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89)

진화?

학교 수업이 끝나고 소희와 함께 교문을 나선다. 악바리처럼 달려들던 학생들도 어느 정도 열기가 식었

는지 무리를 지어 흩어진다. 하긴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8시간 동안 팔다리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

기는 수준의 훈련을 했는데 더 매달리면 오히려 독이 되지.

“하늘아, 장 보러 가는 김에 뭐 살 게 있나?”

“딱히 없지 않나… 과일 정도? 토마토 다 먹은 것 같은데. 토마토랑 과일 사는 거, 그리고 샴푸랑 바디 워

시 정도? 지난번에 열대과일향이라고 사온 바디 워시, 풍선껌 냄새가 너무 심해서 버렸으니까. 육체가 강

화 되서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네요. ”

테러로 인해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빌런들이 대놓고 뛰놀며, 뒷세계에는 악마와 마왕이 있는 세

계관이라 그런지 어린 학생들은 충격을 쉽게 이겨냈다. 오락실과 PC방에서 가상 현실 게임을 즐기며 희

희덕대는 학생들의 모습이 그걸 말한다. 아니, 이겨내지 못해서 게임에 매달리는 걸지도 모르고.

솔직히 현실적이라면 17살 어린 아이들이 반갈죽 당한 시체 덩어리들을 보면 단체로 정신병원에 들어갈

텐데. 하지만 어린 히어로 지망생들과 다르게 사회는 그 충격에 몸져 누웠다. 어른이라 해도 테러의 공포

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아 뭐야~ 여기도 닫았어!”

“마카롱 집도 닫았다는데?”

교복을 입은 남학생 둘이 팔짱을 끼고 울상이 되어 있었다. 한 명이 카페 유리에 붙은 A4용지에 쓰인 공

지를 읽는 동안, 다른 한 명은 열심히 한 손 엄지로 채팅을 하고 있는 장면. 물론 남학생만의 이야기는 아

니었다.

“야! 분식집 닫았는데!”

“진짜냐? 3층 떡볶이는 너무 달아, 떡볶이 말고 다른 거 콜?”

“아오… 치킨 드실?”

거주 제한이 걸린 교육 지구 답게 대부분의 자영업자는 학부모들이다. 국내 유일의 초능력자 고등학교

와, 알고 보니 나름 명문고였던 옆동네 여자 고등학교를 제외해도 근처에 초, 중, 고등학교가 10개씩은

있으니까… 나 또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정육점이 쉰다구요?”

휴일이란 게 존재하지 않던 쇼핑몰에 불 꺼진 가게가 몇 개씩 등장한다. 나랑 별로 상관 없는 마카롱이나

밀크티 가게 같은 디저트 카페부터, 질 좋은 고기 때문에 단골이 된 정육점까지. 식당, 디저트 카페, 정육

과 청과 코너 등 업종에 무관하게 여러 가게가 문을 닫았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있고, 초능력자 고등학교 인근 지점은 빌런의 습격에 위험하다는 생각

에 교육지구 외곽으로 이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학교에 남은 아이들은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 붙이고 있지만, 학교 밖 사람들은 다르니까.

“음… 하늘아, 어쩔래?”

“일단 누나 맥주부터 사자. 생필품 가게는 집에 가는 길에 들리고.”

오일과 향신료로 시즈닝 되어 프라이팬에 굽기만 하면 완벽한 스테이크를 팔던 정육점이 닫았다니. 들여

오는 복숭아가 맛있던 청과점도 닫았고, 가장 가까워서 자주 다니던 옷가게도 닫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복합적 쇼핑몰에 있는 수백개의 가게 중 30곳 정도. 비율로 따지자면 10% 정도 되는 미묘한 수치지만 교

육 지구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정말 크게 와 닿겠지.

“그럼 오늘 저녁은 외식으로 할까?”

개인적으로 흑후추를 팍팍 뿌려 자극적이던 그 맛이 가장 익숙했는데 다시는 맛보지 못하는 걸까. 요 근

래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망이 늘어나서 그런지 짜증이 조금 밀려온다. 그 개새끼들,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보긴 힘들지만.

“자자, 내가 파스타 맛있는 곳 알아. 술자리에서 선배가 보증한 곳인데, 데이트 때 좋았다고 그렇게 자랑

을 해서 위치랑 메뉴까지 외웠다니까.”

“다른 남자랑 와본 건 아니고?”

찡그려진 내 이마를 봐서 그런 걸까, 옆에서 한 턱 쏘겠다며 과장된 몸짓으로 나를 이끄는 그녀를 그대로

따라 간다. 키득대며 옆구리를 찔러보니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기분이 풀린다. 그래 뭐, 고기야 다른 곳에

서 사도 되고 지하 도시에서 구해도 되겠지.

정육점과 청과마켓이 몰린 생필품 구간에서 양식 레스토랑이 모인 구역으로 향하자 무리 지어 돌아다니

던 학생들은 줄어들고 자취를 하는지 장바구니를 들고 홀로 돌아다니는 학생들이 더 자주 보인다.

“다른 남자라니, 여중 여고 체육계에 초능력자 공익인 몸인데 만날 틈이나 있겠어?”

“에이, 과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하긴 모태 솔로니까 그렇게 야동을 잔뜩 모아 놨-”

새빨개진 얼굴로 내 입을 틀어 막은 소희가 뭐라 말하려다 꾹 삼킨다. 창피하긴 한데 화를 내기 애매한 상

황. 매우 작은 목소리였지만 육체 강화 능력자가 있었는지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향했으니

까.

“아 누나~ 장난이었잖아.”

