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89)

자각

아침 햇살에 상쾌하게 일어나니 벌써 아침보단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주말이라 다행이라 해야 하겠

지. 피부에 와 닿는 뜨끈한 햇빛에도 기분이 좋아 슬그머니 몸을 점검해본다. 팔, 다리 멀쩡하고. 송곳니

안 뽑혔고. 불에 지져진 곳도 다 나은데다 날개도 멀쩡했다.

…날개?

욕실로 들어가니 새하얀 알몸 뒤에 커다란 박쥐 날개가 달려 있었다. 펄럭거리는 것을 집어넣고 싶다고

생각하니 스르륵 축소되어 사라진다. 수납 기능이라 다행이네.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와장창

소리를 들었는지 소희가 화장실로 들어온다.

“뭐 쏟아졌, 어… 미안?!”

“뭘 미안해, 이게 다 니가 쓰는 건데.”

툭툭 가슴팍을 두들기자 새빨개진 얼굴의 소희가 욕실 밖으로 나가기에 따라붙는다. 아침부터 알몸으로

술래잡기를 하는 모양새가 마치 싸구려 AV같았다. 그 생각은 소희도 마찬가지인지 입에서 어처구니없다

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네 서방?”

그대로 그녀를 등 뒤에서 잡아 침대로 이끄니 끌려온다. 그녀 앞에서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끌고 가는 모

습을 보여주지 않아서 그런지 그녀가 낯설어 하는 게 느껴진다. 내숭은, 씨발 반년 떨었으면 되었지 뭘.

“그, 하늘아 너 되게…”

“꼴려?”

당황한 얼굴로 딱 굳어버린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손에 감겨오는 찐득한 감촉. 탄탄한 엉덩이가

파도 치듯 출렁이는 것을 감상하고 그대로 주방으로 향한다. 솔직히 말해서 더 이상 영양 식품으로 만든

건강밥은 먹기 싫어.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아침밥은 내가 할 테니까 식탁에 앉아 있어.”

“그… 하늘아?”

“일단 옷부터 입고 저 빌어먹을 카카오 닙스랑 렌틸콩은 다 버리고 와. 고기 구울 거야.”

등 뒤에서 장난삼아 밀자 몸에 힘을 주지 않고 안방으로 밀려간 그녀가 잠옷으로 쓰이는 헐렁한 반바지에

커다란 셔츠를 입고 왔다. 늘어난 셔츠 너머로 보이는 윗가슴에 성욕이 동하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배가 고프니까. 날개 때문인가?

팬에 오일을 두르고 향신료를 듬뿍 뿌린 소고기 덩어리를 올린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데코레이션이나 건

강을 생각한 오색의 알록달록한 식단 따위는 없었다. 쌀밥에 김치, 그리고 잘 익은 스테이크뿐. 자취생 밥

상처럼 차리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니 후추 냄새가 싸르르 올라오며 육즙만 남기고 고기가 사라진다.

‘과학 기술 만만세다, 진짜.’

대충 구워도 맛있는 스테이크를 제공하는 과학 기술에 대해 속으로 감사 인사를 올리고 있으니 쓰레기를

버린 소희가 손을 씻고 식탁으로 온다. 젓가락을 들지 않고 뭔가 기다리기에 냉장실에서 맥주를 두 캔 꺼

냈다.

“왜 안 먹어?”

“어? 이게 끝이야?”

“밑반찬 어차피 잘 안 먹잖아?”

나도 그렇고 소희도 그렇고 초딩 입맛에 좋아하는 것에 질리지 않는다. 실제로 나물을 잔뜩 준비해도 몇

입 깨작이는 게 전부니까.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타인의 시선은 생각보다 날카롭다는 걸 모르는

걸까?

기름기 좔좔 흐르는 소고기에 김치를 크게 싸서 입 안에 집어넣자 소희도 젓가락을 놀린다. 나중에 버섯

이랑 관자나 사 와서 삼합이나 해 먹을까. 멍하니 소고기를 집어먹으니 소희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게 느

껴진다.

“왜? 아, 마늘 구울 걸 그랬나?”

“아니… 옷은?”

슬쩍 시선을 내리니 근육 하나 없는 새하얀 상체가 보인다. 아까 날개 때문에 바지만 입었지. 셔츠 하나를

꺼내 입으려다 문득 귀찮아져서 그대로 식사를 한다. 팔을 움직일 때 마다 움직이는 가슴의 모양에 집중

하는 소희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정말 시선이 노골적이네… 초능력자가 아니더라도 여자들이 남자의 음흉한 시선을 알아차리는 이유를

알겠어.’

식사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상급 흡혈귀를 넘어 최상급에 가까워 진 건지, 돌연변이로 변

했는지 모를 신체는 고작 10분의 시간만에 뱃 속의 음식물을 영양분으로 녹여버리는데 성공한 상태.

“뭘 참는다는 거야… 안 하려고?”

“아니… 그건 아니지.”

딱히 커다란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거창하게 일을 벌일 생각도 없었고. 침대 위에 같이 드러누운 그녀

의 품 안으로 파고든다. 흡혈귀가 가질 수 없는 뜨거운 체온으로 감싸 안아오는 부드러운 여체.

“아 진짜… 너무 창피한데 잊어주면 안 될까.”

“어제 일이요? 평생 기억할 건데.”

