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89)

사이드 킥

일상은 별 일 없이 흘러갔다.

없어도 너무 없이.

‘아니 씨발,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왜 그리 뚱한 얼굴이야, 드디어 정식 히어로가 되는데.”

“음… 일상이 너무 지루해서?”

소희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지만 듬직한 손바닥이 머리를 헤집는 감각은 나쁘지 않아

곱게 받아들였고, 주변인의 시선이 모이는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게 전부.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나질 않았

다. 그게 정상이긴 한데… 게임 속 세상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나는 정말 평행 세계로 차원이동을 한 게

맞는 거겠지?

고등학교 1학년때 학교에 테러가 벌어지고, 지하 조직에서 빌런을 꿈꾸는 친구들의 잔당을 싸그리 쓸어

버리고- 그걸로 끝. 남은 고등학교 2년은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련하고 섹스하고 대련하

고 섹스하고 대련하고 섹스하고 무한 반복.

하기야 고등학교에 다니는 중 테러 조직이 학교를 습격, 점령해서 애인이랑 같이 테러리스트를 무찌르는

상황은 어지간한 사람들은 겪지 않는 일이긴 해. 하지만 이 세상의 배경은 내가 하던 게임. 그래서 뭔가

더 많은 이벤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멍청한 생각이었지만.

게임이야 이벤트 트리거가 잔뜩 있어서 유저가 뭘 하면 재깍재깍 이벤트가 발생한다. 학교에 다니면 연

애 이벤트가, 히어로가 되면 빌런이 나오고, 악당이 되면 퇴치하려는 영웅이 등장하고. 하지만 그건 게임

서버의 보정을 받은 게임 속 이야기.

이 세상은 게임 배경을 닮은 현실이다. 현실성으로 유명세를 탄 가상 현실 게임보다 더 현실 같은.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멍청한 문장으로 들리는데. 게임보다 현실 같은 현실이라니. 하지만 이 것보다 더 정확한

말은 없는 것 같다.

일단 머릿수인 빌런들은 대부분 생사불문 현상금이 걸려서 싹 쓸렸다. 대목을 잡으려고 외국인 히어로들

이 한국에 들어올 정도. 조직을 유지해야 할 거래처들은 지하 도시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뒷골목에서 쓱

싹 당했고, 그 중 10%정도는 내가 직접 처리하긴 했지. 머릿수도 물자도 전부 날아가서 아무것도 남지

않고 초토화된 조직이 3년만에 위상을 되찾을 리 없었다.

그나마 변한 점은 소희가 용사의 힘과 내 몸에 익숙해져서 점차 리드하는 날이 많아졌다는 것과 내가 그

것에 맡기고 좀 더 수동적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동거 3년차가 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내숭

이 없어졌다는 점 말고 없다.

굴라 두 명은 마약을 즐기되 중독되지 않는 육체를 가지고 지하 도시에서 물 만난 고기 마냥 행복하게 지

내고 있어서 방치한지 오래. 윗집에 살아 가끔 가지고 놀던 거유의 치유사는 등급이 오르며 이사를 갔다.

내게 잠재 능력을 강탈당한 조희정과 강정태, 김민혁은 평범하게 대학교에 진학해서 알콩달콩한 러브 코

미디를 찍고 있고.

다르게 말해선 그게 전부였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빌런의 조직도 없고, 지하 도시를 어지럽히는 단체도 없었다. 천사들은 여전히 히

어로 본부에서 급식소 놀이를 하고 악마 새끼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건지 마력조차 느낄 수 없는 상

태. 마왕군에 이르러서는 정말 존재하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단서가 없었다. 소희가 용사로 각성하지 않

았더라면 마왕이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 백아영, 이었나? 화염 속성의 히어로는 흡혈 섹스를 한 번 당하더니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

는다. 지하 도시에 단독으로 쳐들어와서 서류를 훔쳐가던 그 행동력으로 2년을 잠수 타다니. 어디 높으신

분에게 자살이라도 당했나 싶을 정도. 물론 홈페이지를 보면 멀쩡히 살아 있기는 하던데.

“지난 테러 때문에 히어로 협회가 눈이 돌아간 상태로 온갖 초능력자를 순찰병력으로 돌렸는데 무슨 일

이 있을 리 있나? 아주 뿌리째 박멸 당했는데 3년만에 복구하면 세상을 정복하고도 남았지. 그 정도로 덩

치 큰 빌런 조직이면 이미 온 세상 히어로가 달려 들었을 거야.”

옆구리에 팔을 감고 품 안에 매달리자 뺨에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 히어로 슈트를 한껏 차려 입어 평소와

는 이미지가 다른 그녀의 품에 매달리듯 껴 안겼다. 경비 제복도 좋지만 복근이 드러나는 바디 슈트도 좋

단 말이지. 완전한 알몸보다 딱 달라붙는 옷가지가 슬그머니 가린 게 더 야한 것처럼.

“어휴, 히어로가 사이드 킥한테 이래도 되남?”

“원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히어로를 돕는 게 사이드 킥의 업무지?”

허리를 감싼 듬직하면서 말캉한 팔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기분이 좋았다. 용사는 용사인데 용사(Ver.미

연시)라도 되는 건지 점점 육체에서 남자를 홀리는 페로몬 비슷한 게 나오는 것 같은데. 역시 용사 하면

하렘이고 하렘 하면 용사인가? 물론 흡혈귀의 넘쳐나는 정력과 흡혈의 쾌락은 그녀가 감히 다른 남자에

게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로서 여러분들은 훌륭한-“

“서른 먹은 아줌마가 주책이야-“

“어후, 제발 나이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죄악감은 안 사라지는데.”

