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89)

휴식

그래도 최소한의 매너가 있는지 중계하는 것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등 뒤에서 웅성거

리는 인파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대회가 끝났는지 인파의 대부분이 흩어졌지만 십 수명은 내 쪽으

로 와서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하긴 오락실인데…’

AR게임기처럼 홀로그램이 뻗어 나오는 게 아니라 근처에 있다고 방해가 되는 건 아니다. 거기에 고전 오

락기가 모여 있는 곳인데 구경꾼은 어쩔 수 없지. 등 뒤에서 속닥거리는 사람들로부터 신경을 끄고 다시

기계적으로 플레이를 했다. 게임의 3초 카운트 다운이 떨어지자 마자 앞대쉬 약발, 일어나는 판정이 되자

마자 다시 약발. 기상공격을 하는 순간 약발!

체력의 3분의 1씩 세 번. 이는 보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한 번의 오차 없이 보스를 퍼펙트 KO시키니 처

음 보는 영상이 나온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 무시하고 지나칠 수준은 아니라고 생

각해 뒤를 확 돌아보니, 멋쩍은 표정으로 손을 뻗다 굳어버린 한 남자가 있었다.

“아이 씹, 뭐요?”

“어, 저기… 게임하시는 뒷모습이라도 찍어도 될까요?”

내가 플레이한 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어쩌구, 갑자기 악마 날개에 제 3의 눈이 달린 보스가 화를 내며 저

쩌구. 스토리엔 별 관심도 가지 않았지만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어 고개를 획 돌렸다. 체력 게이지 밑에 승

리를 표시하는 동그라미 칸이 없는 걸 봐선 단판 승부인가?

“알겠으니까 다들 입 좀 닥쳐봐요. 존나 시끄럽네.”

진 엔딩의 보스라 해도 내 캐릭터보단 빠르지 않다고 들었다. 근육질의 우락부락한 여캐 답게 체력이

150%에 공격력이 어마어마하게 높을 뿐이지. 체력이 낮아지면 공격력이 올라가는 이 게임의 특성상, 열

심히 체력을 깎다 반격으로 세, 네 대만 얻어맞아도 게임 오버를 당하는 더러운 스펙이지만…

“와, AI는 심리전이 안 되니까 약발 짤짤이가 되네.”

“솔직히 짤짤이랑 니가와라만 잘하면 AI는 쉽지.”

결국 보스는 AI 보스. 체력이 높고 사거리도 길고 공격력도 강해서 이론상 원투 펀치 두, 세번 정도만 맞

으면 유저가 게임 오버를 당하지만, 모든 공격을 캔슬 시키는 약발 짤짤이 어택 앞에는 장사가 없었다. 그

래도 격투 게임인데 슈퍼 아머 같은 양심 없는 기술도 없고.

화산이 폭발하고, 맨 가슴을 까고 바지만 입은 근육 여성이 날개가 꺾인 상태로 분화구 속으로 추락한다.

예쁘장한 소년이 그걸 내려다보며 눈물을 훔친다. 캐릭터 스토리를 귀찮아서 하나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왜 이런 엔딩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뭐 어때, 진 엔딩 봤으면 된 거지.’

왼 쪽에서 네 번째 게임기를 클리어. 이제 내일 와서 오른쪽에 있는 게임기를 해 봐야지. 폭탄마 펭귄이

각양각색의 폭탄을 던지며 괴물을 사냥하는 게임인데… 설마 2P가 있어야 진 엔딩을 보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소희를 데려올까.

“저기… 인터뷰 가능 하신 가요?”

“뭐요, 씨발?”

팔을 쭉 뻗어 어깨를 풀어주면서 돌아서자 카메라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쉬벌, 할 일도 없나 카메라를 들

고 게임 하는 내내 등 뒤에서 대기를 했다고? 그나저나 조용히 게임이나 하고 돌아가려 했는데 무슨 인터

뷰. 어리둥절함에 입에서 저절로 욕이 나왔다.

