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89)

휴식

인생을 살다 보면 목표를 잃어 막막해질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뭔지 모르겠고, 뭐 라

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씩 가슴을 좀먹어 가고. 망망대해 한 가운데 멍하니 떠 있어서 어서 육지로 가

야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할 지 몰라 파도를 맞으며 발버둥치는.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이 좆 같은 게임은 현실을 너무나 잘 표현해 둔 상태라는 것이었다.

‘심심해.’

게임 속 세상인지, 어딘가의 게임 세계를 바탕으로 한 평행 세계라던지 같은 이과생이 총 출동해야 할 문

제는 내버려 두고 생각해도 지금의 문제는 너무나 거대했다. 내가 고이다 못해 젤라틴으로 변해가는 썩

은 물이라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심심해.’

시간.

모드가 엮였을 때는 보통 소규모 모드부터 대규모 모드로 천천히 나아간다. 학교를 졸업해서 히어로가

된 다음, 숨겨진 천사와 악마 세력을 발견하고 끝끝내 마왕을 무찔러 세상을 구원하는 것. 아카데미, 히어

로, 천사와 악마, 마왕과 용사. 작은 것부터 큰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은 그 협회 쪽 파스타 골목을 가자고 했던가?”

“집에 가서 씻고 가요.”

문제가 있다면 졸업까지 2년 남았다는 점. 모드를 동시 진행시켜서 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짓을 하고 다녀

도 졸업은 무슨 짓을 해도 2년이다. 뛰어난 능력으로 협상을 하거나 공적을 세우거나 할 수 없다. 미성년

자를 실전에 투입시킬 수 없으니까.

히어로가 된다는 문장만 보면 로망이 철철 넘치지만, 실제로는 초능력으로 강력 범죄, 이를테면 살인 강

간 방화부터 대규모 테러까지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된다는 뜻이다. 히어로 때문

에 정의에 대한 기준이 엄격해진 세상에서 미성년자 히어로를 허용한다?

- 충격,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 소년병 양산!!

- 누가 15살 어린 아이를 전쟁터에 밀어 넣었나?

- 나이 먹은 어른들은 협회 테이블에 앉아 있고, 앳된 청춘은 전쟁터에서 스러지다!

안 봐도 뻔하다. 한국 내부가 아니라 이웃 나라에서도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겠지. 물론 그들이 전부 정의

로워서 어린 아이를 지키려는 건 아니고. 그냥 옆 나라 하나 짓밟아 두면 이익이 생길 것 같으니까 그럴 거

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누나 생각.”

마주잡은 손.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간질이자 옆에서 배시시 웃는다. 키가 작은 캐릭터를 할 때마다 느

끼는 건데, 내 옆에 나보다 덩치 큰 사람이 떡 버텨주면 심리적 안정감이 장난 아니다. 이래서 탱커는 듬

직한 떡대를 쓰는 건가.

“오늘따라 사람이 많네. 무슨 행사라도 하나?”

“협회 쪽 먹자골목이 방송 나오면서 무슨 이벤트 같은 거 한다 던데?”

“그거 때문에 온 거야?”

“그치… 평일 점심이라 학생들이 없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학생들이 없을 거라

고 생각하고 일반 주민들이 전부 몰렸나?”

“하긴… 교육 지구라 이벤트 대부분이 학생 전용 이벤트였으니까 이런 상황에는 대부분 몰려오지 않을

까?”

솔직히 말해서 이 심심하면서도 느긋한 일상은 내가 생각치도 못한 일이었다. 거지, 고아, 소년병, 노예

병사, 몰락한 귀족의 자손, 멸문 당한 문파의 유일한 생존자, 비인부전의 무공을 품은 삼류 잡배. 혹은 아

주 가끔 하는 비 전투 모드의 아이돌, 인터넷 방송인이나 가수.

어린 나이라고 보호받는 일 없던 생활들.

“뭐… 학생증 관련된 행사만 잔뜩 있는 것도 그렇고, 협회 음식은 그냥 맛있으니까요.”

“그것도 그렇지. 협회가 코 앞이라 그런가 음식으로 장난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아. 내가 히어로 되기 전

에 갔던 중학교 수련회에서 식자재 가지고 장난 쳤던 사람들이 있었거든. 비싼 돈 내고 갔는데 정육점에

서 버리는 비계만 넣은 고깃국이 나왔었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뭘 어떻게 되긴. 먹는 거에 민감한 유도부 선배들이 들이 박아서 교사 몇 명 모가지 날아갔지. 세상에 빼

돌릴 돈이 없어서 교육지구 학생예산을 빼돌리다니, 간도 커.”

그에 비해 이 동네는 전에 했던 히어로 모드보다도 인권과 정의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박혀 있다. 아직 악

마나 마왕 세력이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멸망하지 않는 세상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겪는 입장에서는

편하다.

“뭐, 싼 값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우리는 좋지. 아, 저 가게…”

“저녁에는 저기로 갈래요? 보니까 수제 맥주를 준비했고 하는데.”

솔직히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뮤턴트 육포를 모래바람과 함께 씹는 것 보다, 에어컨 아래에서 맥주 한 잔

에 치킨 뜯는 게 좋지. 돈이 되니까 데이터를 팔아먹기는 하는데 향신료는 금보다 비싼 후추밖에 없는 세

상에서 만든 요리보단 MSG팍팍 쳐서 만든 인스턴트 음식이 더 맛있으니까.

