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89)

뜨거운 여자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히죽 올라간다. 마셔도 마셔도 끝 없이 흘러나와 입 안

가득 채워주는 달짝지근한 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성욕보다 식욕이 앞서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너, 너… 무슨… 끄으응,”

미약하게 바둥거리는 몸을 힘으로 찍어 누르고 그대로 팔을 깨물어 피를 빨아들인다. 평범한 사람, 아니

초능력자도 죽었을 정도의 양을 흡혈했지만 밑에 깔린 빨간머리 여성의 안색은 창백하기는커녕 팔팔하

기 그지 없었다. 마치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튼 것 같은 느낌. 무한대로 나오는 음료수라니 얼마나

달콤한 이야기인가.

“아, 이거 맛있네 진짜.”

마치 따듯한 코코아를 홀짝 마시는데, 잔에 있는 양이 줄어들지 않는 기분이 든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

짝지근한 풍미. 그녀 내부에서 올라온 열 때문에 피도 다른 사람보다 뜨거운 것 같고. 달고 따끈따끈, 진

짜 코코아네.

다시 한 번 기절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슬금슬금 손이 움직인다. 격렬하게 한 번 하면서 사슬을

다 잘라 놨으니 거동에 불편함은 없겠지. 부드러운 손이 슬그머니 올라와 내 엉덩이를 건드린다. 꿈이라

고 생각하는 건지, 일단 알몸의 남자가 있으니 만져보는 건지.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머리통 세 개를 달고 다니는 폭유 글래머를 침대 삼아 올라탄 상태인데 고작

손장난 하나 못 참을까.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정보창을 읽어보니 왜 이렇게 피가 달콤한지 설명이 써 있

다.

자잘한 설정은 RPG의 클리셰를 닮았으니 넘어가고…

요컨대, 내 밑에 깔린 빨간 머리는 일종의 영웅이었다.

초능력 협회의 단순한 히어로(영웅) 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썩어서 부패해가는 히어로 협회에 반감을 가

진, 찐또배기 영웅. 아마 내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부패한 히어로 협회를

뒤집어 엎고 제 2의 히어로 전성기를 불러 일으켰어야 할 NPC. 물론 확정이 아니고 확률로 그럴 수 있었

다~ 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지.

“이야… 히어로라는 사람이 미성년자 엉덩이를 이렇게 만져도 되나?”

“크, 이 이건!”

마취 주사라도 맞은 것 마냥 소심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딱 굳어버린다. 이 여자랑 만난 덕분에 꽤 많은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일석 이조… 아니 삼조 정도 되려나. 양질의 피도 흡수하고, 폭유도 가지고

놀고, 정보도 얻고.

“부패한 히어로 협회가 히어로가 권력자들의 성 접대에 사용하는게 싫어서 들고 일어난 주제에, 손가락

은 솔직하고~”

“그걸 어떻게 알았어?!”

퉁, 그녀의 상체가 벌떡 일어나려는 것을 가슴을 눌러 제어한다. 억지로 일어나는 힘과 누르는 힘이 가슴

에서 만나자 가슴이 이리 저리 찌그러지는게 보인다. 마비가 덜 풀려 안감힘을 쓰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

다 보며 한 손으로 이리저리 가슴을 휘두른다.

“뭐, 상상하는 것 처럼 내부의 배신자 그런 건 아니니까 그냥 누워 있어요.”

“그럴, 수, 있겠냐?!”

삐이익, 아주 작게 증기 끓는 소리가 나더니 엉덩이 밑이 더욱 뜨겁게 달아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자

한 손으로 억누르던 그녀의 상체가 조금씩 올라오더니 내 팔뚝을 양 손으로 붙잡는다. 일그러진 얼굴에

는 다급함이 가득.

흡혈당해서 잠재능력을 쭉 빨아 먹힌 상태로, 강간까지 당해서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을텐데 억지로 일어

나는 모습에서 그녀가 가진 재능과 능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라 봐야 하지 않을

까?

“대답, 해!”

“저기요, 누나.”

메인 시나리오의 NPC들은 매우 출중한 능력을 자랑한다. 마왕의 목을 딸 소희는 말할 필요도 없고, 고작

해야 아카데미물의 청춘 로맨스물의 주인공인 강정태 패거리도 고등학생인 주제에 현역 히어로와 비벼

볼 수 있는 수준.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솔직하게 대답을 해 주겠어요? 어린 남자애 밑에 알몸으로 깔려서 아둥바둥 발버

둥밖에 못 치는 주제에.”

“이, 개새끼가!”

화르륵, 엉덩이 피부가 따끔하게 당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화상을 입은건가. 하지만 순간적으로 뿜

어낸 화력으로도 내 구속을 풀지는 못 했다. 용사의 피를 마신 흡혈귀의 육체가 피를 마시고 만전의 상태

로 있는데, 몸 상태가 안 좋은 상황으로 어떻게 반항을 하려고.

