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89)

자각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이 뒤집히는 감각은 소희보다 내게 익숙했다. 주로 마법사들이 텔레포트를 응용

해서 나를 저 세상 어딘가로 날려보낼 때 느껴지는 감각. 거인이 나를 강속구로 던지는 것 마냥 내장이 간

질간질하고 위가 쏠리는 그 감촉.

“이, 이 미친 할망구가…!”

소희의 풍만한 가슴이 내 얼굴을 압박하는 걸 멈춰 살며시 눈을 떠 본다. 어두운 곳에 있다 밝은 곳으로 나

오니 흡혈귀 특유의 감각이 기분 나쁘게 시야를 간지럽히며 빛에 대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햇, 빛?”

10초 전까지는 2층 무너진 건물 잔해 아래에 숨어 있었는데, 지금은 뜨거운 햇빛이 온 몸을 간질인다. 어

지러워지는 정신을 붙잡고 사방을 둘러보니 곧바로 할 말이 사라진다. 받아들이기 힘든 풍경 때문에 헛

것이 보인다고 생각할 지경.

“이게 무슨, 끄으윽, 어지러…”

“끄아악, 따, 따가워!”

건물들, 아니 건물이었던 것. 잔해였던 것. 바리케이트였던 것. 건물의 잔해들이 마치 현대 예술처럼 얽히

고 섥혀 새로운 건물을 만들어냈다. 날카로운 유리 칼날 사이에 가둬지고 휘어져서 새장처럼 변한 철골

사이에 낀 빌런들. 그리고 건물 잔해가 있었던 평지에 주저 앉은 인질과 민간인들.

‘…뭐야 이게, 씨벌.’

“정신 안 차려! 인질부터 구햇!”

교문 밖에서 현장을 촬영하던 기자들도, 대치 중이던 경찰과 히어로들도 어리둥절 한 사이 유일하게 정

신을 차린 것은 소희와 이하린 두 명뿐.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두 명의 우렁찬 고함에 히어로들이 교문과

담장을 넘어 우르르 몰려든다.

“붙잡아! 총, 총부터 막아!”

“인질 구출하고, 사선을 막앗!”

철골 사이로 총을 발사하려는 빌런의 손가락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나가고, 잔해 파편을 던지려던 빌

런의 양 팔이 바닥에 떨어진다. 제 아무리 C급, B급 빌런들 수십이 모여 총을 들고 있더라도, A급 용사로

각성한 소희와 A급 히어로인 이하린을 감당할 순 없었다.

“이, 이 새끼들이 진혁이를!”

“하, 학생! 그러면 안 되는데!”

그 와중에 인질이 되었다가 풀려난 C급 학생들도 달려드니 숫자로도, 질적으로도 밀리는 빌런들은 우왕

좌왕하다 그대로 체포당한다. 원래대로라면 폭탄을 터트리거나 시민들을 공격해야 하지만…

“제, 젠장! 간부들은 어디 간 거야?!”

“이, 이 씨발… 그냥 얌전히 있을 걸!”

기폭 장치를 가졌을 거라고 추정되는 적의 지휘부와 간부들은 구교사에서 이미 소희에게 몰살당한 지 오

래. 그 짧은 시간동안 대체 몇 명을 썰어 죽인 건지 의문이 들지만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우리가 있던 구교

사 건물도 사라져 있었다.

‘자기 손녀라고 챙기는 건가?’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소희가 나를 과보호 할 것 같아서 나 또한 소희의 뒤를 따라 간다. 소희가 구교

사 안의 빌런을 전부 죽여버리자 마자 바로 능력을 발동시킨 걸 보니 구교사 안에 있던 감시기기로 소희

가 빌런을 썰어버리는 걸 봤나 보다.

“개, 개새끼들아!”

철장에 갇혀 능력이 제한된 빌런들에게 C급의 능력자 10명 이상씩 달려든다. 몇 명은 눈 앞에서 반 친구

가 죽는 걸 봐 버렸는지 과도하게 폭력을 사용하다 근처의 히어로와 경찰들에게 붙잡혀 끌려간다.

백이 넘는 빌런이 학교를 점거하고 인질을 붙잡은 대 사건. 학생과 가드들의 인명 피해가 존재하며 도망

친 빌런은 없이 전부 제압 완료.

빌런의 초기 등장부터 완전한 제압까지 고작 30분 걸린 사건이지만 후폭풍은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이 게임을 하며 여러 모드를 즐길 때 마다 느끼는 건데, 아무튼 사람 사는 곳이면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이

다. 윗대가리가 썩었다든가, 양아치 새끼들의 패턴이 비슷하다든가. 그리고 현대 문물이 발전한 곳이면

100% 기레기 새끼들이 있었다.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어떻겠냐, 개새끼야!”

화라락, 등교길에 강렬한 바람 소리가 나더니 열풍이 훅 밀려온다.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여성 둘이 바닥

을 나 뒹굴며 고함을 지르고, 양 주먹에 불꽃을 두른 여학생이 그걸 쫓아가다 등교길을 감시중인 가드에

게 제압당한다.

“노, 놓으라고 씨바알! 저 개새끼들이!”

“학생, 알겠으니까 진정 해!”

사건이 벌어지고 1주일. 벌써 몇 명의 기자들이 실려갔지만 기레기는 끊이질 않는다. 히어로가 연예인보

다 더욱 관심 받는 세상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지. 이마에 화상을 입은 여성 기자가 신음을 흘리지만 그 어

떤 학생도 도움을 주지 않고 그대로 등교를 해 버린다.

“끄으윽, 하, 학생… 조금 부탁할 게 있는데.”

“119 불러드릴까요?”

