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89)

비둘기들

아무튼 다양한 모드가 있겠지~ 라고 생각을 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초능

력자야 주구장창 TV에 나오고, 학교는 1주일에 5일씩 강제로 가는데다 집에 있는 마누라가 용사였으니

별 생각은 들지 않지만.

물론 천사 vs 악마 모드는 조금 다르다. 초능력자가 대놓고 사회에 침투하는 히어로 vs 빌런 모드, 혹은

세계의 운명을 걸고 용사와 마왕이 전쟁을 벌이는 영웅 vs 마왕 모드는 은밀함 따윈 없지만, 천사 vs 악마

모드는 정 반대로 계약자들이 숨어 사는 은밀한 모드였기 때문이다.

“교회? 주말에는 나가기도 싫다면서.”

“에이, 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협회 구경을 가는 거죠.”

주말 일찍 일어나 협회의 교회로 향하자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소희였지만 어젯밤의 피로를 다 떨쳐내

진 못했는지 하품을 하며 배웅을 하더니 그대로 침대에 틀어박혔다. 섹스를 하면 피로를 느껴야 하지만,

용사의 피는 고작 하룻밤의 성교로 얻은 피로를 날려버리고도 넘쳤기 때문에 나는 멀쩡했고.

“하긴… 너 지난번에도 예배 시간인데 카페 사진 보내더만. 잘 다녀오고, 단말기에 돈 보내 놨으니까 맛

있는 거 있으면 사 와.”

“네네, 다녀오겠습니다~”

주말에도 격주로 근무를 나가는 불쌍한 초능력자 공익이기 때문에 고리타분한 교회에 끌고 갈 생각은 없

었다. 그저 몇 번 교회 예배 시간에 카페나 음식점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니 잿밥에 더 관심이 있다고 알

아서 착각하게 만들면 끝.

아이돌 사업에 가까운 히어로 협회의 모습 상, 본부에는 성당을 비롯한 온갖 편의 시설이 모여 있다 보니

핑계를 만들기는 쉬웠다. SNS에서 핫한 카페부터 방송까지 탄 맛집까지 있으니 이게 히어로 협회인지

거대 아울렛인지 모를 지경.

하지만 그 개방된 모습 덕분에 천사 세력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마시는 카라멜 마끼아또에

도, 옆 자리 여자가 먹는 조각 케이크에도 지나다니는 관광객 손에 들린 타코야끼에도 전부 신성력이 담

겨 있으니까.

노림수는 잘 모르겠지만 이 녀석들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신앙심을 때려 박고 있었다. 효율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성수도 아니고 먹거리에 신성력을 백날 천날 담아봤자 없었던 신앙심이 생기고 신을 찾는 건

아니었으니까. 지난번 클럽에서 마셨던 피 처럼 무의식 속에 주기도문이나 성경 내용을 넣는게 전부.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이 주기도문이나 성경 구절을 조금 기억한다 해서 착해지는 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궁금해졌다. 신성력이 어디서 무한대로 솟아나오는 자원이 아닌데 이렇게 효과도

보지 못할 방식으로 펑펑 사용하는 이유가 뭐지? 천사라고 반드시 착한 건 아니고 악마라고 반드시 나쁜

건 아니다. 게임 하다 보면 천사가 흑막이고 악마랑 손잡는게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얘들이 좋

은 의도로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건지, 나쁜짓 하려고 밑밥을 까는 중인지 짐작이 안 가.

쪼오옥, 빨대가 공기를 빨아들이며 후르륵 소리를 낸다. 작은 사이즈에 12,000원이라는 양심이 사라진

가격의 카라멜마끼아또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신성력이라는 놈은 축복. 축복 받

은 음료수가 맛이 없을리 있나. 괜히 SNS에서 핫한 추천 맛집들이 있는게 아니다.

“저, 저기!”

세 잔을 연거푸 마셔서 한 잔을 더 주문 할까 말까 고민하며 빨대로 얼음을 달각거리는 사이 옆에서 우렁

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는 다 좋은데 이게 문제야. 핫플레이스다 보니 SNS를 목적으로 남자가 잔뜩

오니, 그에 따라서 여자도 잔뜩 있었다. 물론 협회가 코 앞이라 선을 넘는 놈은 없지만…

“번호 좀 주시겠어요?”

“싫어요.”

쪼오옥, 빨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고 무인 계산기에서 아이스 라떼 하나를 더 시킨다. 벌써 네 잔째. 미약

한 신성력이라 해도 이 정도 중첩되면 어느 정도 효력이 있다. 사람한테는 효과가 거의 없겠지만 내 종족

은 흡혈귀니까.

‘이쯤 되면 혀가 아파야 하는데.’

용사의 피를 마셔서 그런지 진화를 해서 그런지 신성력이 친근하게 받아들여진다. 어디의 중2병 컨셉 캐

릭터도 아니고 빛과 어둠을 동시에 사용하는 비효율의 극에 달하는 느낌. 뭐 쓰는게 아니라 약점 하나가

사라지면 이득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차가운 커피잔을 받아 드는 순간 누군가 길을 가로막는다.

“저, 저기요! 번호 좀 주세요!”

“싫다니까?”

물론 협회의 선은 넘지 않는데 내 선은 사정 없이 넘어버리는 년들도 존재했다. 학교에서는 악명이 더 높

아 이런 고백 어택을 받지 않았지만 지금은 혼자 카페에 있는 미소년 A일뿐이니까. 결국 껄떡대는 애들이

들러 붙을 수 밖에 없다.

새빨개져서 씩씩거리는 앳된 얼굴의 여학생의 뒤에는 낄낄거리는 일행이 보인다. 뭐 벌 게임이라도 하는

건가. 그런데 원래 세상의 남학생들이 무리 지어서 카페를 다니나? 협회에 볼 일이 있어서 그냥 들린 걸

까?

