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별다른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해서 막대한 이익을 생판 모르는 무례한 사람(그 것도 남자)
에게 안겨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진 엔딩을 봤는데도 심심해서 벌이는 장난. 일종의 줄타기였다.
“와, 잠깐, 누님들 잠깐! 고등학생이라니까? 채팅이 선을 넘으면 방송이 죽어요!”
고전 게임 기계는 아무래도 방송할 건덕지가 별로 없어 오락실 중앙의 증강현실기기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허공에 튀어나오는 홀로그램을 장난감 칼로 베는 게임부터 사방 팔방에서 날아오는 음표를 장갑
을 낀 손으로 때려야 하는 기괴한 리듬 게임까지 잔뜩 있는 곳.
“와… 무슨 방송 하나?”
“이야… 초능력자 학교 쪽 앤가? 되게 잘하네.”
게임 기계가 많으니 사람도 많고 몰리는 시선도 많다. 고전 오락기 쪽에 사람이 없다 해서 오락실에 사람
이 없는 건 아니니까. 학생들이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육 지구의 거대 오락실에 사람이 없을 리 있나.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결국 학생들은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자, 우리 오락실 은둔 고수 소년이 과연 고전 오락만!”
손에 쥐여진 플라스틱 칼. 역시 칼은 조금 어색하다. 노예로 게임을 할 때는 칼 같은 귀한 금속 무기를 얻
기 힘들어서 대부분 죽창이나 몽둥이를 쓰고, 능력치가 좀 오른다 싶으면 마법 쪽으로 빠지니까. 허공에
붕붕 휘두르니 경쾌한 소리가 난다. 하긴 오락기기가 무거우면 손목을 다치겠지.
삐슝 삐슝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과일이 사방 팔방으로 튀어 오르지만, 검에 달려 있는 센서로 가볍게 긁
는다. 검에 미숙하다 해도 상대는 고작 오락실 게임 기계. 그것도 무슨 세계 최강자전 이런 것도 아니고
동네 오락실에서 커플들이 하는 게임이다. 난이도가 어려울 리 있나. 오히려 지금 힘든 것은…
“에에, 누님들! 우리 친구 고등학생이래! 초능력 고등학교 1학년! 어?! 아니 채팅… 얼린다? 진짜 선 넘으
면… 야! 저 새끼 블랙! 누구 방송 샤따 내릴 일 있어?!”
헐렁한 셔츠인데 단추를 두개 푼 상태. 팔을 이리 저리 휘저으니 어깨나 쇄골, 가슴 위 쪽이 살살 드러난
다. 티셔츠나 추리닝이면 실수로 흘러내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미 카메라에는 내가 단추 두 개 풀면서
등장하는 게 잡혔다. 물론 저 BJ도 내 단추를 잠그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어우, 큰손 누님, 코인 만 개?! 아니… 너무 크게 쏘시는 거 아니에요?! 아… 새로 나온 게임 돌려 보라구
요? 설마 코인 만 개로 광고 하나 찍으시려고… 에헤, 농담 농담.”
인터넷 방송을 하는 입장에서 큰 후원이 펑펑 터지는데 반응을 하지 않을 리 없다. 에어 하키부터 이 과일
검객까지 그녀가 큰손 누님이라고 부르 짖은 것이 열 번은 넘는다. 개당 100원만 잡아도 벌써 오백만 원
을 벌었을 테니.
1시간에 500만원, 아슬아슬한 줄타기. 욕망과 고뇌로 점칠 된 BJ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소매
를 걷어 팔뚝 근육이 올라오게 보인다. 요리할 때 반팔을 입으면 소희가 손목부터 팔뚝에 성욕을 느꼈던
것 같은데. 여자 각선미를 보는 기분일까?
소매를 걷고, 덥다는 척 셔츠의 목 깃을 팔락인다. 어깨를 풀어주는 척 스트레칭을 하는 척하면서 슬쩍 슬
쩍 몸에 있는 잔근육을 내비치자 BJ의 얼굴이 한층 더 굳는다. 지금쯤 머리 속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겠
지.
‘오늘 하루 바짝 버는 것과, 정지당해서 못 버는 것에 대한 계산이라도 하나?’
게임 잘 하는, 미소년, 고등학생, 노출. 인터넷 방송에 수십 수백만 원씩 돈을 꼴아 박는 흑우 샛끼들이 눈
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프리미엄 사료다. 방송을 살살 잘 굴리기만 하면 아마 1시간, 2시간 안에 천만원
단위로 돈을 벌 수 있겠지.
하지만 이것에 불-편함을 느낀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신고를 하면 방송은 펑! 경고로 끝날 지, 몇 일간
방송 정지를 당하는지 이쪽 세상 인터넷 방송에는 관심이 없지만… 뭐 그런 부분은 별로 차이가 없지 않
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등 뒤에서 기분 나쁜 기색이 느껴졌다. 위협적인 것은 아니고… 음흉, 음험
에 가까운 기척. 내 오락을 구경하는 인파 사이로 누군가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너, 이 개새-“
“아, 씨발럼이 진짜.”
“어, 뭐야! 안돼, 내 방송!”
※
별 거 아닌 일이었다.
“하늘아… 에휴, 어쩌겠냐.”
나한테만.
“아니, 거기서 그렇게 될 줄 몰랐죠. 아… 귀찮게 진짜.”
정말 별 일 아니었다. 그냥 급식실에서 나한테 턱주가리 부서졌던 년이 이번 학교 테러 때문에 정신적으
로 문제가 생겼을 뿐. 1학년한테 쥐어 터졌다고 반쯤 왕따를 당했는데 테러 때문에 연년생 동생이랑 애인
이 눈 앞에서 죽었다고.