“아니 그래도 사람 많은데서…”

새빨개진 얼굴로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는 그녀의 옆에 팔짱을 끼고 달라붙는다. 나를 아는지 몇몇 학생

들이 스쳐가며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일단 삐진 소희를 달래는게 먼저니까. 팔 한 번 휘두르면

이 쇼핑몰을 붕괴시킬 괴물 같은 능력자지만, 고작 숨겨둔 야동으로 몇 번 놀리니 삐지는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대체 그건 어떻게 찾았어?”

“뭘, 혼자 사는 여자라서 그런지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폴더 속에 있었잖아. 새남편 길들이기 시리즈랑

유명 남배우 특집으로 잘만 모아뒀던데. 집에 들어온 첫날 바로 찾았지.”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검게 변한 그녀가 허우적대지만, 그녀의 오른 팔은 장바구니에 왼팔은 내게 붙잡

혀 있었다. 마왕의 대적자이자 사기 NPC의 부동의 1위인 용사가 고작 약간의 섹드립과 숨겨둔 야동 폴

더에 제압되다니.

너무 재밌어!

고양이가 아닌 사자가 레이저 포인트를 이리저리 쫒는 모습을 구경하면 이런 기분일까. 나보다 몇 차원

더 고등한 존재가 별거 아닌 것에 휘둘리며 내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소희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내가 특별 NPC에게 당한게 하루 이틀이던가. 게임을 하다 용사 같은 특별

NPC에게 박살난 전력을 돈으로 환산하면 현금으로 억 단위에 이를 것이다. 이쪽 세상에 떨어져서 통장

에 쌓아 둔 돈은 쓰지도 못했지만.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유리 문을 열자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마중나와 우리의 뺨을 흝는다. 적

어도 이 세계 맥주 가게는 문을 닫을 리 없어서 다행이다. 학생들이 인맥이나 각종 방법으로 구매하는 걸

막기 위해 주류 가게는 무인으로 운영되니까.

“어유, 얼굴 터지겠다. 일단 맥주부터 골라요. 나는 과일 맥주가 좋더라.”

“너는 참 자연스럽게 술을 요구하네…”

“치사하게 혼자 마시려는 건 아니지? 그러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다시 하드를 뒤져볼 것 같은데.”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수준으로 빠르게 화면을 누른다. 초인 대응용 기계였는지 어지간

히 빠르고 강하게 두드려도 전부 인식하는 기계가 놀라울 수준. 내가 좋아하는 사과와 블루베리 맥주, 그

녀가 좋아하는 흑맥주가 화면에 담긴다.

“인간적으로 그걸로 협박하진 말자.”

“협박이 아니라 포상 아닌가? 따라하니까 좋아서 죽으려 하더만.”

결제 버튼을 누르고 단말기를 가져다 대려던 그녀의 손이 멈춘다. 그녀의 구릿빛 목덜미와 귀가 붉게 달

아오른 것을 보니 더 이상은 자극하지 않는게 좋아 보인다. 다시 한 번 왼팔에 매달려 팔짱을 낀다.

넙데데한 남자 가슴팍이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소희의 팔뚝이 내 가슴에 닿자 그녀

의 얼굴이 다른 방향으로 붉어지는 걸 봐선 좋긴 좋나 보다. 성인임을 인증하기 위해 히어로의 신분증이

기계에 찍히자 로봇팔이 주문한 맥주를 건네준다. 아이스팩에 담겨 시원하게 냉장 보관된 차가운 유리병

들.

“맥주가 땡기는데 외식 말고 그냥 집에 가서 대충 해 먹자.”

휘감은 팔에 힘을 슬쩍 준다. 가슴팍 위에 미끄러지듯 비벼진 그녀의 상완이 움찔거린다. 최첨단 A.I.가

성인임을 검사하기 위해 위조 지폐를 구분하는 것 마냥 신분증과 생체인증을 동시에 하지만 성인이 사간

맥주를 집에서 나눠 먹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아니, 거기까지 막으면 최첨단 과학 기술이 아니라 그냥 독재 정부구나. 조지 오웰 선생님이 경고한 미래

는 사실 가까이 있었어. 닭장 같은 골방에 득실득실 모여서 가상현실에 고개를 처박고 사는 우리들도 사

생활 감시는 안 당했다.

하긴… 학생들끼리 사는 건 못하지만 부모님의 심부름이라면 주류 정도는 구매할 수 있겟지. 기숙사에

살지 않고 부모님과 사는 학생들도 꽤 많으니까. 하지만 세상 어느 부모가 미성년자 자녀에게 술과 담배

를 사 주겠는가.

그것도 교육열 때문에 교육지구로 이사 와서 자식들 부양하고 사는 열혈 학부모들이.

“대충 김치찌개나 끓여서 맥주나 좀 마시죠 뭐.”

“그러면 생필품 마트 가서 바디워시 새걸로 사서 돌아가면 되겠네.”

뭐, 미성년자랑 성인이 애인사이가 되어 둘이 자취한다는 특이 케이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작품후기]

첫 악플 달린 기념으로 술마셨다가, 즉흥 여행으로 목포 돌아다니다가, 생일 파티라 술마셨다가, 수강 신

청 조져서 술마셨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연중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드리겠지만 연재 주기는 확답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이 글은 작가의 뒤틀린 성적 취향을 맨족시키기 위해 동네 유기묘 캣 카페 구석에서 몰래 작성되고

있으며, 글을 쓰다 막히면 고양이 집사노릇 하러 가기 때문입니다.

글이 늦으면 다 고양이가 작가 허벅지에 꾹꾹이 하는 중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튼 연중은 하지 않습니다. 악플은 바로 삭제했지만 생각해보니 악플이 달리면 뭐 어떻습니까. 애초

에 정조역전 노블레스 찾아서 들어온 사람도 나랑 똑같은 놈인데 ㅎㅎㅎㅎㅎ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