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89)

의뢰

휘청거리던 남자는 결국 목적지에 도달한다. 전선의 피복이 다 벗겨지고 전기 따위는 들어오지 않을 낡

은 창고의 아래에서 명백하게 느껴지는 많은 사람들의 숨결과 소음, 그리고 빛. 폐 공장 창고를 지키는 사

람이 있으면 되려 수상하다고 느껴질 테니 입구를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자, 어쩔 거야? 안으로 들어 갈래, 아니면 가방을 놓고 도망칠… 어?”

후다다닥. 사람이 뛸 때 저런 소리가 날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뛰어가는 뒷모습에 어처구니가 없

어 쫒아 갈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 내 심기가 상할까 봐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서류 가방은 바닥

에 곱게 세워 둔 상태.

‘…원래 이럴 때는 자기 조직 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가서,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라고 소리지르다가

같이 전멸당하는 게 올바르지 않나. 경고를 해 줄 마음이고 뭐고 저렇게 잘 뛰다니.’

공장 잔해에 걸려서 발목을 접지르고 허벅지와 종아리를 베이며 휘청휘청 좌우로 비틀거리던 녀석이 목

숨을 걸고 달려나갔다. 엄살은 아니었으니까 정말 접질러서 부어오른 발목으로 저렇게 뛴 건가. 으, 아프

겠다.

콘크리트 바닥에 부자연스러운 녹슨 맨홀 뚜껑. 폐 공장 단지 안에서 굴러다니는 녹슨 맨홀은 자연스럽

지만, 창고 바닥에 맨홀이 있는 건 많이 부자연스럽다. 대놓고 입구라고 광고를 하지 그래. 그런 마음을

먹고 몸을 안개로 변신시켜본다.

손 끝부터 새하얀 수증기로 변하는 나의 몸. 마치 반중력 체험실에 들어간 것처럼 육체가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든다. 안개로 변했으니 촉감 따위가 느껴질 리 없으니까. 허공을 부유하는 것처럼 맨홀 뚜껑의 틈

새로 파고들어 아지트로 향한다.

“으햐햐, 집! 에이스 집이다!”

“이 미친, 2연속 하우스가 말이 되냐?!”

“아응, 누나아~ 손이 좀 거칠다.”

“흐흐, 굶어서 그래, 굶어서. 얌전히 있어봐.”

“그래서, 오늘 거래액이 얼마였지?”

“음… 지하도시의 약 50kg 해서…”

지하실을 개조해서 만든 기지는 뿌연 담배 연기로 둘러 싸여 있었다. 카드를 치는 놈, 술을 마시며 남자를

끼고 노는 놈, 그 와중에 다크서클이 검게 내려온 상태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녀석들까지. 생각보

다 규모가 있는 조직이었다.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안개에는 색이 있다. 뿌옇게 흘러들어와 바닥에 가라 앉

은 안개를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할 텐데. 술병을 껴안고 바닥에 드러 누운 놈이나 제정신으로 카드

를 치는 년이나 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눈치 채는 놈부터 하나씩 질식사 시키려고 했는데.'

숨어들어가 깜짝 놀래키려고 했는데 코 앞에서 손을, 아니 안개를 손처럼 살랑 살랑 흔들어도 눈치 채지

못한다. 안개화 또한 능력이 상향되었나. 아마 늑대나 박쥐로 변하는 것도 뭔가 버프를 받았을 것 같은데.

'이러면 재미가 없지...'

"야야아, 부어라, 마셔라!"

"으헤헷, 저걸 진짜로 말하는 새끼가 있네!"

술판을 벌이는 여성들이 조금 아름다웠다면 몰라, 뻐드렁니나 비만이나 여드름 등 어디 하나씩 외모에

하자가 있는 도시 외부인들을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아무리 현실 같아도 나름 게임을 배경

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교육지구 초능력자 학교같은 중요 무대에서 멀어질수록 외모가 하향평준화 당하

고 있으니까.

'보스나 찾아 볼까.'

그래도 보스라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중요 NPC인데다 지하 도시와 연이 닿아서 거래를 하는

녀석이니 외모가 빼어날지도 모르지. 아니라면 뭐... 빠르게 정리를 하고 소희한테 돌아가야지. 술병 박스

를 들고 복도를 오가는 아줌마들 사이로 몸을 이동시킨다.

못생긴 커플의 적나라하고 불쾌한 성행위를 지나고 음탕한 손길로 남창을 주무르는 술판을 지나, 온갖

잡다한 금속 물체가 가득한 방과 그 옆에서 외눈 안경을 쓰고 하얀 결정체를 감식하는 방을'지나칠 뻔 했네.'

네 명의 남자가 새끼 손가락 만한 새하얀 결정체를 하나씩 감정하고 있었다. 검은 테이블의 비닐 위에는

사람 키만큼 결정체가 쌓여 있고, 감식하는 남자들은 방독면 비슷한 것으로 호흡기를 완전히 보호하고

있는 상태. 저게 다 돈인데.

"오늘 치 할당량은 거의 다 되었지?"

"그래, 이제 저만큼만 하면... 어?"

"왜, 설마 떨어뜨려서 깨트린 건 아니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뒤를 돌아본 남자가 곧바로 몸을 날려 책상 아래의 벨을 두드린다. 왜애애앵 하면서 조직 내부를 울리는

사이렌의 소리. 주변에서 들려오던 불쾌한 신음소리와 고함소리와 흥에 겨운 노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

지고 사람들이 우다다다 달려오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무슨 일이냐!"

"차, 창고가 비었습니다!"