27살 히어로 공익을 코 꿰어버린 17살(설정) 소년. 우리 둘의 관계가 아무리 알콩달콩해도 주변에서는

부럽다, 대단하다 같은 시선이 날아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 내가 소희 옆구리에 딱 달라붙어서

복근을 만끽하는 위치가 새해 맞이 히어로 출범식이라는 점도 있고.

여전히 식스팩이 선명하고, 잡티 하나 없는 피부에 탱글탱글한 골반, 커다란 거유를 지닌 약간 개구쟁이

인상의 스포츠용 딱 달라붙는 슈트가 어울리는 쌔끈한 미녀여도 결국 주민등록상의 나이는 30살이니까.

겉보기에는 체육계 여대생이지만 호적으로는 30살, 나랑 정확히 10살 차이인 것이다. 원래부터 10살 차

이로 노리고 17살이라고 설정을 잡은 거긴 하지만.

“안 그래요, 계란 한 판?”

“내가 남자도 아니고 그런 걸로 놀려 지겠-“

“나는 이제 20이라 민짜 딱지 겨우 떼었는데? 그런 것 치곤 어제 침대에서 격렬했죠오~”

“…죄송합니다, 이제 안 건드릴 테니 제발.”

저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하느라 20분을 낭비한 늙은이는 일반인. 하지만 강당에 모여 있는 사람

들은 결국 전부 동료 히어로들과 사이드 킥이다. 10살 차이 나는 미성년자 사이드 킥이 침대에서 어쩌구

~ 하면서 음담패설을 속삭이면 주변 사람들은 심심해서라도 듣게 된다고.

“이번 한 번은 특별히 봐 줄게요.”

침대 위에서라면 몰라도 아직 쏟아지는 사회의 시선을 이겨 낼 정도는 되지 않았는지 얼굴이 시뻘게진 소

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기나긴 잔소리를 흘러 들었다. 아마 히어로들 중에 이걸 열심히 듣는 사람은 없

지 않을까. 우리 대화를 더 열심히 듣겠지.

“그러니까 오늘 저녁은 외식으로… 어, 칠룡이다.”

슬쩍 팔목의 단말기를 보니 모바일 게임의 알람이 와 있었다. 환상의 몬스터 출현! 이라는 글자와 함께 꾸

물꾸물한 동양식 용의 그림자가 액정에 표시된다. 새로 히어로가 되는 사람들이 모이는 1월 1일 히어로

출범식에 나타난 초 희귀 몬스터라니, 이건 인터넷에 자랑할 수 있겠는데.

슬그머니 스마트폰을 꺼내 증강 현실을 바닥에 전개하자, 근처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란이 일어난다. 주변

히어로들도 전부 심심했는지 내가 작게 중얼거린 말을 놓치지 않았던가, 자기들도 알람 설정을 해 뒀겠

지.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아 씨, 나 그물 다 떨어졌는데… 남은 거 없냐?”

“나도 희귀밖에 없어. 칠룡은 잘 튀지 않냐?”

“상점에서 마침 전설 급 그물 파네. 상술 미치겠다 진짜.”

앞에서 속닥거리던 말던, 주변 사람들이 슬그머니 단말기를 강당 바닥으로 향해서 몬스터에게 그물 총을

겨누던지 말던지 나는 소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잡히는 것 또한 확률이라면 당연히 용사 버프를 사용 해

야지.

“어휴, 꼭 내가 잡아야 해?”

“원래 남이 잡는 게 더 잘 잡히는 거야 누나.”

이제는 익숙하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에서 힘을 뺀 소희의 손목을 잡고 빙글 빙글 돌린다. 손바닥에

서 새하얀 빛이 올라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모이지만, 증강 현실용 렌즈에서 튀어나온 손바닥만

한 용의 모습을 보고 다들 시선을 돌린다.

“그래서, 얘는 또 얼만데.”

“얘는 비매품, 그냥 내 콜렉션.”

놓쳐서 안타까워하는 사람, 급히 돈을 쓰는 사람, 회사 욕을 하는 사람에 옆 친구를 질투하는 사람까지 다

양한 반응 사이에서 나는 당연한 것 처럼 용을 잡아 도감에 추가하였다. 잠시 용 때문에 뭘 검색 하려다 깜

빡했더라.

“간만에 중화요리나 먹죠. 2지구 동서쪽 블록에 있는 중화 레스토랑에서 동파육을 그렇게 잘한다는데.”

“중화 요리인가… 확실히, 짜장 짬뽕 탕수육에 깐풍기 말고 먹어본 적이 없긴 하네.”

“동파육에 가지 튀김이 유명하다니까…”

“음, 이 중화 레스토랑은 어디에 있는 거야?”

“명월 호텔 20층에 있어서 전망도 좋지. 코스 요리랑 스위트 룸이랑 패키지로 구매할 수 있는데-“

“… 이미 결제 완료라고 뜨는데?”

안정감 있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뭐, 마왕이던 악마던 내 옆에는 용사가

있다. 하나 남았을지도 모르는 목숨을 걸고 재미를 위한 도박 따위 할까 보냐? 여기가 가상 현실이던 평

행 세계던 나는 잘 먹고 잘 살고 싶으니까.

“그래서… 싫어?”

가슴에 맞닿은 뺨으로 심장 소리가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소희라면 마왕도 썰어버릴 수 있을 거야.

나를 위해서.

[작품후기]

주인공의 향상심이 부족한 것 같아 아예 없애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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