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89)

휴식

한 달 내내 교회를 갔지만 건져낸 수확 없이 일상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아니, 생각해보면 이 잠잠한 일상이 평범한 건데 요즘 들어 이것 저것 뻥뻥 터지다 보니 아무 일 없는 날은

심심하다고 생각될 정도. 뒷골목에서 시작해 역강간범들을 먹고, 고등학생 2인조를 굴라로 만들고, 지하

도시에서 대충 백 명 정도 되는 조직을 만들어서 정보를 탐색하다 도시의 권력자랑 엮인 데다 수완 좋은

거대 조직의 보스와 엮였으니까. 심지어 테러 이후에 지하도시에 파견 보낸 두 굴라들은 김한나가 반쯤

쥐락펴락 하고 있어서 시비가 붙을 일도 없었다.

반파되었던 학교는 복구되었고,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은 떨어져 나갔으며 남은 학생들은 대부분 눈에 독

기를 가득 머금고 자기 할 일에 몰두했다. 그 때문에 전학 첫 날에 선배 뚝배기를 쪼개버린 파격적인 미남

전학생에 대한 관심도 싹 사라진 상태.

하긴 전학생이 선배를 폭행한거랑, 학교가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된 거랑 비교가 될 리 있나?

오전에 체력 단련하고, 점심 시간에 소희랑 밥 먹고, 오후에 이하린이랑 대련하고, 학교가 끝나면 장을 봐

서 저녁을 먹고. 심심하면 근처 PC방이나 오락실이나 지하 도시의 클럽으로 향하지만 별 다른 일은 없었

다. 왜냐하면…

“이봐, 거기!”

“아, 씨… 튀어!”

삑삑 거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일련의 무리가 내 앞을 확 지나간다. 찢어진 청바지에 화려한 티

셔츠를 입은 여자들이 달려가고 그 뒤를 여경들이 쫓아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히어로 협회의 코 앞에

서 테러가 일어났는데 경찰들이 멀쩡할 리 없다. CF도 찍고 드라마나 영화도 찍는 히어로를 욕할까, 아니

면 출동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포박만 도운 경찰을 욕할까?

“야, 저 새끼들 상습범이다. 잡아!”

그 결과가 이 꼴이다. 길거리에 쓰레기만 버려도 눈에 불을 킨 경찰이 와서 신분증을 요구한다. 높은 곳에

서 내려오는 내리 갈굼의 세례를 버티게 해주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실적이니까. 협회 내부에서도 고작

여자가 남자한테 번호를 요구하는 것 만으로도 직원을 호출할 수 있었지 않았던가?

지하 도시에서는 놀 곳이 클럽 밖에 없지만 거기는 되려 바깥 동네보다 치안이 확실하다. 자연스럽게 누

군가와 엮이는 일 없이 흘러가는 나날. 초능력 좀 생겼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동네 양아치들이 눈에 불

을 킨 경찰들에게 소탕 당하기만 하는데.

소란스러운 거리를 뒤로 하고 그대로 오락실로 향했다. 가상현실게임 속에서 고전 오락을 한다는 점에서

요즘 흥미를 느끼고 있으니까. 뇌파를 사용하며 오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가상현실게임 대신, 스틱과

버튼 네 개로 하는 고전 게임은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이쪽 세상에 떨어지기 전… 그러니까 원래의 초능력자고 마왕이고 없던 지구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세상

이었으니까. 수천개의 똑같이 생긴 원룸에 머무는 기초 노동자들부터 공장지구와 자연지구로 나눠 기계

적으로 돌아가던 무뚝뚝한 사회. 현실에서 여가를 즐기지 말고 가상 현실을 즐기라고 정부가 밀어주는

세상이었는데 이런 고전 오락기기를 가지고 있는 오락실이 있을 리 있나?

그래도 과학 기술이 꽤나 발전한 세상이라 그런지 오락실의 대부분은 증강현실 오락기가 차지하고 있었

다. 하지만 그런 애매한 기술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락을 즐기는 학생들의 무리를 지나쳐 오락실 구석

으로 향했다.

