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89)

의뢰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어야 했는데.

“누, 내 누우운! 앞이 안 보여!”

“손 대지마, 멍청아! 둘러 싸! 둘러 싸라고!”

‘…머리 아파.’

달빛 아래 홀로 내려앉은 새하얀 소년. 그림자 장막 안에서 숨죽이던 부하들 모두 헐떡이는 숨소리가 흘

러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의 소년. 앳되고 가냘픈 외모와는 달리 수 십 kg의 마약 가방을 들고 배시시

웃던 소년.

물건을 배달하는 사람을 덮쳐 대금을 지불하지 않기로 결정한 조직의 상층부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아름

다운 소년이었다. 보스가 감시역 겸 마약의 품질 검사관으로 보내온 소년만이 그 몽환적인 외모에서 자

유로웠다.

“잡아! 담벼락 위다!”

“아니야! 건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아!”

물건을 확인하고, 검사관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림자 장막 속에 있던 대원들이 뛰쳐나가서…

나가서?

새카만 연기가 시야를 뒤덮었지.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 되었지?

시야는 조금씩 어둠에 물들어가고 있었고, 안 그래도 좁아진 세상이 빙글 빙글 돈다. 어지러움에 이마를

짚으니 기분 나쁜 끈적함과 손바닥이 타들어가는 격통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 끔찍한 감촉에 균형을 잡

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몸을 뉘인다.

뾰족한 콘크리트 조각이 뺨과 얼굴을 사정없이 찌르지만 이미 피부 아래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찔리

는 고통은 나지 않는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을 견디며 고개를 겨우 올린다.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아수라장.

“잡아, 잡아서 막아!”

“버튼, 버튼을 파괴해!”

“아, 안돼! 돌려줘!”

담벼락의 잔해를 맨 손으로 파헤치는 녀석, 무너진 담벼락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녀석, 하수구 뚜껑을 품

안에 껴안고 웅크려 보호하는 녀석. 눈, 코, 귀. 얼굴에서 검은 피를 쏟으며 허공에 삿대질하고 오열하며

소리지르는 끔찍한 광경 가운데, 소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야… 출력이 오히려 강화되었네. 속성 반감 먹을까 걱정했는데.”

“희, 희아를 돌려줘!”

가방 위에 걸터 앉은 소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드는 산발의 여인에게 향한다. 온 몸

을 바르르 떨다 머리를 땅에 처박은 녀석이 미친듯이 발을 구르다 그대로 경련하며 멈춰 선다. 땅에 누운

그녀의 밑에서 흘러나오는 검고 끈적끈적한 피.

“너, 너 뭐…야?”

목이 뜨겁고 입 천장이 따갑다. 내 목소리는 이 아비규환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지 아니면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대꾸 따위는 없었다. 소년이 장난치듯 손가락을 휙휙 가리키면 하나 둘 발버둥치다

죽는다.

“주, 죽기 시러-“

새하얀 손가락, 새카만 안개. 눈꺼풀 위에서부터 검은 타르가 쏟아지듯 시야가 검게 물든다. 시야 너머로

조금씩 바스러져가는 부하들과, 벌벌 엎드려서 떨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피 흘리기는커녕 사지 육신

이 멀쩡한 상태로“사, 살려주세요! 제발!”

‘왜, 왜 너만…’

솔직히 걱정을 조금 하고 있었다. 내 육체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었고, 그 이유는 명백

하게 소희, 용사의 피였다. ‘빛의’ 용사의 피. 사람이 염분이 필요하답시고 농도 50%가 넘는 소금물을 벌

컥벌컥 마시면 뒤지듯이 나도 그렇게 골로 갈 수 있었으니까.

죽진 않더라도 후유증은 확실이 있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 강해진 육체가 그 증거. 애초에 마법사 캐릭터

가 맨몸으로 A급 바람 공격을 몸으로 때운다는 게 말이 되나? 원래대로라면 이하린의 칼날 바람에 팔다

리가 썰려 나간 다음 안개로 변해서 회복을 하는게 정상. 생채기만 나고 끝날 일이 아닌데.

육체가 이렇게 튼튼해졌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내게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서…

‘용사는 일단 분류하자면 근접 직업이니까 소희의 피가 나를 각성시켜서 강제로 근캐가 되었다면?’

솔직히 나는 근접 박투에 소질이 없다. 높은 능력치와 잔머리, 흡혈귀 특유의 안개화 같은 꼼수로 잘 싸우

는 척만 하는 거지. 검성이나 투신, 소드마스터 같은 애들이랑 기술로 겨루면 10초 안에 모가지가 뎅겅뎅

겅 썰려버린다.

애초에 법사 유저라고!

근접 전사와 법사의 이야기를 제쳐 두더라도 걱정되는 점은 많다. 진화 때문에 불안정할지도 모르는 상

태에서 섭취한 신성력. 일단 종족은 악마족인 흡혈귀인데 빛이 듬뿍 함유된 막 각성한 용사의 피를 먹어

도 되긴 하는 건가? 같은 고민.

주력기라 지옥 마법인데 빛 속성을 먹어서 지옥 마법이 반감되면 전투력의 40%는 손실되는 꼴이니까.

기이하게 강화된 육체 때문에 흡혈귀의 특성들, 늑대화 박쥐화 안개화 매혹안 등 잡기술이 다 사라지고

근육만 남으면? 전투력이 한 70%는 날아가는 거다.

“이야… 출력이 오히려 강화되었네. 속성 반감 먹을까 걱정했는데.”