“아니, 누님들, 잠깐만, 방송 터진다고!”

이제 보니 인터뷰를 하는 남자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손목 기어형 말고 그냥 넙대대한 스마

트폰에는 흡혈귀의 시력에도 빠르게 보일 정도로 무수히 많은 채팅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역시, 공식 방

송이 아니라 무슨 개인방송국 같은 건가?

이상할 정도로 과열된 채팅, 난색을 표하면서도 머뭇거리는 BJ, 짜증이 한가득 나서 매섭게 노려봐도 꿋

꿋하게 카메라를 돌리지 않는 카메라맨. 이걸 가지고 놀까 경찰을 부를까 고민하던 찰나 채팅을 정지시

켰는지 내용이 보인다.

-포상 ㅗㅜㅑ;;

-돼지 새끼 소리 들으면 1만원 후원 간다

-준희야 포상 받고 후원도 받자

임금님만세님이 1,000원 후원!

[뺨 맞으면 5만원 밟히면 10만원]

“아, 어, 그게… 보셨, 어요?”

마이크 때문에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끙끙거리다 고개를 든 BJ가 황급히 액정을 가리지만 이미 채

팅창의 절반 정도는 읽은 지 오래. 자신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허둥지둥 채팅을 정지시키고 음담

패설을 내뱉은 사람을 열심히 강퇴 시키려 한 것 같았지만, 무슨 공식 대회라도 되었는지 채팅의 양이 너

무나 많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종합 게임 방송 BJ 김준희입니다. 카메라는 방송 송출 중지 상태로 돌려놨으니까 얼

굴 노출은 안 되었을거에요… 아마도.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뒷모습을 찍어도 되냐는 질문에 알겠다고 해서 그런지 카메라는 돌아가는 상태. 더군다나 채팅 내용을

읽어보면 얼굴은 이미 방송 탄 것 같은데. 그래도 아이돌 해 먹으면서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

교로 느껴져서 짜증은 나지 않는다.

남자 화장실 대변기 칸 안에 숨어 있던 남장 사생팬, 비행기 옆자리를 예약하고 인터뷰를 요구하다 거절

하자 환불하고 도망친 기자, 무슨 대포알 같은 거대 렌즈를 가져와서 몇 백m 밖에서 도촬을 하던 파파라

치까지. 기억되기를 바란다며 테러를 하려는 미친 년놈들 사이에 껴 있었는데 고작 개인 방송에 3초 정도

얼굴 나간 일로 스트레스 받지는 않았다.

‘게임… 소희는 게임 좋아하려나?’

오히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개인 방송인이란 것은 일종의 관심 종자 아닌가. 자기가 게임

하는 모습 수 천명 앞에서 공개하고 소리지르고 화내고 웃고 떠드는. 비난의 의미는 아니다. 나도 게임 데

이터 팔아먹는 입장이니까.

거기에 생각해보면 모태 솔로 히어로 공익인 소희는 게임을 많이 하지 않을까? 약간 선입견 같긴 해도 원

래 게임은 남자들이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여기선 여자들이 잔뜩인거고, 소희도 운동 선수를 노리다 초

능력자가 되었으니 시간이 많이 비었을 텐데.

정신없이 액정을 내려다보고 작게 중얼거리던 김준희를 보며 소희에게 간단한 문자를 보냈다.

[누나 게임 좋아해?]

[ㅇㅇ 당연히 좋아하지. 여자 애들 중에서 싫어하는 애는 없을 걸]

[근데 왜 갑자기?]

[나 방송 탐]

[뭔 방송?]

“뭐… 상관없으니까 방송 출연비나 줘요. 방송 출현 요청하려던 거 아닌가?”