“아니 그러지 말고…”

앳된 얼굴이지만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딱 20대 초반의 꾸미는게 어색한 여자 사람. 막말로 말하자면 자

기 관리가 부족하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야 그럴게, 헐렁한 후드 집업 너머로 느껴지는 육체는 그닥

관리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초능력자처럼 달달한 향을 풍기는 것도 아니고, 천사의 계약자처럼 신성력이 은은히 느껴지는 것도 아니

다. 적당히 똥배가 나오고, 적당히 관리한 평범하기 그지 없는 여성의 무리. 대체 무슨 용기로 말을 걸어

오는지.

“아니, 이 씨…”

“거기까지만 하지?”

와, 씨 소름 돋았어. 나를 보고 숙덕거리던 여성의 무리보다 훨씬 예쁜 여성이 내게 뻗어오는 손목을 붙잡

아 멈춘다. 날카로운 눈매에 단발머리. 주변에서 흔히 보기 힘들었던 보이시한 미녀였다. 카페 안의 시선

이 집중되고,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 약하다고.

차라리 연단 위에서 제국을 위한 연설을 하거나, 강호의 모든 이들을 위한 사기 진작을 하고 말지. 이런

청춘 로맨스물 같은 대사는 적응이 되질 않는다. 슬금슬금 발을 옮겨 탁자의 그림자를 밟는다.

“남자한테 함부로 대하는거 아니-“

“넌 뭔-“

슈우욱 소리와 함께 시야가 바뀐다. 어느새 카페가 아닌 협회 골목길 하나에 서 있고 눈 앞에는 창고의 문

이 보인다. 슬그머니 기감을 끌어 올려 주변의 소동을 감시해 보지만 나를 쫒아 오는 무언가는 없었다. 협

회 답게 이곳 저곳에서 초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인가.

‘적어도 천사 애들이 나를 감지하지는 못하네.’

용사의 피를 먹은 초능력자 흡혈귀.

이 경우에는 천사들이 나를 평범한 초능력자라 생각 할지, 아니면 악마의 하수인 취급할지 궁금했는데

그 궁금증이 풀렸다. 적어도 혈마법이나 지옥 마법을 대놓고 쓰는게 아닌 흡혈귀의 종족 스킬만 사용하

면 들킬 일은 없겠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는 와중 누군가 접근해 오는게 느껴졌다. 두리번거리다 이 쪽을 바라보고 눈이 마

주치니 똑바로 직진해 오는 남성. 검은 양복에 초능력자 협회 뱃지를 차고 있는게 보여 얌전히 기다렸다.

“어… 저기, 학생?”

“네?”

들고 있는 태블릿을 슬쩍 내려다 보던 남자가 말을 이어나간다. 몸에서 느껴지는 신성력은 매우 미약한

걸로 봐서는 천사 쪽 인물이라기 보단 협회 내부의 식당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 같아서 순순히 따르기로

하고.

“아무리 협회 내부라 해도 등록하지 않고 마음대로 능력을 사용하는건 금지야. 방금 공간 이동 관련된 초

능력 사용하지 않았니? 잠시 신분증 좀 볼 수 있을까?”

그 말에 얌전히 손목을 내밀어 학생증을 띄웠다. 태블릿 PC를 손목의 기어에 대니 삐빅 소리와 함께 내

학생증이 떠오른다. 초능력 등급과 초능력의 내용, 그리고 신원보증인에 소희와 이하린의 이름까지.

“어… 신분은 확실하네. 그래도 등록 하지 않은 상태로 막 사용하면 안된다?”

“네, 죄송해요. 어떤 여자가 자꾸 카페에서 달라 붙어서…”

고개를 슬쩍 숙이고 말꼬리를 늘리자 남자의 목소리가 누그러든다.

“아… 요즘이 스카우트 시즌이라 철 없는 애들이 많아서 그래. 초능력자로 인정 받았다는 생각에 이 남자

저 남자 찝적대는 여자애들이 많으니까 조심하렴. 원래는 벌금이지만… 같은 남자끼리 이 정도는 봐줄

수 있지.”

띡 띠딕 소리와 함께 태블릿 PC가 줄어들어 남자의 손목에 달라붙는다. 저건 되게 편리해 보이는데. 다

음부터는 근처에 있는 직원 호출 벨을 누르라는 소리와 함께 사라진 직원. 협회는 생각보다 엄격하구나,

하고 생각을 하는 와중에 문자가 왔다.

[하늘아 이거 뭐야]

[너 왜 협회에서 주의 문자가 와]

[야 협회에서 한 판 떴냐?]

[무슨 일 있어?]

[누구랑 싸웠냐 나랑도 싸우자]

띠링 띠링 연속으로 울리는 문자. 아 씨발, 보증인한테 문자를 보냈나. 다급하게 걸려오는 전화에 나는 소

희를 달래주고 이하린에게 ㅗ 라는 한 글자만 보낸 뒤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맥주... 아 씨, 소

희 신분증이 없구나.

[작품후기]

조별 과제가 생기니 글이 주간지가 되어버렸네요. 그래도 3일에 한 편은 쓰고 싶긴 한데

모드는 더 늘어난다는게 아니라, 원래 있던걸 주인공이 겪게 된다는 소리입니다.

1. 아카데미물(고등학교)

2. 히어로 vs 빌런(소희와 이하린)

3. 천사 vs 악마(히어로 협회)

4. 용사 vs 마왕(아직 안나옴)

이 네 가지를 겪을거고 이상 안늘어날겁니다.

저 네 가지만 해도 나올 수 있는 속성은 무궁무진하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