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89)

사이드 킥

한반도를 구역 단위로 나눠 계획적으로 도시를 잘 가꾸었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 결국

도시 어딘가에는 어두컴컴하고 치안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곳이 생기고, 그 곳에 점차 사람들이 모여

들게 되어 있다. 슬럼가라고 주장하기엔 치안이 좋지만 결국 불량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술, 담배를

판매하는 자판기를 뚫으려고 노력하는 동네.

'뭔가 신선하네.'

초능력자 고등학교와 히어로 공익의 기숙사 아파트와 히어로 협회 교육지부. 내가 고교 생활을 보낸 세

곳은 치안이 좋다 못해 맑다고 해야 할 수준의 공간이었기에 이런 불량스러운 분위기는 처음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담벼락에는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고 순찰을 도는 사람도 없다. 골목 골목에서 담배연기의 잔

향이 물씬 풍기고 학생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그런 동네.

설렁설렁 골목을 오가니 시선이 모여드는 게 느껴진다.

교복 치마인지 미니스커트인지 모를 정도로 줄인 교복을 입고 내게 시선을 보내는 여학생들, 그걸 아니

꼽게 바라보는 짧게 줄인 교복 바지로 엉덩이를 강조하는 남학생들. 어느 한 명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 녀

석이 없고 피 냄새가 달짝지근한 녀석들이 없었다.

요컨대 낙오자들. 초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아이돌(우상) 취급을 당하며 초능력자 학교가 사회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끌어 모을 때 그 낮은 능력조차 없어 박탈감을 지니고 인생을 포기한 멍청이들이다. 나도 최

하급 초능력만 있으면 월 수백 받으면서 개꿀 빨 수 있는데 무능력자네? 라는 박탈감으로 미래를 포기한

녀석들이니까.

술렁이는 거리는 마치 지하 도시의 클럽 주변 같았다. 훨씬 건전한 것 빼곤.

머리 어지러워지는 마약 냄새도 없고, 총에서 물씬 풍기는 탄 화약 냄새도 없고 코가 먹먹해지는 피비린

내도 없으니까. 물론 없는 것 목록에는 지능과 개념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뭐 외모도 없고 몸매도 없고

다른 많은 것들도 없겠지만.

"이야, 누구 찾으러 왔어? 우리랑 놀러 갈래?"

"그래, 이 쪽 동네는 우리들이 빠삭하다고."

생각해보면 이런 이벤트, 이쪽 세상에 넘어와서는 처음이네. 지상에서는 소희한테 바로 붙었고 지하 도

시에서는 헌팅 같이 건전하고 순수한 작업을 거는 녀석이 없었으니까. 거기는 술에 물뽕을 타거나 힘으

로 덤벼들면 덤벼들었지 이런 식으로 작업 멘트를 날리지 않는 곳이니까.

"어우, 냄새."

예민해진 후각에 훅 풍겨오는 담배 쩐내. 생각해보니 고등학교부터 히어로 사이드 킥이 되기까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구나. 지하 도시야 마약 태우는 냄새로 가득해서 코가 마비되어 있었고, 지상

에서는 흡연자를 본 적이 없네. 태생이 운동부였던 소희도 그렇고, 학생 시절부터 연예인 생활을 한 이하

린도 그렇다.

어... 나 되게 고급지고 귀족스럽게 살고 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주변인 외모 보정을 받던 엑스트라 학생

들을 보며 생활하다 술, 담배에 찌든 현실성 가득 넘치는 얼굴의 여자들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짜게 식는

다.

“야, 니들 백정아가 누군지 아냐?”

“…뭐야, 너 누구냐?”

별 것 아니라는 듯 물건을 가진 조직의 대가리 툭 이름을 내뱉는다. 고등학교 3학년짜리, 아 이제는 새해

니까 나처럼 막 성인이 되었을 녀석의 이름을 말하자 헌팅녀 두 명 뒤에서 덩치가 조금 더 큰 여자가 담배

를 입에 물고 다가온다.

‘생각보다 기강이 잘 잡혔는데?’

성욕으로 가득하던 시선들은 어느새 염탐하는 자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숙덕거리는 소리가 사라지는

걸 봐선 육체 강화 초인이 정보를 얻는 것을 막는 것으로 보인다. 고작해야 고등학생이 모인 조직이 지하

도시의 범죄자들보다 더 정교한 조직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 생각보다 멋진 조직이네. 니네 보스랑 거래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거래? 어디서 온 건지 말해.”

험상궂은 노안, 교복과 어울리지 않는 덩치. 손등에는 흉터가 자잘하게 긁혀 있고 거의 180cm은 되어 보

이는 거구의 덩치. 긴 생머리는 여자의 그것이라기 보다는 무도가의 봉두난발처럼 보인다.

“말 하면, 니가 알고? 애초에 네가 백정아 쪽 사람이란 걸 증명하는 게 먼저 아니니?”

“흠... 그 것도 그렇군. 네가 진짜 손님이라면 말이야.”

유쾌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하도시와 거래를 목표했던 폐공장의 마약상인보

다, 교육지구 외각의 비행청소년이 더 우수하다는 사실에 이 게임을 하기 전에 했던 게임이 떠올랐다. 초

반에 나오는 마왕군 사천왕 레벨이 20인데 후반에 나오는 왕국군 패잔병 레벨이 70이었지. 그것 때문에

농담 삼아서 마왕군 컨트롤이 어느 수준이길래 20레벨 졸병 데리고 70레벨 병사들이 지키는 수도를 함

락했냐고 낄낄대고 다녔는데.

‘그거 볼 때마다 악마놈들 고생 참 많다고 생각했는데.’