남학생 하나가 다가가 119에 대신 신고를 해 준다. 눈에 힘을 주니 조희정과 강정태 두 명이 보인다. 통화

가 끝나니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여성의 손목을 조희정이 비틀어 꺾는다. 콰직 소리와 함께 박살나는 휴

대기기.

“뭐, 뭐하는 짓이얏!”

“닥쳐요, 아줌마.”

툭툭, 조희정이 기자의 양 손목을 붙잡고 강정태가 온 몸을 수색한다. 상의 주머니에서 하나, 안주머니에

서 하나, 치마에서 하나.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초가을에 왜 저리 꽁꽁 싸매나 했더니 녹음기와 카메라

를 숨겨 놨었네.

“너희들 이거 큰 실수하는-“

뻑! 소리와 함께 턱이 돌아간 여성이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이름 모르는 학생 두 명이서 몰래 도망치던

카메라맨을 붙잡아 질질 끌고 온다.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을 잘근잘근 밟아 박살낸 학생들이 그제서야

흥미를 잃고 다들 떠나간다.

“이야… 애들이 화가 많이 났나 보네. 하긴 나였어도 팔을 부러트렸을거야.”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본 소희가 혀를 쯧쯧 찬다. 그 소리를 들은 우리 건물과 거리가 먼 지원반

애들이 경계심 어린 눈으로 소희를 노려보다, 가슴팍에 보이는 스쿨 가드 뱃지를 보고 고개를 돌린다.

‘총체적 난국이네, 쉬바.’

소희가 용사의 힘으로 빌런 조직의 내부를 쓸어버리고, 소희의 할머니가 외부의 빌런과 인질을 통째로

공간 이동시켜 제압한지 1주일. 아니, 그걸 공간 이동이라 해야 하나? 공간을 자르고 이어서 분류했다고

봐야 하나.

기자들은 건물 내부에서 일어난 참상을 파헤치고 싶었지만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인질이 되었던 민간인

들은 대부분 빌런들이 심심하다는 이유로 죽였고, 나와 같은 교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소희가 온 걸

보고 전부 도망쳐 나간 다음 소희의 할머니에게 구출되었으니까.

증거라 하면 구교사에 있는 다양한 시체들뿐인데 그건 구교사를 통째로 갈아 엎어버린 소희의 할머니 때

문에 전부 사라졌다. 그 때문에 기자들은, 아니 기레기들은 학생들에게 접근했는데…

“인질로 잡힌 학생들을 알고 있나요? 아니면 잡혔었나요?”

“빌런들이 학교를 점령하고 어떤 일을 벌였죠?”

“2학년인가요? 2학년 사격반 교실은 신교사 쪽이라 피해가 크다 던데 어떤 일어 벌여졌나요?”

당장 대부분의 학생들은 눈 앞에서 자기 친구들이나 축제에 놀러 온 가족이 죽거나 폭행당하는 것을 실시

간으로 보느라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 그렇기에 기레기들의 무신경한 질문에 꼭지가 돌아버렸다. 직

접 본 것은 아니지만 합동 장례식장에도 기자들이 쳐들어왔다가 전부 응급실로 실려 갔다 던데.

화가 난 몇몇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등교길을 순찰, 인터뷰를 시도하는 기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리고 직접 공격에 가담하지 않는 학생들도 가드들이 늦게 오도록 시야를 가리거나 신고를 하지 않고 외면

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가드들 중에서도 피해자가 많으니 도움을 요청하는 기자를 외면했다가 해고당한 가드도 있었다.

아마 학생회에서 그 가드들의 복직을 요구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는데… 제일 큰 문제는 이것.

“아, 오늘도, 수고하십니다~”

“아 뭐… 불안하니까 같이 등교 하는 거지 뭐.”

“민짜랑 연애하는 걸 진짜 수고했다고 할 리 없지.”

내 옆에서 함께 등교하던 소희와, 바람을 타고 등교길을 순찰하던 이하린이 인사를 한다. 이번 사건으로

총합 A급 판정을 받은 소희는 불안하다는 이유로 내 옆에 딱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기레

기 새끼들만 없었어도 소희가 나를 놔줄 텐데. 미친 놈들이 장례식장에 조문객인 척 잠입해서 전투능력

없는 지원과 학생들을 포위하고 막아선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더군다나 이하린은 A급으로 올라온 소희를 보고 대련을 신청하더니… 두 여자가 치고 박고 어찌어찌 지

내다 술 친구가 되어버린 상황. 한 숨 밖에 나오질 않는다. 아마 술 마시면서 기레기 욕을 하다 의기투합

을 한 것 같은데.

소희는 새로 생긴 용사로서의 능력을 사용하고, 이하린은 내가 출력을 낮추고 낮춰 완벽히 안정된 자신

의 능력을 응용하며 대련을 하니 두 사람 다 실력이 일취월장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두명의

피를 흡혈하는 나 또한 성장에 가속이 붙었고.

좋은 점도 있지만, 귀찮은 점은 더욱 많았다.

“하늘아, 점심 시간에 보자.”

“야 소희, 점심에 나랑 대련하기로 했잖아.”

“그럼 11시쯤에 빠져나와서 슬쩍 붙던가. 커플끼리 보내겠다는데 눈치가 없어.”

등교부터 방과 후까지, 친구들과 논다는 핑계로 지하 도시에 갈 수 없어졌다는 것이다. 오전에는 이하린

이, 점심 시간에는 셋이서, 오후에는 소희가. 하교때는 셋이 같이 가다 상점가에서 헤어지니 굴라들과 만

날 시간이 나질 않는다.

[작품후기]

기레기, 기레기 네버 체인지

언론 공부를 하다 보면 기자조무사보단 인간조무사가 참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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