몇 초 만에 오는 빠른 답장에 마음을 먹었다. 심심했는데 방송에서 어그로 좀 끌고 놀다 게임기나 사서 소

희랑 해야지. 액정을 흘끗거리며 내려다보던 김준희가 기쁘게 소리친다. 뭘 노출이 안 되, 채팅 보면 생방

송 중 이구만. 허락을 받기 전부터 저러는 걸 보니 괘씸하긴 한데.

“네, 네? 네. 그렇죠!”

불쾌한 건 아니고 괘씸하다. 그러니까 골려 먹어야지. 슬쩍 아래를 향하던 카메라가 위로 올라와 우리들

의 얼굴 쪽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노래방 마이크 같은 걸 어디론가 치워버린 김준희가 소형 마이크를 건

넨다.

‘와, 이거 이름이 뭐더라? 개인이 쓰기에는 꽤 비쌀 텐데.’

“에이 누님들! 나 누군지 몰라? 그럼, 바로 OK 받았지~”

음악 방송 때 자주 사용하던, 목 깃에 붙이는 초소형 마이크를 보며 제품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동안

김준희는 자연스럽게 카메라 앞으로 나서 나를 가리고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카메라맨인지 매니저인지 모를 사람이 와서 마이크를 달아주려 했지만 내가 혼자 다는 걸 보고 머쓱하게

다시 뒤로 빠지는 여자가 한 명. 두 대의 카메라 중 하나만 돌아가기 시작하고, 몇 명의 사람들이 인파와

섞여 오락실 밖으로 향한다.

“어허, 누님들. 원 코인 올 퍼풱트로 진 엔딩을 본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데 화력이 좀 적다~ 뭐? 얍삽이?

꼬우면 아시죠? 여기 3구역 히어로 협회 인근 스타 랜드 오락실이야. 나는 내 눈으로 본 거 아니면 안 믿

어. 응~ 말로는 발가락으로 진 엔딩 봤지~”

시청자와 말다툼을 하는 척하며 그녀가 카메라를 완전히 가로막는다. 그러자 아까 마이크를 달아주려던

여자가 슬그머니 와서 스마트폰의 액정을 내민다. 오늘 컨텐츠는 오락실 탐방. 그냥 둘이서 오락실 게임

을 하면 되는 거고, 출현료는 50만원.

‘이야… 통이 크긴 크네.’

내가 직접 방송을 한다면 온갖 방법으로 시청자들의 돈을 빨아 먹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단순히 길 가던

게스트의 입장. 거기에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푼돈 가지고 귀찮게 협상하고 늘어질 마음은 없었다.

실력은 조금 검증되었더라도 고작 게임 같이 하는 것 만으로 50만원을 지불하는 걸 봐선 방송 규모가 꽤

큰가…. 생각해보니까 방송 규모가 크니까 게임 대회를 열고 매니저를 데리고 다니고 카메라를 2대씩 사

용하겠구나. 존나 멍청했네. 그러면 일단… 골려 주긴 해야지.

“아, 알았어, 알았어. 자자, 오늘의 게스트는… 어, 이름을 아직 모르네. 아 씨! 아직 통성명도 안 했는데

누나들이 자꾸 보채니까 그런거잖아! 원래 어! 막 통성명도 하고 이쁜 남자끼리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하

면서 하하호호 하면서 그림도 뽑고 그러고 나서 방송을 하는 건데!”

카메라가 나를 비추기 직전, 나는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었다.

[작품후기]

주인공은 관종입니다. 행동에 논리는 없고 그냥 재미있을 것 같으면 합니다.

오락실 기기 재패는 사실 제가 중딩때 하던겁니다. 학교에서 집에 오는길에 오락실 있었는데, 철권이나

리듬게임은 어려워서 그 펭귄겜이랑 스노우맨? 그런것만 골라서 진엔딩 볼때까지 도전하다... 용돈이 너

무 부족해서 컴퓨터 고전게임방 가서 엔딩보려고 죽자고 했죠.

근데 진짜 정조 역전에서 할 게 별로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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