사소한 일을 입 밖으로 꺼내도 최선을 다해 맞장구 쳐 주는 여자가 옆구리에 있어서 그런지 편안하기 그

지없는 일상. 원래 사람 심보가 앉으면 눕고 싶어서 심심하긴 해도 나쁘진 않았다. 물론 이쪽 세상 기준으

론 내가 소희 옆구리에 달라붙은 모양새지만.

“여기 꽃게 로제 파스타랑 볼로네제 하나씩 주시고… 애플 망고 에이드 500짜리도 하나. 하늘아, 피자

는?”

“마늘로 해서 하나 주세요.”

메뉴판을 건드리는 소희의 손가락을 툭툭 건드리자 종업원의 표정이 흔들린다. 누구는 뭐 빠지게 일하는

데 앞에서 어린 학생이랑 꽁냥대는 소희에 대한 질투. 부정적인 감정이 약간이나마 솟아나 소희에게 향

한다.

“어휴… 사람 다 보는데.”

“그런 것 치고 입 꼬리 관리가 안 되는데요~”

“음? 흠흠, 거 그럴 수 있지. 오늘은 왜 마늘 피자야?”

하지만 종업원의 흔들리는 감정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우리들이었다. 십 여분의 시간이 흐르고 맛깔

나게 꾸며진 파스타와 피자, 커다란 유리병에 담긴 에이드가 서빙 된다. 포크를 들어 올린 소희가 잠시 멈

칫거리더니 내게 눈길을 보내온다.

“사진, 안 찍지?”

“어쩐 일로 그런 걸 물어 본대요?”

물론 나는 그런 것 따위 없이 바로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아 위에 올려진 토핑과 치즈를 박살낸 지 오래.

이제껏 사진을 찍은 적이 없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으로 그런 배려를 하는 걸까? 애인으로서 이런 말 하기

참 뭣하지만… 소희는 바보에 한없이 가까운 단순한 사람인데.

“아니, 뭐… 학교 직원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남자들은 막 음식 사진 찍고 SNS하는 거 좋아한다고 해

서. 이번에 게임 방송에도 게스트로 나간 거 보니까 관심이 생겼나 했지.”

“SNS요? 음… 한다고 해도 음식 사진은 안 올릴 것 같은데.”

과학이 발전하고 초능력이 판쳐도 SNS는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하긴 중세 판타지 세상이나 무림세상에

서도 결국 사람들은 가십거리를 물고 뜯고 즐기니까. 막말로 봉이니 룡이니, 후지기수 랭킹부터 별호를

매기고 다른 도시까지 전서구를 보내 알리는 게 SNS활동과 다를 건 없지.

‘내가 SNS를 한다고 쳐도 때려 밟은 빌런들 사진이나 올리지 않으려나.’

바로 이전에 아이돌 활동을 할 때에는, 내 이름으로 계정을 파서 소속사 매니저가 시키는 대로 SNS에 글

을 썼다. 하고 싶어서 한 즐긴 게 아니라 최단기간 클리어를 위한 약팔이 SNS였지. 보여주기 식으로 한

선행이나 음원 홍보를 위해 사용했으니까.

“누나, 나 한 번 해볼까요?”

“그래, 뭐 요즘 애들은 전부 하니까. 특히 히어로 지망생인 애들은 거의 필수로 할 걸? 히어로도 결국 사

람들의 관심이 없으면 안 되니까. 강력범죄 빌런 특수부대 같은데 들어가는 거 아니면 어지간해서 얼굴

마담으로 팔려갈 테니까.”

“누나…”

스푼을 대고 포크로 면을 돌돌 말면서 생각했다. 히어로는 대충 나누면 두 종류인데, TV에도 나오는 애랑

TV에 안 나오는 애다. 안 나오는 애들은 진짜 목숨 걸고 빌런이랑 싸운다. 노릇하게 구워지거나 토막 나

거나 어디 박살 나고 녹아내린 시체가 나오니까 TV에 못 나오는 애들. 반대로 TV에 나오는 애들은 목숨

은 안 건다. 치안 유지나 경범죄자 체포에 사용되는 히어로들.

그리고 그 기준은 대부분 외모다.

“그런 식으로 돌려서 칭찬도 할 줄 알고. 기특해, 기특해. 자, 아앙~”

얇은 마늘 피자를 돌돌 말아 로제 소스에 살짝 찍어 입가에 가져다 대니,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소희

가 종업원의 시선이 이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낼름 받아먹는다. 오물오물 조용히 피자

를 씹는 소희

‘물론 칭찬하려고 말한 게 아니라 그냥 말해본 것이겠지만.’

이제 내 몸에 익숙해져서 슬금슬금 침대 위 주도권을 찾아가는 소희지만, 아직 소희 수준에 저런 돌려 칭

찬하기 같은 고급 회화 스킬이 있을 리 있나. 정말 자기 주변 사람들이 SNS 많이 하니까 그렇게 말했겠

지.

“사람들 본다니까.”

“나는 사람들 안 보니까 상관없는데.”

물론 중요한 건 부끄럼에 빨개진 소희의 얼굴이고.

[작품후기]

중간고사가 다가올수록 글 쓰는게 재밌어지죠~

시험 준비하느라 포켓고 시작했죠~

학점 조질 준비 완벽하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