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
새하얀 분진이 바람과 함께 어지러이 휘날렸다. 방독면은 커녕 알몸으로 아랫도리를 훤히 노출하단 녀석
들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보스를 비롯하여 급히 숨을 참는 녀석들이 꽤 있었지만 그게 전부. 마법으로
불러낸 바람은 순도 99%라는 이름 모를 마약을 잔뜩 머금고 녀석들의 점막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
오러 유저처럼 오러로 신체를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림인처럼 운기조식으로 독을 뽑아낼 수도
없다. 그저 총알이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게 만드는 초능력을 제외하면 순수한 인간의 몸뚱어리인 것이
다.
“더, 좀 더…”
“와, 이건 진짜 재미없네.”
들숨 한 번에 반 이상이 픽 쓰러졌고, 보스를 비롯한 녀석들은 호흡을 두어 번 더 쉬고 쓰러졌다. 바닥을
박박 기면서 아직도 허공에 휘날리는 흰 가루를 더 들이켜려 들거나, 게거품을 물고 바닥에서 바르르 떨
다 쓰러지거나. 광란에 빠져서 발작을 할 거라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 하긴 게임을 하면서 30kg의
마약을 밀가루 마냥 허공에 뿌리고 강제로 멕여 본 적이 있어 야지.
안개화를 취소하고 바닥에 쓰러진 녀석들을 지나쳐 창고에 있던 현금이나 금괴, 무슨 수표 쪼가리를 챙
기는 동안 극적으로 일어나 나에게 덤벼들거나 하는 녀석은 없었다. 아지트에서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걸어 올라갈 즈음에는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으니까.
‘마약이 생각보다 강하네.’
판타지나 무협지 버전을 하면 생기는 편견이 있는데, 독을 쓰는 녀석은 약하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녹인
다! 라고 말하면 못 녹이는게 100% 존재하고, 누구든지 죽인다! 하면 해독약이 꼭 있다. 극독이던 뭐든
독은 상태 이상의 일종인지라 결국 해독당하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 오러나 내공이나 마법이나 신성력,
조금 마이너 하게 가면 카르마나 차크라까지. 인간의 육체를 다루는 기술에는 독에 대응하는 방법은 반
드시 존재한다.
하지만 이 동네는 초능력자의 동네. 육체는 건장하고 튼튼하게 변해 자동차처럼 달리고 십 수m를 뛰어
오르게 된다 해도 독에 대한 면역력이 갑작스레 생기지는 않는다. 아공간 안에 챙겨왔던 가방까지 전부
넣고 다시 날개를 펼쳐 지하 도시로 향했다.
※
결국 돌고 돌아 김한나의 손으로 모든 물건은 들어간다.
“이야… 수완이 좋은 녀석들이었네요. 금괴에 마약에 수표랑 채권, 지하 도시의 권리 증서까지 가지고 있
다니. 생각보다 깊은 커넥션이 있었나.”
내가 챙겨온 물건을 보며 싱글벙글 웃는 목소리가 사라지질 않는 김한나. 그래도 수십 명이 알뜰살뜰하
게 마약을 판 돈을 금고 째로 들고 왔으니 돈이 꽤 되겠지. 고등학교 2학년의 통장에 이유 없이 10억이 입
금되면 수상하기 그지없으니까 김한나에게 돈을 주고, 그녀의 카드를 내가 쓰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다.
애당초 건물주 놀이를 할 것도 아니고 큰 돈은 필요가 없다. 학생 신분으로 하는 데이트는 대부분 소희가
내고, 고등학교 2학년생에 어울리는 돈만 쓰니까. 밖에서 소희랑 노는 비용은 히어로 지원금으로 충당이
되고 지하 도시에서 필요한 물건은 대부분 김한나가 알아서 구해 준다. 모드 바꿔서 게임을 몇 판이나 했
는데 게임 머니 모으는 재미로 게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엘릭서 같은 귀한 거 끝까지 남겨두다 최종 보스 잡고 나서 인벤토리에 쌓여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나는 정 반대. 일단 구했으면 나중에도 구할 수 있겠거니 쓰고 보는 방식이다. 비싸고 효율이 안나는 상점
제 무기도 공격력이 오르면 일단 구매하고, 돈을 아껴야 나중에 편하다 해도 지금 편하려고 골드를 잔뜩
쓰고.