뿅뿅거리는 단조로운 소리와 함께 조악한 그래픽의 캐릭터가 움직인다. 얼굴부터 온 몸이 각진 캐릭터가

움직이는 격투 게임, 도트로 이루어진 전투기를 조작하는 슈팅 게임 등 다양한 고전 게임들. 평소라면 사

람이 거의 없겠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 묘묘선수의 공중 콤보, 하지만 토선생, 전부 막아냅니다!”

마이크를 들고 소리지르는 한 남자와, 연결된 두 오락기기를 한 자리씩 차지한 두 여자. 그리고 남녀 혼성

의 관객들. 오락실 특유의 소음이 가득하지만 이 구석에서는 사람들의 소음이 기계의 소음을 잡아먹고

있었다.

전문적인 방송은 아닌 것 같았다. 나름 어깨에 걸치는 커다란 카메라지만 그 외의 장비는 전혀 없었으니

까. 리포터로 보이는 남자가 든 마이크, 그리고 선수 한 명당 카메라 하나씩 해서 두 대의 카메라가 전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여든 사람들의 웅성거림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문득 호기심이 생겨 그 군중 사이로 파고들어가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본다. 오락기 위의 게임 이름으로 열

린 대회. 검색하자 마자 사이트 최상단에 바로 핫 링크가 나오는 걸 봐선 검색해본 사람이 꽤 되나보다.

대회 상금이나 대전표는 궁금하지 않아 그대로 유저 커뮤니티를 찾아 들어가 보았다. 오락실 게임에 관

련된 사이트에 게임 이름을 집어넣으니 무수히 많은 글이 떠오른다. 음… 초능력자가 판치고 뇌파로 즐

기는 게임 사이에서, 정확한 컨트롤을 볼 수 있는 격투 게임이라.

하긴, 초능력자가 작정하고 버튼을 누르면 1초에 100번 정도는 두드릴 수 있다. 그렇게 눌러 봐야 고전

게임기가 1초에 100번 펀치를 날릴 리 없고. 선수 두 명이 버튼을 누르고 레버를 툭툭 치는 소리가 마치

리듬 게임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버튼과 버튼 사이의 간격을 0.5초 단위로 맞춰야 하는 건가.

더 빠르면 인식이 안 되고, 더 느리면 콤보가 끊긴다. 단순히 빠르게 누르는 것이라면 그냥 초능력자가 이

기는 대회겠지만 여기는 실력과 리듬감, 그리고 캐릭터 이해도가 더 필요한 게임 대회. 그 때문에 규모는

적지만 인기는 꽤 있는 기묘한 대회가 성립된 것이다.

‘뭐… 그렇게 재미는 없네.’

하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이야 딱딱 맞아 떨어지는 폴리곤 캐릭터의 모습에 감탄하지만, 나는 그닥 흥미가

가지 않았다. 처음 10분은 재미있었지만 결국 버튼과 버튼 사이의 입력 간격이 전부 동일하다는 걸 알았

으니까. 하긴 고전 게임인데 당연한 이야기인가.

슬그머니 인파로부터 멀어져 구석 자리의 게임을 켰다. 어제 엔딩을 봤던 격투 게임이지만, 알고 보니 진

엔딩이 존재한다는 검색 결과를 봐서 오늘 다시 도전하는 것이다. 저기서 대회를 열고 있는 게임과 회사

가 같으니 이 게임도 똑같지 않을까? 시간을 때우기 위해 고전 게임 기계를 하나씩 정복하는 맛이 있었

다.

어제는 인터넷에 있는 기술 커맨드를 빠르게 눌렀다가 키가 씹힌 경험이 있지만, 오늘은 나름 선수들이

어느 타이밍에 누르는지 아니까 AI는 쉽게 잡겠지. 10명의 적을 무찌르면 보스가 나오는데 보스를 상대

로 10초 남기고 퍼펙트로 3연승이라, 무슨 변태 같은 조건이야.

