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어두컴컴한 시야가 나를 반긴다. 피부에 와 닿는 습기, 어렴풋이 들리는 물
방울 떨어지는 소리, 어두운 시야와 쿱쿱한 공기. 아마 지하실인가? 육체를 점검하기 위해 사지 끝자락부
터 조금씩 힘을 줘 보니 이상은 없었다. 다만 묶여 있을 뿐.
‘…여긴, 어디지?’
눈이 점차 어둠에 적응을 하자 어렴풋하게 지하실의 풍경이 보인다. 자신처럼 널브러져서 쇠사슬로 묶여
있는 여성들. 익숙한 얼굴은 아니지만 기절하기 전까지 싸웠던 상대를 까먹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
다.
전문적으로 인질을 가둬 둔 적은 없었는지, 아니면 많은 인원을 옮기느라 문제가 있었는지 잘 지어진 감
옥은 아니었다. 철장도 자물쇠도 없이 휑한 지하실 이곳 저곳에 수갑이나 족쇄를 차고 묶여 있는 상황이
니까.
‘나를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했나? 아니면 부상 때문에?’
다만 다른 여성들은 팔이나 다리 중 하나에만 매달려 있지만, 나는 사지가 전부 묶여 있는 상황. 주변을
둘러보니 참 대충 구속해 놨다는 생각이 든다. 낡은 학교 책상에 허리가 묶인 상태로 누워 있는 여자, 벽
에 있는 파이프에 양 손이 하나로 모인 상태로 묶인 여자, 양 다리가 벌려지도록 기둥에 묶인 여자. 허술
하기 그지없는 구속구에, 자세 또한 어정쩡해서 조금만 힘을 주면 구속에서 풀려날 수 있어 보였다.
“크, 끄아악?!”
그렇게 판단하고 힘을 주자 심장 어림에서부터 뜨거운 불길이 올라온다. 육체를 달궈주고 강화시키던 그
뜨거운 기운과는 다른, 끔찍한 고통. 마치 끓는 물을 실수로 삼켜버린 것처럼 내장이 달궈지는 기분이 든
다.
“아아, 아아악! 씨바-알!”
심장에서 손끝 발 끝으로 퍼져 나가는 화끈한 통증. 깨어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꿈지럭 대며 천천히 움
직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수준의 고통이었다. 고통이 가시고 숨을 몰아쉬자 허벅지에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모르는 사이에 울고 있었나?
비명 소리를 들었는지 가벼운 발소리가 들린다. 콘크리트 계단에 저런 발소리면 체구가 크지는 않고, 역
시 그 소년인가. 상대가 산전수전 다 겪은 빌런도 아니고 여리여리한 소년이지만 초능력이 제한된 지금
상황은 두려움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설마 지하 도시가 히어로 슈트에 대한 파훼법을 발명했다는 건가?’
바디 슈트 위에 붙어 있어야 할 파츠들이 없다. 나노 로봇으로 자동 복구되어야 할 슈트도 긁히고 찢긴 상
태 그대로. 혈관이 타들어가는 생소한 고통도 그렇고, 지금 이 상황도 그렇고 이해할 수 없어 두려움만 몰
려온다.
“으음… 생각보다 좀 많은데, 걸러서 먹어야 하나.”
고통으로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새하얀 소년이 보였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며 다가온 소
년이 검은 양복 여성들을 한 손으로 질질 끌어 분류를 한다. 하지만 먹는 다니, 무슨 뜻이지? 아무리 인육
까지 거래되는 지하 도시라지만, 저렇게 예쁘장한 소년이 식인귀라니.
실눈으로 슬쩍 소년의 모습을 살핀다. 마치 수산 시장에서 해산물을 품평하듯 양복 여성들을 이리 저리
만지작거린다. 숨겨둔 GPS 같은 거라도 찾는 건지, 셔츠를 뜯어내고 거침없이 손길을 뻗어 온 몸을 주무
른다. 가슴을 꾹꾹 눌러 보기도 하고, 복근을 쓰다듬거나 팔뚝을 꼬집어보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하
던 소년이 한 여성의 위로 올라탄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양복과 셔츠를 뜯어내고, 여성의 배 위에 걸터 앉은 소년이 천천히 상체를 숙인다. ‘먹
는다’ 라는 단어 때문에 꺼림칙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봐선 안될 장면을 바라보는 배덕 적인 감
각이 들어서는 순간.
“이, 이빨?!”
새빨간 입술 사이로 길쭉하게 뻗어 나온 송곳니가 여성의 목을 찌른다. 코 끝으로 풍겨오는 비릿한 혈향.
쯔으읍하고 음란하게 들렸어야 할 소리가 되려 소름 끼치기만 한다. 그륵그륵 소리를 내며 버둥거리는
여성, 그대로 위에서 짓누르며 피를 빠는 소년.
‘씨발… 뭔데 이게?’
마약류 중 좀비처럼 주변 사람을 마구잡이로 물어 뜯게 되는 마약은 알아도, 사람 피를 빨아먹는 이야기
는 들어본 적 없었다. 하나, 둘, 셋… 묶여 있는 상태로 피를 빨아 먹힌 사람들이 늘어나며 소년이 점차 이
쪽으로 다가온다.
“일어나 있죠?”
“너는, 너는 누구지?”
※
양복 차림의 여성들은 대부분 몸매가 좋았다. 싸우는 모습도 그렇고 아마 힘으로 밀어붙이는게 아닌 조
직적으로 합공을 하는 스타일이라 그런지 우락부락 직전에서 멈춘 헬스녀의 몸. 그런 사람들을 수갑에
묶어 두니 아랫도리에 반응이 온다.
