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본능
교복을 단정하게 정돈하고, 책상에 걸터 앉아 기다리니 복도에서 괴성과 비명이 울려 퍼진다. 상황이 심
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학생들을 희롱하던 두 명이 황급히 뛰쳐나간다. 그리고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밝
은 빛이 두 번 터지고…
‘…뭔진 몰라도 제대로 좆 된 거 같은데.’
그 즉시 생존본능이 경종을 미친 것처럼 울린다. 마치 잠자는 악어 아가리에 머리통을 들이미는 기분. 복
도에서 질퍽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뒷문이 드르륵 열린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 낯
선 기운.
“…늦었네, 미안?”
“…어서 와요.”
마치 편식하다 걸린 것처럼, 사오라고 했던 반찬거리를 까먹은 것처럼, 소파에 맥주를 흘린 것 같이 머쓱
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
“저게 다 피, 피야?”
“으, 으아악! 복도에 시체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황급히 달려나가지만 아무런 상관없었다. 손을 뻗어 핏자국과 내장 쪼가리, 등에
들러붙은 안구 파편을 지워내니 머쓱하게 손에 든 빛의 검을 휘저어 사라지게 한 그녀. 머뭇거리는 모습
이기에 먼저 달려들어 껴안는다.
“미안, 12시까지 오기로 했는데.”
“이 와중에 그런 말이나 하고… 상관없으니까 안아 줘요.”
등 뒤를 껴안는 따스한 손길에 한 숨을 내쉰다. 숨이 거칠어 진 것을 공포 때문이라고 판단했을까, 그녀가
내 등을 토닥이는 것이 느껴진다. 몸의 떨림이 멈춰가고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나를 달래는 이 부
드러운 손길 덕분에 알아차린 것.
‘용사가 왜 나와 씨바아알….’
소희는 듀얼 능력자 따위가 아닌 용사였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아니, 내가 제일 안 괜찮은데…’
히어로vs빌런이 있고, 천사vs악마가 있었으니 용사vs마왕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대전 모드를 전부 모아 둔 걸까?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천천히 따라간다. 여기서 깝치
다가 다시 성검이 튀어나오면 내 목숨이 위험하니까.
닭장 같은 골방에서 게임 속 세상으로 떨어졌을 때조차 나는 생명의 위기를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옆
에서 걷는 연인의 손등 하나에 벌벌 떨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게 이름 모를 성검이고, 그녀는
영웅이며 나는 흡혈귀니까.
이 빌어먹을 게임에는 모드가 무수히 많고, 적당히 밸런스가 조절되었다.
바닐라 모드에서 인류 최강의 격투가가 되었다고 C급 초능력자보다 강할 리 없다. 왜냐하면 히어로 모드
에서 C급 초능력자는 무작위 스탯 하나가 인류를 초월하는 것으로 시작되니까. 이름부터 ‘초’능력자 아
닌가.
일반인 격투가의 만렙이 10레벨이라면, C급 초능력자의 시작은 11레벨이라 보면 된다. 그런 식으로 초
능력자와 마법사와 기사가 있고 천사나 악마와 계약하면 대충 50레벨이 된다. 지옥 대공이나 72악마, 4
대 천사와 계약했다면 70레벨 정도 되겠지.
그렇다면 마왕과 용사는? 볼 것 없이 99레벨이다. 시스템상 최상위에 존재하는 모드. 화경이니 SSS능력
자니 소드마스터고 뭐고 다양한 모드 중 가장 최상위일 수밖에 없는 두 존재.
마왕은 용사 파티가 아니라면 모든 데미지를 무시한다.
용사는 마왕과 그 직속 부하가 아니라면 사망 판정이 없다.