하지만 그런 걱정도 오늘부로 끝. 소희를 물고 빨고 흡혈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각성

한지 얼마되지 않아 빛으로 요동치는 소희의 혈액은 빛과 어둠을 가리지 않고 일단 강화를 시켜주는 것

같으니까.

‘이야… 출력 쥑이네? 도트딜이 아니라 거의 즉발기인데?’

기초 지옥 마법인 검은 안개를 부른다. 흡혈귀가 자신의 성을 포장해서 햇빛을 막는 데 쓰이는 별거 아닌

안개. 살아 있는 생명체가 이 안개를 몇 일간 꾸준히 마시면 전염병에 걸리거나 사망해서 언데드가 되는

저주 마법이다. 물론 안개를 마시다 이상한 점을 깨닫고 안개 밖으로 나가거나 정화 마법만 사용해도 디

버프가 싸그리 사라지는 쓰레기 마법이었는데“희, 희아를 돌려줘!”

모기에게 에프킬라를 뿌리는 심정으로 손가락 끝에서 안개를 뿜는다. 사람 보다는 오토바이처럼 달려드

는 여성의 속도라면, 검은 안개는 아무것도 못 하고 풍압에 밀려나야 하건만 펄럭이는 바람 따위는 무시

하고 여성의 얼굴을 감싼다.

‘안개 주제에 바람을 무시하네?’

그녀를 감싼 안개는 미동 없이 잠잠하건만 가방 위에 걸터 앉은 내 옷자락만 거칠게 펄럭거렸다. 몇 시간

에 걸쳐 누적 도트딜을 주는 미약한 스킬이건만, 검은 안개를 들이 마시더니 1분이 채 되지 않아 바닥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킨다.

‘대충 C급 능력자한테 1분 정도의 시간이 있다면… 민간인은 거의 즉사시키는 생화학 무기 수준인데. 이

러면 위력이 너무 강해도 곤란해.’

“사, 살려주세요! 제발!”

피부에 고름을 만들어야 할 독은 사람의 육체를 검은 잿가루로 만들지를 않나, 귀에 이명이 들리는 최하

급 저주에 당한 녀석은 피눈물을 흘리며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시야가 교란되는 저주에 당한 녀석은

콘크리트 무더기를 품에 소중히 껴안고 울부짖기 시작하고.

이래서야 모든 마법을 하나 하나 다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데.

“그래, 그럴 거야. 왜 살려주는지는 알지?”

“네, 네! 아지트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여자들이 안개에 먹혀 이상 증세를 보인 그 즉시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손을 머

리 뒤에 모으고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널브러진 가방을 챙겼다. 기괴하게 뒤틀려 죽은 시체 사이를 지

날 때 마다 끅끅거리고, 바지가 젖을 정도는 아니지만 미세하게 지린내가 풍기는 상황.

“여기 있습니다.”

눈물 콧물에 오줌까지 지렸으면서도 바들바들 떠는 걸음걸이는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의 착란으로 뜯겨

나간 녹슨 철문을 지나, 멈춰버린 폐공장의 기계들 사이로 비틀비틀 걷는 남자를 따라간다. 흥에 겨워 땅하고 소리가 울릴 정도로 공장의 파이프나 기계를 두드릴 때 마다 멈칫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즐겁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뭐든지 말하겠습니다!”

“음… 조직의 정보 같은 걸 물어볼 생각은 없어. 어차피 그냥 다 죽일 거니까. 물어보려는 내용은 별 거 아

니니까 긴장 풀어. 그러다 도착하기 전에 다리에 힘 풀려서 자빠지겠다.”

말을 길게 늘이자 불안한듯이 흡-흡- 하고 호흡이 턱 멈추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 너네 아지트 3개 어디인지 전부 알고 있거든.”

지하 도시에서 교섭과 거래로 입지를 다진 김한나가, 조직을 쓸어버리라는 의뢰를 전달하면서 조직의 아

지트 위치를 알려주지 않을 리 있나. 이미 그녀가 전달한 정보에는 아지트와 조직원의 대략적인 숫자, 그

리고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녀석들의 신상 정보까지 있었는데.

“그런데 의뢰서에는 딱히 네 정보가 없는 걸 봐선 외부인, 아니면 뭐 협력자? 용병? 프리랜서? 너를 뭐라

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네. 아무튼 너를 반드시 죽이라는 말은 없는데.”

끅끅거리는 소리는 이내 흐느끼는 소리로 변하지만 비틀거리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먼지 쌓인 공장

의 복도를 울리는 기분 좋은 소리. 허공으로 살포시 떠올라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따라간다.

“내가 널 살려야 할까, 죽여야 할까?”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으음… 그러니까 물어보는 중인데.”

비틀거리던 걸음걸이가 빨라지다 못해 달리기 시작한다. 어두운 폐공장 단지에서 길가에 뒹구는 기계 부

품과 파이프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가방을 놓지 못하고. 바지가 찢어지고 날카로운 금속 조각에 피부가

베였음에도 허겁지겁 달려가는 남자의 등 뒤에 붙어 있는 상태로 계속해서 속삭였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할 것 같아?”

대답은 없었다.

[작품후기]

중간고사를 조지고 왔습니다.

아니 중간고사가 나를 조진 것인가?

사실 통 속의 뇌가 미친 과학자를 키우는 중이라면?

미친 과학자가 통 속의 뇌의 대학원생이라면?

중간고사는 끝났는데 왜 대체 레포트가 네 개 남은 것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