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89)

사이드 킥

소희가 히어로만 되면 뭐라도 시작될 거야.

“아, 씨바 심심해…”

“그러게, 히어로 업무가 이런 거였나. 어쩐지 선배들이 되게 투덜거리더라.”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뭐 그런 이야기.

“어쩐지 땅덩이 면적에 비해 히어로의 수가 좀 과도하게 많아서 히어로 종주국이니 히어로 중심국가니

할 때부터 이상하단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느이 나라는 히어로가 엑셀 두드리고 사이드 킥이 교통정리

한다며? 하는 비꼼의 의미였구나.”

“하긴, 한국이 히어로 비율이 좀 높긴 하지?”

한반도에 사는 대부분의 초능력자는 히어로가 되는 것을 택한다. 왜냐하면 히어로 = 공무원이니까. 강철

밥통에 대한 집념은 한국인 종특인지 아니면 인간 모두의 집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원금에 보조금에 연

금까지 삼위일체를 이루는 합격률 99% 히어로 공무원을 마다하고 사회의 경쟁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거

의 없었다.

일단 초능력자가 된다면 서류 업무 쪽이나 이런 단순 민원 쪽으로 배치될 기회가 생기는데, 고등학교 수

준의 기초적인 학력테스트와 인성검사만 통과하면 바로 합격이다. 빌런과 직접 싸우고 체포하는 히어로

는 조직이 조금 달라서 다른 테스트를 봐야 하고.

그리고 그 테스트는 봄에 열린다.

“오늘이 1월 24일이고, 테스트가 5월 1일이니까… 으아아, 존나 멀었네.”

소희와 나란히 앉아 멍하니 엑셀을 타닥타닥 두드렸다. 멍하니 잡담을 나누면서 느릿하게 작업해도 퇴근

시간인 6시까지는 끝내고도 쉬는 시간이 남는 헐렁한 업무. 이 모든 것은 아까 말했던 히어로의 숫자 때

문이다.

플레이를 하는 유저 입장에서 ‘초능력자’ 라는 것은 싸워 이겼을 때 경험치를 주는 최소 D급 이상의 초능

력자들이다. 육체 강화가 미약하지만 되어 있기는 하고, 눈에 보일 정도로 초능력을 사용하기는 하는 사

람들.

하지만 공무원인 히어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기 와서 깨달았다. 옆 파티션에서 순찰 보고서를 요약

해서 정리중인 히어로와 사이드 킥은 둘 다 E급. 피부에 닿은 물건의 온도를 10도 정도 올릴 수 있는 발열

능력자와 손바닥만 한 안개를 컨트롤 하는 안개술사.

고작해야 저런 능력 가지고 월급 수백만원에 빌런 사건을 종결 지으면 나오는 보너스에 퇴직 후 연금까지

나오니 사람들이 히어로 협회에 모이지 않을 리 있나? 연예인의 대체제가 된 히어로 사업은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게 되었고, 히어로 협회는 그 돈으로 자신들의 덩치를 불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히어로는 일단 연예인 취급을 받고 있다. 인기 많은 히어로가 등장하는 CF와 영화, 드라마 같은 컨텐츠

이익으로부터 히어로 협회는 아주 많은 돈을 받아가지. 그런데 표면상 히어로는 공무원 겸 치안 유지 병

력이다. 정부에서부터 국방예산의 얼마를 또 받아가고. 거기에 정신 제대로 박힌 고위 랭크 히어로들이

자발적으로 후배들을 위해 기부하는 것 또한 있었다.

예를 들자면 나와 소희가 졸업 후 히어로가 되면 교사인 자신은 누구랑 대련하냐고 지랄발작을 했던 이하

린 같은 년. 얘는 내가 천년만년 고등학교에 다닐 거라고 생각을 했는지 미래에 대한 생각도 없이 그냥 은

퇴하고 교사가 된 것이다. 은퇴 번복도 못 하니까 계속 교사직에 있겠지.

‘병신… 찐또배기 병신.’

아무튼 18살부터 25살까지 연예계에 처박혀 있던 이하린이 술자리에서 대충 말하던 바로는 CF 하나 찍

으면 억대로 돈이 들어온다고 했다. 그리고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번 돈의 30%는 히어로 협회가 가져가

고, 20%를 추가로 기부해서 반절씩 갈라 먹었다는 이야기.

“아… 땡땡이 치고 순찰 가고 싶다.”

“순찰 가 봐야 할 것도 없을 걸? 어차피 신고는 1차적으로 경찰서로 가니까.”

히어로 협회가 썩었다 구린 구석이 있다 해도 기본적으로 100% 썩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이

야기가 진행이 안 되거든. 맨 윗대가리가 음흉하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해도, 그 아래에서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세계 평화를 지키는 A급 히어로를 비롯해, 빌런과 최전선에서 싸우는 애들은 훌륭하다고 볼 수 있

으니까.

국회의원이 부정 부패를 저지르고 경찰 중 견찰이 섞여 있다고 해서, 같은 공무원인 소방관보고 쓰레기

라 매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를 위해, 정의를 위해 자신이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수익은 협회로 보

내고 협회가 주는 월급으로 만족하는 히어로들이 얼마나 많은가.

고작 사무직 말단 히어로들이 모이는 장소를 번듯한 빌딩에 대리석 바닥 깔아 둔 최고급 사무실로 수배한

것부터 그렇다. 결국 이익이 되니까 하는 거지.

“누나… 내가 할 건 다 했는데 몰래 나갔다 올래.”

“어휴… 올 때 마실 것 좀 사와.”

“음, 달달한 거?”