우울해져서 집구석에는 못 붙어 있는데 이리저리 방황하다 추억이 깃든 오락실에 갔더니 자기 턱주가리
부숴버린 후배 놈이 카메라 끼고 깔깔거리며 방송이나 하고 있으니 눈이 뒤집혀서 덤벼들었던 것이다.
별로 위협도 되지 않아 어퍼컷으로 턱주가리를 다시 한 번 후려쳐 제압했지만 그 뒤가 문제.
“아니… 그렇게 많이 보는 줄 몰랐죠.”
나랑 방송하고 있던 그 남자가, 알고 보니 게임 BJ중 3위 안에 드는 사람이었다. 인터넷 방송으로 월 수입
이 억 단위고, 인터넷 방송 말고 강연도 다니고 케이블 TV에도 나오고 게임 관련된 예능에도 출연한 유명
인사. 다만 나만 몰랐을 뿐.
그런 사람이 자기 돈으로 연 게임 대회가 소규모일 리 없지. 내가 학교 선배의 턱주가리를 어퍼컷으로 후
려쳐서 강냉이를 탈곡하고 오락실 바닥을 핏방울로 적시는 모습을 생중계로 8만명이 봤다. 더군다나 인
생에 도움이 되질 않는 이하린 때문에, ‘이하린의 남자(고딩)이 오락실에서 사람을 팼다’ 라는 기사가 떠
버렸다.
“그래서 고작 봉사로 끝나잖아.”
그냥 학교였다면 별 일 없이 넘어 갈 텐데, 내가 다니는 곳은 초능력자 학교에 내 장래 희망이 히어로로 포
장되어 있는 것이 문제. 사람들 앞에서 과도한 폭력으로 일을 해결했다는 이유로 징계가 내려온 것이다.
과도한 폭력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없었다.
A급 능력자랑 맨몸으로 대련하는 주제에 B급에 간당간당하게 걸친 C급 능력자를 상대로 후려쳤으니까.
전력으로 후려쳤으면 선배라는 놈이 머리통을 찾으러 오락실 분실물센터로 향했어야 했겠지만… 적어
도 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보면 힘을 안 주고 쳤다는 핑계가 먹혀 들어가질 않는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
지만 이하린은 도움이 안 되네.
심지어 얘 턱주가리를 부순 게 두 번째. 초범이라면 소희가 지난번처럼 어떻게든 해 주려 했겠지.
지금은 봉사명령서를 들고 온 걸 봐선 아마 소희 할머니가 마음을 먹은 것 같다. 하긴… 제 손녀가 데려온
남자가 사람 패고 다니면 곱게 볼 리 있나? 시어머님 밑에서 새댁 살이를 할 마음은 없지만 히어로 협회
정보를 뽑아 먹으려면 달게 받아야한다.
“봉사도 좀 심한 것 같긴 한데… 방송만 아니었으면 되는데.”
하지만 별 생각 없이 투정을 부려서 쩔쩔매는 소희의 반응을 보고 있는데, 소희는 정말로 내가 억울하다
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소희 입장에서는 남자애가 괴한한테 덮쳐진 상태에서 반격을 한 것으로 보
이겠지.
“남자애가 덮쳐졌는데 히어로니 뭐니… 어차피 같은 능력자인데.”
“뭐, 어쩔 수 없죠. 여기서 버텨봐야 히어로 협회에서 불이익만 받을 것 같고. 놀라서 조금 강하게 때린 건
맞으니까요.”
정신을 차려보니 역으로 화가 난 소희를 내가 살살 달래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아
직 늦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 연탄을 옮긴다는 고전적인 봉사 겸 형벌은 내게 좋은 눈요기를 선
사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진짜 연탄이란 뜻은 아니고.
“그나저나 누나까지 올 필요는 없었는데.”
“괜찮아, 내가 그래도 보호자 아니냐.”
관공서에서 사용하는 에너지 팩 옮기기. 약간 사랑의 연탄 배달 미래 버전 같은 느낌이 드는 봉사 활동이
었다. 물론 최상급 흡혈귀와 각성한 용사가 고작해야 10kg짜리 에너지 팩을 수백 개 옮긴다고 해서 땀이
날 신체는 아니지만.
“음… 그래도 햇빛이 꽤 쨍쨍하네요.”
“그러게 말이야.”
여름에 남자들이 반팔 반바지에 슬리퍼를 입고 다니는 것처럼, 소희의 복장도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덥
지도 춥지도 않은 상태라면 당연히 편안하게 걸치고 나오겠지. 지금처럼 몇 개나 되는 에너지 팩을 어깨
에 들쳐 올리니 매끈한 겨드랑이와 가슴이 강조된다.
늘 그렇듯 뒤로 묶은 머리와 그 때문에 드러난 혈색 좋은 목덜미, 짐 때문에 이리 저리 밀려 올라가는 얇은
반팔. 옷 너머로 슬쩍 슬쩍 보이는 스포츠 브라. 땀을 닦을 때 옷이 말려 올라가며 보이는 매끈한 복근과
오목하게 들어간 복근까지.
‘아, 꼴렸다.’
슬쩍, 그녀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이 느껴진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두 세개씩 옮기던 에너지 팩을
서로 어깨에 다섯 개, 열 개씩 얹어서 옮기기 시작한다. 가는 길에 맥주나 잔뜩 사가야 겠네.
[작품후기]
어려서 처음 야동을 접했을 때는 벗은게 참 야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로 뭐라도 입은 게 더 야하다는 생각이 들죠.
아 정조역전뽕빨물 보고 싶다
내꺼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