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89)

뜨거운 여자

전소희, 마왕의 목을 벨 영웅. 하지만 성격은 소시민이다. 소심해서 싸우지 않는다- 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녀는 영웅이지만 정의의 사도는 아니다. 만약 그녀가 정의의 사도라면 학교 테러 당시에 내 목을 베고

테러범을 제압해 시민들을 구조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연인인 나를 보호하고 숨어 있는 것을 선택했다.

백아영, 썩어빠진 협회를 타도할 히어로. 성격 또한 정의롭다. 피를 마셔서 엿본 기억으로는 고지식한 반

장 캐릭터라 볼 수 있는 여성.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부터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까

지 전부 아니꼽게 바라보는 FM중의 FM인 여성.

다만 소희는 각성을 한 뒤 내게 힘을 나눠줘서 능력치가 내려가지 않았지만, 백아영은 제대로 각성하기

전에 내게 흡혈을 당해 잠재 능력을 내게 빼앗겼다. 그러니 모드 3개의 메인 NPC를 내가 먹어 치운 것이

다.

‘이게 게임이냐?’

게임일까 아닐까? 고민을 해 봐도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아 미뤄뒀던 고민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그래서

이게 게임이야 아니야? 사실 나는 통 속의 뇌고 미친 과학자가 자기 꼴리는 야겜을 만드는 거라면? 반대

로 나는 통 속의 뇌가 아니고 진짜 인생을 여기서 말아먹는 중이라면?

과학자님 저는 거유랑 누님이 좋아요!

1년의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대충 1학기 초에 이 동네에 떨어져서 이제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라고.

그런데 메인 NPC가 셋? 다른 게임을 할 때는 거의 3년에 한 명 스쳐 지나가면서 얼굴만 봐도 많이 봤다

싶었는데.

확률로 치면 그런 거다. 아파트에 사는데 윗집에 여자 배우가 이사 오고, 앞 집에 남자 개그맨이 이사 오

고, 학교에 등교했더니 짝궁으로 아이돌 그룹이 전학을 오고. 별 말도 안되는 설정이라 어지간한 팬픽에

서도 사용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지금 내가 겪는 현실이 그랬다.

길 가다 꼬신 여자가 용사에, 전학을 간 학교에서 메인 NPC랑 같은 반 옆자리가 되었고, 저녁에 산책하다

목격한 백아영도 영웅이다. 현실성이라는 방패로 불친절함과 좆같음을 강요하던 과거와 너무 다른 모습.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그 100배율이랍시고 파일 보낸 새끼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 뭘 할

수 있겠어.’

사실상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인생을 즐기는 것이다.

지금처럼.

콧대를 조금 낮추고 눈꼬리를 축 쳐지게 한 다음 눈 밑에 점을 하나 찍는다. 얼굴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해

도 성형수술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눈매만 어루만지는데, 그 것만 해도 효과가 대단하다. 어느 정도로 대

단하냐면 옷을 갈아 입으니 클럽 가드들이 나를 못 알아볼 정도로.

초저녁도 되지 않은 오후 4시인데 클럽은 벌써부터 쿵쿵거리는 EDM음악이 울려 퍼지고 조명이 번쩍거

린다. 인질들 상태를 보려고 주말 점심부터 놀러 간다는 핑계로 집에서 나왔으니 밤만 새지 않으면 되겠

지. 1층이 사람으로 가득 찰 정도로 북적이던 클럽은 드문드문 빈 자리가 보였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여성이 이 쪽에 추파를 보내지만 외모가 맘에 들지 않는다. 되려 그녀가 든 병맥

주에 관심이 쏠렸지. 김한나에게 클럽에서 놀고 싶다는 핑계로 받은 팔찌를 자판기 닮은 기계에 들이대

니 병뚜껑이 제거된 시원한 맥주가 기계손에 들려 서빙 된다.

‘맥주 맛이 좋긴 좋네.’

주말 점심부터 할 일도 없는지 빈자리 조금을 제외하곤 꽉 찬 클럽은 조명의 열기와 사람의 체온때문에

꽤 후끈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새하얀 김이 폴폴 올라오는 병맥주는 반갑기 그지없었고. 생각해보면 이

지하 도시에 정상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적을 테니까, 다들 약 빨고 술 빨고 그러다 남자 물건도 빨아보

려고 클럽으로 오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드니 2층과 3층은 텅텅 비어 있었다. 하긴 지하 도시에서도 상류층인 돈 많

고 권력 잡은 양반들이 이 시간에 클럽에서 뛰어놀겠어? 자기 저택에서 애인 끼고 노는 게 덜 시끄럽고 편

하지.

맥주를 마시며 1층 스테이지 근처에서 구경을 하고 있으니 시선이 조금씩 모이는 게 느껴진다. 안 그래도

수가 적은 남자인데 그 외모가 아름답기까지 하면 당연한 결과. 더군다나 눈매 또한 순둥하게 내려가니

만만해 보이기도 하겠지. 얼굴 커마에 능숙하지 못해 아는 얼굴이라곤 고양이상과 강아지상 밖에 없는

내 탓이었다.

다 마신 맥주병을 내려놓고 슬그머니 스테이지로 올라갔다. 번쩍거리는 조명이 1초에 몇 번씩 시야를 가

리고 얼마 없는 남자들을 중심으로 여자들이 몰려들어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춤이라고는 무도회장에서

춰본 게 전부라 리듬에 맞춰 몸을 까닥거리고 있지만, 그에 호응하듯 우르르 여성들이 몰려든다.