탁탁탁, 아무런 생각 없이 버튼을 두드린다. 2초에 버튼 네 번 누르는 일이 최상급 흡혈귀에게 어려울 리

있나. 문제가 있다면 상대의 공격법을 몰라 가끔 한 두대를 얻어 맞아 체력이 깎인다는 점 정도.

하지만 이 또한 해결할 꼼수가 있었다.

상대가 어떤 공격을 하는 지 몰라 중간 중간 한 대 얻어 맞는다면, 그냥 공격이 제일 빠른 녀석으로 고르면

되겠지. 일부러 게임 오버가 된 뒤 다시 동전을 집어넣는다.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소년이 치맛자락

을 들어올리며 인사를 하는 모습에 조금 비위가 상하지만…

‘아 존나 구세대 야겜 같네.’

상체에 마이크로 비키니만 입은 근육질의 여성 캐릭터나 헐렁한 도복을 입어 가슴골이 다 보이는 여성 무

도가라던가. 옆에서 대회를 진행중인 게임의 후속작이여서 그런지 어색한 폴리곤을 벗어난 캐릭터라 더

욱 그렇게 느껴진다. 주변에 사람도 많은데 상체 노출한 여캐가 등장해서 끼야아아악! 하고 과장된 비명

을 지르니까 기분이 이상해.

뭐… 오락실에 있는 사람들은 가슴과 배를 드러낸 여자보다 내가 조종하는 소년 캐릭터의 속바지에 더

환장하겠지만. 게임에 대해 아는 거라곤 진 엔딩을 보여주는 12번째 보스의 등장 조건과, 이 캐릭터의 기

본 콤보 하나뿐이라 조금 지루한 작업을 하는 기분이었다. 거지 키우기처럼 그냥 액정을 다다다다 누르

는 기분.

게임 진행을 거의 작업처럼 진행했다. 3, 2, 1! 하는 카운트 다운과 동시에 레버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약발 버튼. 이 게임에서 가장 발동이 빠른 짧은 로우킥이 나가면서 원피스 소년 캐릭터의 기본 콤보를 이

어 나간다.

딱,딱,딱,딱,딱!

로우킥으로 상대를 휘청거리게 만든 소년이 그대로 돌려차기를 연속으로 먹인다. 과도하게 펄럭이는 원

피스 너머로 속바지가 나풀거리고, 얻어 맞는 차이나 드레스의 소년이 허벅지를 노출하며 공중으로 떠오

른다.

“히야아압!”

“아아아악!”

기본 콤보 답게 타격 횟수도 적고 체력도 35%밖에 깎지 못하지만, 상대가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똑같이

콤보를 반복한다. 일어난 적 AI가 사거리 안에 있는 나를 공격하려 들지만, 결국 내 캐릭터의 약발이 가장

빠르기 때문에 동시에 콤보를 시작하면 내 콤보만 진행된다.

한 캐릭터당 2승씩 거두면 스테이지가 클리어니까, 나는 이 버튼 누르는 작업으로 10캐릭터 20라운드…

60번만 병신같이 남자 치맛자락 아래를 보면 되네. 음소거 기능은 없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니 순간 현자타임이 몰려와 집에 가서 소희랑 침대에서 뒹굴까 싶었지만 참아냈

다. 고전 게임에도 이스터 에그와 진 엔딩이 숨겨져 있다 길래 어제 검색만 1시간동안 했는데.

“와, 지금 콤보 정말 깔끔하네요!”

그렇게 진 엔딩 보스 얼굴을 한 번 보기 위해 게임을 진행하는 와중, 등 뒤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

다.

[작품후기]

남녀 역전물 하나가 투데이 베스트에 하나 올라왔더라구요.

근데 그거 말고 없음...

역시 마이너 장르가 취향인 변태들은 참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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