가.

“아, 뭔데 씨발!”

“대장! 무슨 일인데요?! 아 놓으라고 아파, 씹!”

띠링,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근육녀가 두 여자의 목덜미를 쥔 상태로 올라온다. 무난하게 생겨서 얼굴

의 특색이 없는 여학생이 둘. 방금 전까지 열심히 마시다 왔는지 술 냄새와 뒤섞인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

온다.

“야, 이 씨발... 니들이 가져온 가방이 10억짜리 폭탄이랜다. 어떻게 생각하냐?”

“어... 좋은 거 아니에요?”

“십, 아이 씨발, 그래서 내가 불안하다고 했잖아!”

한 명은 분위기가 왜 심각한지 이해를 못하는 상태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다. 농담이라는

말을 원하는지 주변을 살펴보다 내 얼굴과 책상에 올려진 순금괴 덩어리를 보고 침을 튀겨가며 멍청한 옆

여자애를 욕한다.

“아니, 왜 갑자기 너도 지랄이야? 금덩어리는 또 뭐고, 몰카야?”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녀석을 훅 집어 올린 근육녀가 귓가에 속닥거린다. 사실 그 가방이 폭탄이고,

엄청 비싸서 10억을 부른 다른 조직이 있으며 너희가 건드린 사람은 10억은 껌 값으로 생각하는 거대 범

죄 조직의 간부라는 사실을.

“저렇게 멍청한 애들 데리고 고생이 심하네, 우리 백대장님.”

“노, 농담이지? 그렇게 후줄근한 양복을 입고 혼자 편의점에서 과자 안주에 소주나 마시던 아줌마가 어

떻게 그런 사람이냐고!”

편의점에서 소주라, 참 소박한 취향이긴 했다. 간부라서 숨 돌릴 겸 나왔던 건가?

[작품후기]

사실 지하 도시는 고딩들한테 관심도 없지만 놀려먹고 싶어서 겁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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