“아니, 잠 좀 깨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용량으로. 여기서 집 가는 길에 있는 와플집에서 아메리카노 1리

터짜리 팔더라. 솔직히 나도 지루하고 졸려. 차라리 학교에서 짐 나르면서 학생들 대련 구경하는 게 재미

있지.”

소희가 기지개를 펴자 근육이 요동치고 가슴이 출렁이는 걸 잠시 감상하다 안개로 변해 창문 밖으로 나왔

다. 순찰은 사실 핑계고, 손목에 있는 단말기에 반가운 연락이 와 있었으니까.

“그래서, 무슨 일로 대낮부터 의뢰가 들어온 거야?”

“음… 별 건 아닌데 지하 도시 사람은 엮이기 싫어하는 일이라서요. 그냥 가서 물건만 회수하면 됩니다.

저항하는 놈들이 있을 텐데 아무리 높아봐야 C급이고 대부분 D급인 동네 양아치 수준이거든요.”

“그런 애들이 왜-“

김한나와 통화 중에 슬쩍 손목 단말기를 돌려 그녀가 보낸 메일 내용을 확인한다. 조직 이름, 없음. 그냥

D급 초능력을 지닌 동네 양아치들의 모임. 조폭이라 부르기도 애매하고 학교 일진 정도. 초능력을 가지

고 있지만 초능력자 학교와 히어로 협회에는 가지 않고 그냥 동네에서 애들 상대로 거들먹거리는 정도.

“이런 흉악한 물건을 가지고 있어?”

폭력이라 해 봐야 병원에 가지 않을 정도로 뺨을 때리거나 멍이 들 정도로 걷어찬 것이 전부. 가장 커다란

나쁜 짓은 민증 위조를 통한 흡연과 음주가 전부. 게임이나 소설 속 세상이라면 엑스트라로 나오기도 힘

들 정도로 애매한 잔챙이들.

그런데 그런 잔챙이가 왜 2구역 공장단지의 3분의 1을 날려버릴 EMP 폭탄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이게 뭐야, 거기 폐공장에서 터지면 2구역 10%랑, 여기 3구역 5%정도는 2주 정도 정전이 일어날 거라

고? 도시 단위로 날려버리는 이딴 흉악한 물건을 왜 동네 고삐리가 가지고 있냐? 차라리 지하 도시에서

변신 로봇이 출동한다고 해라.”

“그게… 중앙의 간부 하나가 거래 중에 약에 취한 상태로 지상 유흥가에서 퍽치기를 당했답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등골에 소름이 쫙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지하 도시 중앙의 검은 양복 녀

석들은 대부분 C급, 그때 증기 뿜는 빨간머리랑 싸우던 여자는 B급은 되었다. 간부라면 높은 놈이니까 똑

같이 B급이겠지.

그런 놈이 약에 취해서 고등학생 저능력자에게 퍽치기를 당했다고?

“냄새 존나 구린다. 진짜야, 아니면 숨은 사정이 있… 모르니까 다들 싫어하는 거네.”

확실히 지하 도시의 녀석들은 절대 엮이기 싫어할 만한 수상한 일이다. 일이 잘 되면 도시 중앙의 간부와

끈을 만들어서 도시의 이권을 조금이나마 챙길 수 있겠지. 하지만 지하 도시도 결국 빌런이 되지 못한 찌

질이 새끼들이 만든 도망자들의 도시. 그 안에서 지들끼리 권력 다툼을 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잘못 엮였다가 다른 간부한테 밉보인다면? 사실 이게 무언가 솎아 내기 위한 전초 작업이라면? 아니면 지

하 도시랑 히어로 협회의 썩은 분이랑 손잡은 걸 아는데, 실적 만들기에 엮여서 히어로한테 퇴치 당한다

면?

경찰한테 체포당하면 곱게 수갑이라도 차지, 마약 사범을 보고 눈 돌아간 히어로가 달려들면 일단 팔 다

리를 비롯해서 어디 뼈가 멀쩡하긴 힘들다. 싸우자니 무섭고, 안 싸우자니 곱게 항복해서 고운 꼴 볼 리

없고.

“그래, 일단 위치는 정확한 거 맞지? 물건 생김새는 검은 서류가방에 새겨진 은색 뱀 무늬?”

물론 나한테는 너무 맛있는 이야기였다. 퍽치기를 당한 병신 간부랑 연을 쌓을 수 있다면 흡혈로 지하 도

시 중앙에 대한 정보를 뽑아 먹을 수 있고, 권력 싸움 같은 음모라면 심심한 일상을 달래 줄 것이다. 그러

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거물이 튀어나와 나를 위협한다면?

‘여차하면 소희 부르면 되는 거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 소희한테 살려 달라고 울면 각성한 소희가 알아서 쓸어버리겠지. 이 임무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눈 돌아간 소희가 우리 숙소까지 날려버리는 것 말고 없다고 생각되니까. 고삐리들인가…

사진만 보면 참 곱게 생겼는데.

술 마실 돈이 떨어져서 처음으로 퍽치기를 시도했는데, 그 대상이 지하 도시의 간부고 퍽치기한 물품이 5

중 잠금이 된 최첨단 EMP 폭탄이라니. 얘들도 인생 참 재미있게 산다. 고등학생 때 테러리스트에게 습격

당한 우리들보단 아니겠지만.

[작품후기]

와! 술마시고 일어났더니 주말 중 하루가 사라짐!

그리고 룩딸은 남캐(소설 속에선 여캐)만이 할 수 있는 간지가 있습니다. 대검마초흑인대머리를 하려면

성별이 바뀌면 간지가 아니라 개그가 되니까요. 솔직히 한국 RPG에서 여캐한테 갑옷 풀세트 둘둘 말아

서 피부 하나도 안보이는 중세 기사 룩을 가진 게임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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