“좋다, 이 쪽으로 와라. 마침 근처에 있으니 안내해주지.”

“음... 좀 더 의심하진 않는 거야?”

“적어도 네가 우리랑 적대하는 조직에서 나온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적어도 이 인근 구역은 우리가

정리했다. 고작해야 고등학생 싸움에 용병이나 킬러를 고용하는 만화 영화 같은 이야기만 없으면 말이

지.”

‘...그 만화 영화 같은 일, 벌어졌는데.’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에 입이 근질거렸지만 참았다. 이 정도로 잘 정련된 조직을 만든

고등학생이 궁금하기도 했고, 능력의 향기 따위 없이 만화 캐릭터처럼 육체를 단련한 여성이 만화 영화

같은 이야기를 입에 담으니 흥미가 동하기도 했으니까.

단순히 죽이는 것은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다. 개판으로 비벼진 음식이야 비빔밥처럼 스까묵어도 상관없

지만, 플레이팅이 아름답게 된 음식은 곱게 나이프질을 해야 하는 것처럼. 보폭이 큰 근육녀의 등 뒤를 종

종걸음으로 빠르게 쫓아가니 시선이 조금씩 더 모였지만 끝끝내 입을 여는 녀석은 없었다.

‘아, 진짜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인데.’

별 것 아닌데 설레인다. 게이머는 언제나 그렇지. 이익이 하나 없어도 게임 속 이스터 에그를 발견하면 일

단 기분이 좋거든. 무능력자임에도 능력자처럼 육체를 단련한 근육녀. 고등학생 양아치들을 군인 수준으

로 조련한 백정아.

‘천사랑 엮였으려나? 아니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악마의 계약자... 라기에는 저 근육녀가 너무 말끔한

데. 식품도 어디서 단백질 셰이크만 먹었는지 히어로 협회에서 제공하는 신성력조차 느껴지진 않아.’

시끌벅적 한 음악이 새어 나오는 술집 거리를 지나, 헐벗은 남자들이 여자의 팔짱을 끼고 건물로 잡아당

기는 거리를 지나서 나오는 모텔이 잔뜩 모여 있는 거리. 학생이 아닌 성인들의 거주 지역으로 만들어졌

지만 치안 악화로 인한 슬럼가가 되어 학부모 대신 불량학생들의 아지트가 되어 버린 동네.

“이 건물이다.”

“음, 통성명도 안 하고 너무 딱딱하게 구는데.”

슬그머니 옆에 들러붙자 흐흡, 하는 특이한 호흡과 함께 거리를 두는 모습에 졸랑졸랑 쫓아갔다. 결국 모

텔의 조그마한 엘리베이터에서 밀착하듯 마주보게 되는데 뭐 저리 도망을 칠까. 마치 잠든 대형견의 코

를 간질이는 기분으로 들러붙자 도주를 포기한다.

“후우... 일단 네가 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라.”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생각보다 넓고 깨끗한 내부가 나를 반긴다. 건물 외형은 낡은 모텔인데 내부

엘리베이터는 20인용으로 커다랗고... 층마다 잔뜩 숨어 있네. 모텔을 요새로 개조한 건가. 엘리베이터

천장에 있는 CCTV를 바라보며, 근육녀의 팔에 매달렸다.

“뭐, 뭐냐?!”

“에이, 너무 과하게 뿌리친다. 상처받게. CCTV로 다들 보고 있는 거 아니야? 뭐해, 웃어. 그래야 경계심

이 좀 덜하지.”

화들짝 놀라 팔을 뿌리치는 모습에 대충 감이 잡혔다. 얘, 그 쑥맥 근육 바보 같은 포지션이구나. 소희에

게서 사교성을 빼고, 여자에 대한 면역력도 빼고, 그 빈 자리를 근육과 단련으로 채우면 딱 이 녀석이 될

것 같은 느낌. 시뻘겋게 변한 얼굴에서는 마치 증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

“우리 애, 그만 놀려. 애가 단백질 가루만 먹고 운동만 해서 남자에 대한 면역이 없어.”

띵, 엘리베이터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든다. 성량이 큰 것 같지는 않은데 울림이

있어 귀에 잘 들어오는 동굴 같은 목소리. 모텔 꼭대기 한 층을 개조했는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자

커다란 책상이 보인다.

“그치? 그런 것 같더라고. 남자보다 헬스 트레이너랑 더 많은 대화를 나눴을 것 같은데.”

“그건 아니야. 운동은 영상 보고 따라 하는 데다, 남동생이 있으니까 남자랑 더 많이 대화를 하긴 했어.”

“야, 백정아!”

귓가에 쏙쏙 박히는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와는 달리, 평범하게 피곤에 찌든 고등학교 3학년생 같은 외형

의 여자가 구부정하게 앉아 책상 위 서류를 열심히 깨작거리고 있었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단말기에

서 증강현실 홀로그램이 나오는 세상에서, 볼펜과 종이로 서류 업무를 보는 녀석이라.

“그래서,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무슨 일이야?”

“너희가 얻은 가방, 구매하러 왔는데.”

“얼마?”

재미있겠다.

“10억.”

[작품후기]

수능이 끝났네요. 물론 수험생이 이딴 글을 봤을리 없겠지만!

교양으로 듣는 문학 수업에서 읽게 하는 중편 소설이 페미니즘 소설이라 대환장파티. 교양 교수님이 페

미니즘인 건 아니고, 상 받은 작품인데 페미니즘 소설이라 감상평 발표 대부분이 비판으로 떡칠되어 있

네요. 대한민국 문학계의 미래는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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