“일단 현금은 늘 쓰시는 카드에 넣어드리겠습니다. 금괴와 귀금속은 비상금이었는지 양이 얼마되지 않
네요. 따로 사용하실 목적이 없다면 저희 쪽에서 현금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채권… 이건 좀 처리하기
귀찮은 것들이네요. 입막음 용으로 중앙 관리자 쪽에 넘기면 될 것 같고. 지하 도시 땅문서는 얘들이 왜
들고 있는지… 경매장으로 보내서 일정량 떼어드리겠습니다.”
“그래, 알아서 처리해. 떼 먹으려면 적당히 떼어먹고.”
“신뢰에 보답해드리겠습니다.”
“누구랑 그렇게 통화를 해?”
통화를 종료하자 옆에서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소희가 묻는다. 그녀의 육체 능력이라면 김한나의 목소리
는 커녕 김한나 옆에서 서류 정리를 하고 있는 부하직원 심장소리도 들리겠지. 매너를 지키느라 내용까
지 엿듣지는 않지만 여자랑 통화하는 건 알 것이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여자랑 통화를 한다고 질투하거
나 의심하지는 않는다.
“응, 지난번에 게임으로 현거래하던 그 사람. 이번에도 아이템 먹은 게 있어서 거래했지.”
슬쩍 액정을 확인해 본다. 그녀가 입금하기로 했던 돈 중 10%는 내 계정으로 레전더리.com이라는 이름
으로 입금되어 있는 상태. 사이트 운영자는 당연히 김한나인, 중소규모의 아이템 현금 거래 사이트였다.
게임 계정부터 그 계정 안에 있을 게임 머니와 각종 비싼 아이템까지 그녀가 준비를 해 준 상태.
“이야… 요즘 게임 아이템은 참 비싸네. 뭔 소모성 아이템이 개당 천만원이나 해?”
“나름 0.01%확률로 나오는 아이템이니까. 수요는 격렬한데 공급이 너무 부족해서 가격 경쟁이 붙은 아
이템이거든. 지난 달 까지만 해도 10개 묶어서 150만원이었는데… 확실히 인기가 과열되기는 하네.”
휴대 단말기와 연동된 증강 현실 모바일 게임.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AI가 생각하는 게 비슷한지 포X몬과
디X몬을 섞어 둔 것 같은 게임은 최초 출시되고 나서 증강현실을 넘어 가상현실 게임이 나올 때까지 인기
가 있었다.
무슨 고전 애니메이션 마냥 팔목에 뭘 차고 다니면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몬스터를 홀로그램으로 만들
어진 포획 그물총으로 잡고 다니니, 인기가 없을 수 없긴 하지. 남들이 멀리서 보면 허공에 앉아 쏴 자세
잡고 총질하는 미치광이로 보인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할 만하던데. 모으는 재미도 있고.”
그래서 나도 조금 하는 중이긴 했다. 일단 핑계 삼은 게임으로 거의 억 단위의 돈을 버는데 게임 내용을 모
르면 너무 수상하잖아. 거기에 다양한 이유도 더해졌다. 첫 번째는 계정이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쪼렙부
터 할 것 없이, 김한나가 사온 만렙 슈퍼 계정에 프리미엄 버프를 천 만원 단위로 처발랐는데 재미가 없을
리 없지. 귀찮은 퀘스트나 육성은 다 건너뛰고 마음에 드는 몬스터만 골라서 모으면 되니까.
두 번째는, 내가 너무 심심한데 할 게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해.
“하긴, 남자애들한테 인기라던데.”
“그치, 헐벗은 사람들이 안 나오니까 얼마나 좋아.”
“음, 확실히 헐벗은 남캐 보다 저런 신화 속 괴물이 더 멋지긴 하지?”
지난번 고전 오락실에서 느낀 것처럼, 게임 캐릭터가 내게 너무 개그로 다가와서 진지해지기 힘들었다.
원피스 자락을 펄럭이며 대흉근을 조여주는 금발 마초 캐릭터, 툭 튀어나온 고간을 자랑하는 부메랑 팬
티 캐릭터 같은 것들.
‘룩딸을 못 친다고!’
전사는 중갑이고 무기는 대검이지. 쌍수도끼 휘두르는 알몸 야만인도 좋다. 풀 플레이트 메일 입고 모닝
스타 휘두르는 중갑 보병도 좋고 쯔바이헨더 들고 돌격하는 체인 메일의 검객도 좋았다. 문제가 있다면
빌어먹을 남녀 역전 세계에 있겠지.