방의 구석, 검사가 완료된 결정체 덩어리가 쌓여 있던 카트는 통째로 사라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물건

을 챙긴 것은 나. 안개로 변한 상태에서 아공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발전이다. 원래

이 모습이 되면 그냥 흘러 다니는 것만 할 수 있는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니. 나는 감지되지

도 공격당하지도 않는 반 무적 상태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 씨발! 씨발 새끼들아 옷 벗어!"

우락부락하고 험상 궂은 아줌마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총구를 겨누자 감식 중이던 남자 넷은 후다닥 방독

면과 옷을 벗는다. 적당히 배가 나온 볼품없는 몸매가 새하얀 조명 아래에 드러나지만 그 누구에게도 성

욕과 음욕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이 씨발! 얘들은 아닐 거 아니야! 이 넷은 아닐 거고, 누구야 씨발! 반 년치 거래분이 통째로 증발하는

게 말이 되냐고!"

타앙-! 총성이 울리면서 천장의 석면 파편이 알몸의 남자들을 덮치지만 네 남자는 울먹거리면서도 제 좆

을 감출 생각도 없이 차렷 자세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음, 무슨 제약이라도 걸어 둔 것 같은데.

"복도, 이쪽 복도 근처에 있던 새끼들부터 차례대로 옷 벗어!"

"아, 보스..."

"이 개새꺄! 지금 투덜거릴 상태야? 저게 없으면 니 새끼들은 뭘 먹고 살래? 80kg이야 80! 지하 도시 새

끼들 똥꼬를 빨아주고 아득 바득 긁어모아도 30kg밖에 되지 않는데. 순도 99%짜리로 80kg이라고 개새

끼들아! 너냐? 니가 훔쳤냐?"

상황 파악도 못하고 입을 열려던 녀석의 입에 총구가 처박히자, 꺽꺽거리며 피 섞인 침을 뱉은 녀석이 총

구를 입에 문 상태로 후다닥 옷을 벗어 던진다. 한창 재미를 보느라 팬티만 걸치고 온 년놈들은 그대로 팬

티마저 벗어버린 상태.

돈 받고 왔던 남창들은 알몸으로 포위당해서 눈만 뒤룩뒤룩 굴렸고, 조직원으로 보이는 녀석들도 전부

알몸이 되어 권총이나 소총, 나이프를 꼬나 쥐고 사방 팔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인생,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코미디로다."

"누구냐, 씨발새끼가!"

흥분한 보스의 등 뒤에서 작게 속삭이자 곧바로 총탄이 날아온다. 앞을 보고 쐈는데 등 뒤에 있는 내게 정

확히 날아 드는 걸 봐선 이게 녀석의 초능력, 유도탄인가. 안개로 변한 내게 정확히 날아드는 걸 보니 소

소하지만 유용한 능력이네.

하지만 그게 전부. 적이 보이지 않아도 추적해서 적중시킬 수 있는 유용한 초능력이지만 안개에게는 총

알이 먹히지 않는다. 칼로 물 베기도 아니고 총알로 안개를 쏴서 죽일 수 있을 리 있나.

"투명화? 아니, 텔레파시? 누구냐!"

"누구냐고 물어봤을 때 대답하는 사람도 있던가?"

나름대로 전투에는 일가견이 있는 조직인지, 보스의 총알이 박힌 곳으로 바로 총구가 겨눠진다. 잘 보니

까 총알도 무슨 예광탄 비슷한 건지 날아오는 궤적도 조금 빛나는 데다 벽에 박힌 상태에서도 기묘한 기

운이 느껴지는 걸. 총알을 살펴보고 있으니 총구를 내린 보스가 나머지 인원들에게 손짓을 한다. 알몸의

남녀가 성기와 가슴을 덜렁거리며 총을 들고 다니는 모습은 확실히 3류 에로 코미디 같은 장면이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협상을 하자."

"상황 파악은 참 빠르네?"

찾을 수 없고, 볼 수 없는데 대화와 물건을 건드리는게 가능한 상대. 아마 어떤 초능력인지 파악하지 못한

다면 최악의 경우,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겠지. 아까 문 밖에서 그대로 후다닥 도망친

남자도 그렇고 상황 파악이 빠른 조직이네.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인데..."

"뭐지? 최대한 수용하겠다. 다른 걸 요구하지도 않아, 챙겨갈 물건은 가져가도 좋다. 다만 누가 보냈는지

정보만 다오."

"제정신을 유지하면, 줄게."

냉철하고 이지적이며 카리스마 있는 보스. 중간에 흥분해서 허공에 총질을 하고 부하를 윽박지르지만 그

정도는 해 줘야 뒷골목에서 입지를 지킬 수 있겠지. 외모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 굳이 비교하자면

포르노 스타는 아니고 볼만한 아마추어 캠 정도.

그러니까 나는 재미 있는 볼 거리가 필요해.

"너, 이, 씨발- 방독면 챙!"

새하얀 안개가 사람들을 뒤덮었다.

순도가 99%라 했으니 그대로 사용해도 되겠지. 아공간 속에서 결정체를 가루가 되도록 빻은 다음, 내 몸

을 이루는 안개에 섞었다. 눈 코 입을 비롯한 귀나 성기, 항문의 점막으로 파고드는 순도 99%짜리 마약

안개. 무슨 마약인지 이름은 듣지 못했지만, 별로 상관은 없겠지.

[작품후기]

이런 글이 선작 1999까지 오다니

신기한 기분이네요

철학 교양 때문에 황금종려상 받은 독립영화 보고 있는데

문학 교양 때문에 패왕별희도 보러 가게 생겼습니다

강제로 시간 날리는 과제가 너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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