‘뭐… 많으니까 가지고 놀아도 되겠지.’
탄탄한 가슴을 찔러보고, 복근을 주물럭거려 보고. 그러다 초능력자의 향이 가장 진한 여성의 목덜미를
물어 뜯었다. 순식간에 갱신되는 정보가 가득한 텍스트 창. 한 손으로는 적당히 큰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다른 손으로는 글을 읽었다.
지하 도시 컨트롤 타워에서 온 3팀장. 목적은 히어로 하나를 살해하는 것. 생각보다 철저하게 정보를 관
리하는지, 아니면 3팀장이 별 거 아닌 직책인지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있어 봐야 저 빨간 머리 여성의
초능력에 대한 정보니까. 아마 저 빨간 머리까지 빨아먹어보면 대충 교차검증이 되지 않을까?
“너는, 너는 누구지?”
“…뭐야, 왜 벌써 깨어나 있어?”
십 수명의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데 아무런 조치 없이 끌고 갈 리 있나? 당연히 마비와 수면 등의 저주를
듬뿍 걸어서 탈진시킨 상태로 옮겨왔는데.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흡혈의 여운으로 헤롱헤롱한 팀장이 보
인다.
살해 목표인 이 빨간 머리 히어로는 B급 상위로 알려져 있고, 팀장도 B급의 노련한 인물이다. 그런데 1분
안에 결판이 났으면… 능력을 숨기고 있었나? 고개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아보니 찢어진 바디 슈트 너머
로부터 매캐한 탄 냄새가 난다.
얘 지금 마법을 초능력으로 태운 거야?
팀장의 기억 속에서, 이 빨간 머리 여성은 그저 정의감으로 똘똘 뭉쳐 앞뒤 가리지 않는 애송이 히어로일
뿐이었다. 이번에 지하 도시로 온 이유도 어이없으니까. 자신의 모교가 습격받았는데 히어로 협회가 잔
당 추적을 하지 않자 몰래 무단으로 내려온 여성.
히어로 협회가 잔당 처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마 김한나와 히어로 협회의 교섭 때문이겠지. 병신도 아니
고 히어로 단말기에 지하 도시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으면 어느 정도 교류가 있다고 볼 수 있
으니까. 게임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대단한 나라도 창녀와 마약 등 음지에 대한 욕망은 거스를 수 없었고, 히어로 협
회는 그런 욕망이 사방팔방 퍼져 나가는 것 보다 지하 도시에 모여 있기를 바랄 테니까. 요컨데 지하 도시
는 6번째 구역이다. 히어로지구, 학업지구, 공장지구, 무역지구와 상업지구를 잇는 제 6구역 범죄지구.
“저리 가! 이빨 치우라고!”
“거 참, 싱싱하네.”
송곳니로 피를 빨아먹는 모습에 겁이 나는지 팔딱팔딱 허리를 튕기는 그녀. 사지가 묶여 바닥에 누운 상
태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겠지만 그 모습이 되려 꼴릿하다. 찢어진 바디 슈트를 입은, 가슴이 머리
통만 한 거유가 허리만 들썩이고 있으니까.
바디 슈트로 꾹 눌린 가슴이 출렁인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슈트로 짓눌린 가슴인데도 저렇게 역동적인
모습을 보인 다니, 소희가 D컵이었는데 그거 보다 크면 이건 어느 정도야? 로데오를 하는 기분으로 배 위
에 올라타니 악악 비명을 지르며 더욱 버둥거린다. 얇은 반바지 밑으로 와 닿는 슈트의 감촉이 신기해 손
톱을 길게 뽑아 슈트를 세로로 가른다.
“우와… 가슴 되게 크네.”
“이, 저리 꺼져 괴물아!”
“남자 아이한테 말이 너무 심하시네, 그러면 상처받아요?”
콘크리트도 두부처럼 가르는 손톱인데 슈트가 잘 잘리지 않는다. 마치 무딘 칼로 생고기를 써는 기분으
로 목 아래부터 배꼽까지 슈트를 길게 가르자 짓눌려있던 가슴이 양 옆으로 푸릉 소리를 내며 퍼진다.
‘와… 이게 가슴에서 진짜 소리가 나네?’
바둥거림을 멈추지 않는 그녀 때문에 찢겨 나간 슈트가 점차 벌어진다. 땀으로 흠뻑 젖은 뽀얀 가슴골에
한 손을 집어넣는다. 손바닥도 손등도 전부 감싸는 축축한 살결. 마치 최고급 밀가루 반죽, 아니 액체 괴
물을 만지는 기분이 드는데.
맨 살에 슈트도 자르는 손톱이 와 닿는 게 소름이 끼쳤는지 피부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나고 반항을 멈춘
다. 출렁이던 가슴도 자연스레 옆으로 밀려나 슈트를 벌린다. 겁에 질렸는지 눈물이 고인 눈망울을 마주
보며 천천히 송곳니를 세우고 목덜미로 다가간다.
“머, 먹지마! 나는 맛없어!”
마지막 저 외침 때문에 피를 뱉어낼 뻔 했지만. 부드러운 살결 너머로 송곳니가 파고 들어가고, 코 끝으로
강렬한 향기가 훅 풍겨온다. 역시, B급은 아니었네.
[작품후기]
개강 + 와우 클래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