남캐는 벗기는 것. 어디를 가나 그런 풍조가 만연했다. 대검 전사는 삼각팬티에 가죽 멜빵으로 유두만 가
리고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었으며, 쌍수도끼를 휘두르는 야만인은 비키니 아머를 걸쳤다. 모닝스타를
휘둘러야 할 거인은 가슴에 니플 패치를 붙이고 있으며 쯔바이헨더를 양 손에 꼬나 쥔 검객은 새하얀 드
레스를 입었다.
그에 비해 몬스터는 그냥 몬스터였다. 노란 쥐새끼는 전기를 뿜었고 파란 도마뱀은 냉동빔을 쏘며 빨간
늑대는 불을 뿜었다. 남녀 캐릭터의 섹스 어필이 변하더라도 게이머들이 ‘몬스터’를 보며 느끼는 간지폭
풍에 대한 감상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그렇게 수요가 부족한데 너는 어떻게 그리 잘 뽑아?”
“누나… 나는 흡혈귀고, 마법을 사용해.”
“…어? 하늘아?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대놓고 보여주기 식으로 손가락에 마력을 모은다. 기초 마법 중에 행운을 높여주는 마법을 덕지덕지 바
른다. 기초 저주의 응용 판인데, 새끼발가락을 문턱에 박지 않도록 하는 마법이나, 잼 바른 식빵을 떨어트
렸는데 잼이 위로 가게 하는 정도의 마법.
하지만 내 옆에는 용사가 있다.
“어어, 손가락, 손가락이 빛나는데, 하늘아?”
옆으로 고개를 뉘이며 머리를 기댄다. 얇으면서도 든든한 팔뚝이 머리를 받쳐주는 게 느껴져 그대로 몸
에 힘을 빼 버리고 팔짱을 감는다. 팔뚝에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을 즐기며 반짝이는 손가락으로 톡톡 뜸
을 들이다 뽑기 버튼을 누른다.
10회차 분량으로 시행하는 11연차. 몬스터의 알, 또는 특별한 몬스터를 포획할 기회를 주는 티켓. 이 두
개가 돈이 된다. 한 번 뽑는데 현금 30만원이 들어가는 정신 나간 뽑기 지만 내게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번쩍거리는 빛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확률이 조금 더 높은 그물, 근처 몬스터를 찾아주는 소모성 레이더,
일정 레벨 이하의 몬스터를 쫒아 내는 스프레이. 쓰레기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다 마지막 11번째에 새로
운 이펙트가 뜬다. 반짝거리는 빛 속에서 서리바람과 은색 번개가 우르르 쾅쾅 내리치더니 서버 메시지
에 공지가 뜨는 것이다.
[치킨팔아요 님이 9성 펜리르 – 신살랑의 알을 획득하셨습니다!]
“짠, 100만원으로 1800만원 벌기.”
“너, 너… 이게 무슨?”
소희도 어느 정도 이 게임에 대한 지식이 있었는지, 가슴에 머리를 대놓고 비벼도 그녀는 말없이 내 계정
을 구경하기 바빴다.
[작품후기]
어떤 분이 코멘트로 정확히 지적해주셨는데요.
주인공이 어떠한 향상심도 없이, 목적도 없고 강해지려는 것도 아니고 겉도는 것 같다~
라고 하셨는데 정확해요. 제 소설을 너무나도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소설은 어떠한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모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냥 가상현실게임으로 돈벌고 성욕이
나 해결하던 딸잽이가 강력한 힘을 가졌을 뿐이죠. 주인공이 이 세상을 게임이라 생각하고 이것 저것 죽
일까 말까 하는건 작가인 제가 GTA 같은 게임을 할 때 하는 짓입니다.
캐릭터가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뭐...
제가 꼴리려고 글을 써서 캐릭터가 입체적이질 않아서 그렇겠죠.
솔직히 갓세계물로 다른 세상에 태어나는 주인공들은 목적의식 확실하게 잡아서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
고 원래 세계의 일을 알아보고 내가 왜 이런 세상에 왔는지 원인을 찾아내고 세상이라도 정복해서 위대해
지고 귀환하거나 자의로 남거나 하죠.
그런 의지와 능력은 주인공한테 없습니다.
그 정도로 똑똑하고 독기가 넘쳤으면 공장 노동자로 몇 평짜리 기숙사에 사육당하면서
가상현실로 딸잡고 게임 데이터 팔아서 목숨 연명하지는 않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