음악 한 곡 바뀌기 전에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들 사이에 둘려 쌓여 있는 상태. 호기심에 얌전히 몸을 맡겨

보니 여자들이 마치 구애를 하듯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그 와중에 음흉한 손길은 없는 것은,

이 곳이 지하 도시라 총에 맞기 싫어서일까? 그래도 밀착해서 춤을 추니 부드러운 가슴이 팔뚝과 등에 몇

번이고 와 닿았다가 떨어져 나간다. 남녀역전세계, 여성의 가슴에는 그닥 성적인 의미가 없어서 그냥 닿

았다~ 정도의 의미인가?

필사적으로 몸을 비비는 여성들의 모습에 가슴 한 켠에서 우월감이 솟아오른다. 하긴 그러라고 있는 게

임 아닌가. 남들보다 잘나고 싶어서, 깔보고 우월감을 느끼며 짓밟고 싶고. 겸사 겸사 성욕도 채우고.

어지러운 조명 속에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본다. 사실 외모는 눈에 차지 않는다. 현실이었다면 어

지간히 번호도 따이고 고백도 받을 미녀들이지만 여기는 게임을 기반으로 한 세상. 동네 공익이던 소희

도 어지간한 연예인 뺨 치는 외모를 지녔고, 방금 전까지 가지고 놀던 백아영도 협회 말만 잘 들었다면 연

예계 데뷔를 할 수준.

그러니까 지금 노리는 건, 조금 수수해 보이는 여자.

능숙하게 빙빙 돌면서 마치 검진 마냥 자리를 바꿔가는 여성들 사이에서, 쭈뼛거리며 겉도는 한 사람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여긴 지하 도시. 몇 번이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자판기에서 맥주랑 같

이 마약을 파는 동네다. 콘돔 대신 마약을 사서 섹스를 하는 동네인데, 고작 클럽에서 남자랑 몸 비비는

게 어색한 여자가 있다?

최소 이벤트, 최대 특수 NPC겠지 뭐.

정말 총 맞기 싫었는지 나를 둘러싼 열댓 명이 걸음을 옮기니 그대로 갈라져서 길을 열어준다. 하기야 클

럽 말고 욕구를 풀 곳이 잔뜩 있는데 여기서 시비가 붙어서 총에 맞거나 초능력에 지져지면 얼마나 서글

프겠어.

염색 없는 검은 생머리에 새하얀 피부. 가까이서 보니 외모도 꽤 예쁜 편이었다.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두

리번 거리는 모습이 보호 본능을 일으킨다 해야 할까? 슬그머니 몸을 밀착하니 얼굴이 뻘개지더니 몇 걸

음 옮겨 조금씩 멀어진다. 나름 리듬에 맞춰 자연스럽게 도망치려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이 마치 마네킹이

걸어가는 것 같았다. 인형술사가 만든 1레벨짜리 목각인형도 쟤보다는 멀쩡하겠네.

“어, 어엇?!”

“어딜 도망치려고?”

하지만 여기서 그냥 보내줄 리 있나? 나는 지금 심심하다고. 그녀의 팔목을 잡아채 질질 끌고 나가자 사

람들이 우르르 길을 비킨다. 웅성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EDM사이에서 들린다. 치한인가? 와 화끈한데.

여자가 먹히나? 등등. 성별이 반대가 되니 사람들은 남자인 내가 하는 일은 어지간해서 말리지 않는다.

왼 손으로 그대로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고 잡아 끌어 스테이지 밖의 자판기로 나왔다. 삑 소리를 내며 다

시 병맥주 두 개가 그대로 기계손으로 서빙 된다. 맥주 하나를 붙잡고 내가 끌고 온 여자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본다.

눈도 땡그랗고, 코도 오똑하다. 어리둥절해서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가 마치 상황 파악을 못하는 강아지

같다. 나쁘게 말하자면 어벙해 보이지만, 새하얀 피부와 그럭저럭 괜찮은 외모가 먹히니 백치미로 보이

는 상황.

“저기… 사람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

“아닌데요. 그냥 마셔요.”

병맥주를 내미니 그대로 양 손으로 받아 드는 그녀. 어색하게 마주보는 상황에서 도망 칠 배짱도 없는지

마실지 말지 고민하길래 내 몫의 맥주를 병째 들이켰다. 쿵쿵거리는 음악도 질리는데, 그냥 모텔로 바로

데려가서… 아니지.

“이 시간부터 클럽에 온 건 놀러 온 거죠?”

“그, 그렇죠?”

어색하게 하하, 웃는 그녀를 다시 데려간다. 손을 잡으니 마치 도축장 끌려가는 소처럼 반항 없이 걸어오

는 게 마음에 들었다. 험한 일은 안 하는지 팔목도 가느다랗고, 지금 잡은 손도 부드럽네. 뭘 하는 여자려

나. 그건 이제 알 수 있겠지.

“야, 삼층 룸 비었지?”

“… 아, 그렇습니다!”

팔찌를 들이대며 계단에 있던 경비 중 얼굴이 낯익은 녀석에게 물어보니 몇 초 멍하니 바라보다 순순히

위로 안내한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니 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봐선 어디 높으신 곳 아가씨

는 아닌가.

뭐, 침대에서 물어보면 되겠지.

[작품후기]

와 클럽!

사실 작가는 클럽갔다가 담배 연기 때문에 알레르기성 비염 때문에

10분만에 눈 뻘개지고 코 막힌 상태로 쿨럭거리며 퇴장해서 잘 모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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