내 밑에서 정신 못 차리고 바둥대는 이 여자도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긴 했다. 주인공 답게 초능력이 두 개

나 있는 것이다. 열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발전소와 같은 능력과 그 열에너지로 자신의 신체 능력을 강화

하는 능력.

열에너지만 만들 수 있었다면 몸이 뜨거운 격투가일 뿐, 화염 계열 능력자의 발 끝도 못 따라갔겠지. 반대

로 열에너지로 신체를 강화할 수 있었다면 싸울수록 체온이 내려가 평범한 사람보다 못한 초능력자가 되

었을 거고.

하지만 두 개의 능력이 시너지를 이뤄 초능력 등급과 어울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졌으면 뭐 어쩌

겠는가. 이미 내게 피를 빨렸는데. 그러고 보니 과식을 한 기분이 드는데. 용사, 영웅, 학원물의 주인공.

과도한 잠재력을 지닌 사람을 식사한 게 너무 많다. 덕분에 알고 있던 진화 체계는 꼬인지 오래. 주인공 3

인분의 피를 마셔본 적은 게임을 할 때도 없었다. 그래, 게임을 할 때도.

“쉬이- 푹 자요. 서류를 훔쳐가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이게, 무슨?”

바둥거리다 힘이 빠지는지 또 다시 눈이 뒤집혀 기절하려는 백아영을 그대로 눕히고 그 출렁이는 가슴 사

이에 그녀가 소중히 챙겼던 서류를 올려놓았다. 이미 사본은 챙겨놨으니 상관 없겠지. 고민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졌다.

문이 열리고 구울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필요한 것은 백아영 한 명뿐. 나머지는 이제 쓸모가 없으니 처분

을 해야지. 한 번만 더 피를 마시려 했지만 낯빛이 너무 창백해 그만두었다. 어쩔 수 없지. 거의 리터 단위

로 마신 거 같은데.

“너무 많이 마셨나?”

히어로 협회에는, 히어로가 없었다. 적어도 백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으… 머리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일어나며 그녀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썩어 빠진

히어로 협회,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히어로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그런 히어로들을 욕할 마음은 없었

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니까.

히어로 협회에 들어가기 전 까지만 해도, 그녀는 무능력한 히어로는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히어

로면서 저렇게 나태할까, 저렇게 무능력할까.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빌런을 잡고 범죄자를 잡아서

사회 평화를 위해 뛰어야지.

하지만 고작해야 D랭크 이하의 ‘발열’ 능력을 각성한 그녀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히어로 협회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어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가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 또한, 어쩔 수 없이

순응했다는 사실을.

어린 초능력자들은 특별 교육기관으로 향한다. 그렇게 졸업한 학생들과 막 각성한 성인 초능력자들은 공

익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집 해제와 동시에 히어로 협회로 향한다. 어쩔 수 없는 일

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상에는 그 길 밖에 없었으니까.

사회에는 초능력자에 대한 차별이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초능력자면서 왜 우리 회사에 지원하셨죠? 히

어로 협회로 가도 되지 않나요? 어째서 히어로가 되지 않고 이 길을 선택했나요? 히어로는 돈을 잘 버는

데 왜?

백아영은 히어로 협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아주 어릴적 초능력을 각성해 유치원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초능력자 학교만 다닌 여성. 대기업에 붙

었지만 갑자기 각성한 초능력으로 5년 공익 생활을 하게 되어 강제 퇴사 처리된 남성. 고시에 붙었지만

초능력 때문에 초능력 관련 부서로 강제 이전된 여성.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

아이러니하게도 히어로 협회에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히어로가 거의 없었다.

강제로 꿈을 포기하거나, 태어날 때부터 하나밖에 없는 길을 걸으니 열정적으로 자발적으로 뛰는 사람이

있을 리 있나. 그나마 받는 돈이 꽤 되는 편이고 히어로가 아이돌처럼 취급 받다 보니 인식이 좋은 편이라

참고 하는 거지.

그렇게 아랫물은 고였다. 그렇다면 윗물은? 당연히 썩었다.

히어로가 스타들의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예능부터 영화, 드라마, CF와 성우 등 히어로 협회는 돈방석이

아니라 돈을 찍어내는 기계 위에 앉았다고 봐도 좋았다. 성접대와 뇌물이 오가고 온갖 욕망이 휘몰아친

다. 유명해 지고 싶다, CF스타가 되고 싶다, 초능력자를 안아보고 싶다.

물론 최전선에서 빌런과 필사적으로 싸우는 히어로도 있다. 비율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아서 문제지. 그

렇게 속에 불만이 쌓이고 쌓이다 그녀가 알게 된 공공연한 비밀 하나.

무법지대인 지하 도시의 범죄자들과 손을 잡은 히어로 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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