손바닥으로 말캉한 가슴의 감촉을 만끽하며 양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주무른다. 소희가 빨개진 볼을 감

추려는 듯 품 안에 안긴 나에게 얼굴을 부빈다. 바로 어제 이 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힘에 대한 불안감을 울

부짖으며 내게 범해졌고, 나 또한 나의 이상한 능력을 보여주며 그녀를 범했다.

용사의 힘을 억누르는 그녀와 그녀를 흡혈하는 나. 나의 정이 그녀의 뱃속으로 파고들고 그녀의 혈액과

마력이 내 입 안으로 들어오는, 정말 목숨을 걸고 하는 광란의 섹스. 그 결과는 최상이라 볼 수 있었지만

떠올리기 창피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희는 자기보다 어린 남자아이한테 울면서 매달렸고, 연하의 남자아이에게 섹스로 달래 졌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참을 수 없겠지. 나 또한 NPC니 키워서 빨대로 삼는다며 별 것 아닌 것처럼 대하다 정말 사랑에

빠진 소녀 마냥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게 창피하고.

물론 그녀는 내가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은 모르지만.

그녀가 모르니까 덜 창피하다는 사실만이 나를 달랜다.

“으… 주말인데 어디 나갈까?”

“귀찮은데 저녁에는 피자나 시켜서 먹지 뭐.”

딱히 삽입이 없어도 그저 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편했다. 용사를 흡혈했다는 것이 이 흡혈귀 육체에 뭔

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지 그녀의 성흔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피부를 박박 긁는 것 같았던 햇빛이나

빛 속성 마법도 지금은 한겨울에 덮는 솜이불처럼 포근하고 따끈따끈한 상황.

“여자 가슴이 뭐가 좋아서 그렇게…”

“그냥, 남자한테는 없는 거니까. 부드럽고 말캉해서 만지는 재미도 있고. 내 엉덩이 보다 이게 더 만질 게

많지 않나?”

밑가슴에 손을 넣어 툭 쳐올리니 출렁하고 기분 좋게 흔들리는 가슴.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치니

뭔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도 내 엉덩이

를 슬슬 쓰다듬었으니까.

정조관념 역전 세계여서 그런 것이지만, 그녀가 내 엉덩이를 조물딱거린다 해서 성적으로 훅 흥분되지는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내가 가슴을 가지고 놀아도 그닥 흥분하지 않았고. 둘이서 그렇게 이불 위에

서 껴안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휴대폰으로 피자를 시킬 때까지.

피자를 시키기 위해 휴대폰을 열어보니 당연하게도 메신저의 알람이 잔뜩 와 있었다. 개인 메시지는 아

니고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만들어진 새 단체 채팅방. 정문에서 기자를 제압했다, 요즘 어디 뉴스사 기자

가 어떤 옷을 입고 돌아다니더라.

급이 낮은 학생이라지만, 천리안 소유자와 사이코메트리 능력자가 눈에서 피눈물이 흐를 정도로 힘을 빡

주고 기자들을 추적해 다니니까, 민간인인 기자들이 어찌 저항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더군다나 힘 조절

을 못하고 기자를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학생들도 있으니 슬슬 기자들의 침입은 뜸해지는 상황. 하지만

흥분한 학생들의 단체 채팅방은 갱신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아 그대로 설정에서 알림을 제거했다.

“왜? 뭐 연락 온 거 있어?”

“아니, 피자 어디로 시킬까?”

와 있는 개인 메시지는 얼마 없었다. 조희정과 강정태의 안부 메시지. 상담할 게 있다는 김민혁의 메시지,

소희 몰래 대련을 하자는 이하린의 메시지.

김민혁? 얘 뭐야. 어떻게 나왔어?

영웅으로 각성한 소희의 모습에 깜짝 놀라 그대로 집에 처박힌 다음, 목숨 걸고 각성 비슷한 걸 해버린 탓

에 뒷수습을 안 했는데 멀쩡히 풀려나온 김민혁 때문에 당황한 것도 잠시. 머릿속에 한 여자가 떠올랐다.

클럽 주인, 김한나.

빌런 조직의 소탕을 의뢰한 당본인이기도 하고, 장사 수완도 좋고 눈치도 빠르다. 아마 지상에서 빌런들

이 소탕 당하는 걸 보자 마자 본거지를 급습, 남아 있던 떨거지들을 정리한 게 아닐까? 그 와중에 교복을

입은 상태로 범해지던 김민혁을 보고 풀어줬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피자 배달부 앞에 반바지에 헐렁한 나시 하나 입고 나갔다가 소희에게 꿀밤을 한 대 맞은 다음, 마루 바닥

에 피자를 놓고 대충 식사를 했다. 정갈하고 깔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니 이런 면에서는 편하네. 실

수로 흘려도 마법으로 치울 수 있고.

“아 맞다, 하린 쌤이 나랑 대련 뜨자던데.”

“아니 이 미친 새끼가 진짜. 나 좀 다녀올 게.”

“나도 좀 놀러 나가~”

피자를 다 먹고 손가락을 쪽 빨며 슬쩍 이야기하자 소희가 휴대폰을 들고 잠시 식후 운동을 하러 간다며

뛰쳐나갔다. 활짝 열린 현관문으로 슬리퍼를 대충 챙겨 신고 나도 나왔다. 조금 늦었지만 정산 받을 건 받

아 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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