게임 시스템으로 비유하자면 용사가 된 소희에게는 악마, 흡혈귀 등 마물 계열에게 고정 데미지 5000%
버프 같은 걸 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거 말고도 데미지 무시, 체력 회복, 스킬의 직업 제한 해제, 악 성향에
게 디버프 오오라, 선 성향에게 버프 오오라 등 회식 영수증 같은 버프 수십 수백개를 두르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마왕이랑 연관도 없는 흡혈귀 찌끄래기. 각성은커녕 만렙 언저리에도 못간 반 쪼가리 흡혈
귀인 상황. 그럴 리 없지만, 소희가 실수로 오오라 비슷한 스킬 하나만 잘못 발동하면 나는 용광로에 빠진
것처럼 사르르 녹아서 뒤지는 것이다.
“아 미안… 여기는 좀 안 봤으면 좋겠어.”
“누나, 난 괜찮으니까.”
소희가 나를 껴안아 올리고 뒤에서부터 손으로 눈을 가린다. 자세가 조금 우스꽝스러워졌지만 그녀는 그
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성흔,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을 성검 때문에 눈
꺼풀이 바르르 떨린다.
심정으로는 이마에 총구가 들이 대진 기분 보다는 눈을 뜨고 있는데 안구 1mm앞에 불에 달군 바늘이 들
이 대진 기분이다. 눈이 따끔거리고 눈물이 질질 샌다. 나의 이 떨림과 눈물을 공포로 받아들인 그녀가 조
금 더 강하게 껴안아온다.
복도에 널린 것은 잔혹하게 찢겨 죽은 시체들. 잘리고 뜯겨 나간 단면을 보면 벌써 소희가 용사로서 어느
정도 각성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불에 탄 시체는 성검, 날카롭게 잘린 건 이하린의 칼바람을 베꼈겠지.
터져 나간 시체는 강화된 육체에 휘둘린 것으로 보이며, 꺾이는 길에서 등 뒤를 급습 당한 시체를 보면…
그림자 밟기? 이건 김민혁 같은 그림자 술사가 쓰는 기술인데. 몇 번 마주쳤는데 보여주지도 않은 스킬을
파악하고 그대로 베낀 건가.
‘이 씨발… 이 좆망겜은 확률이란 걸 생각을 안 하나?’
대충 140억 인구 중 딱 한 명 있는 용사가 여자인 것은 남녀역전이라 당연하다고 치자. 그게 왜 게임 스타
팅 포인트 옆에 존재하는데. 어쩌면 첫 여자인 김세민을 그대로 흡혈한 내가, 아무 이유 없이 그녀에게 끌
린 이유가 이 것 때문인가?
학원물이 섞였으니까… 용사 파티가 하렘 파티가 되는 거지. 생각해 보면 적대적 종족이지만 용사에게
반해 따라오는 것 또한 클리셰라고 볼 수 있으니까. 내 주변에서 클리셰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가 클리셰의 일부였다는 소리다.
내가 없었어도 이 조직은 학교를 습격했을 거고, 아마 소희는 그 때 용사로 각성했겠지. 그 뒤는 잘 모르
겠다. 특이한 능력자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며 다양한 남자들로 하렘을 꾸렸으려나. 아니면 순애물 루트
를 탔을지도 모르고.
‘소희를 놓치면 내가 뒤지겠는데.’
그녀의 품에 공주님 안기… 아니 왕자님 안기로 안겨 품에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귀찮아지는 게 싫다면
나를 데리고 벗어날 것이고, 용사의 사명을 자각했다면 다른 사람을 구하러 갈 것이다. 왜냐면 그게 용사
니까.
마왕을 죽일 용사.
“일단… 포위가 되서 집으로 도망 칠 순 없을 것 같네.”
“…여기 같이 숨어 있자 누나.”
“그래, 그러자.”
아니, 아니지. 차라리 그녀 옆에 있어야 한다. 용사가 있으면 마왕이 있고, 마왕이 있으면 용사가 있다. 너
무 당연한 사실이니까. 진형상 흡혈귀는 마왕의 권속에 가깝고, 재수 없으면 정신 지배당해서 그대로 마
왕군 악의 여간부 테크를 탈지도 모른다. 쫙 달라붙는 가죽 쫄바지를 입고 채찍으로 싸우는 그런 섹시 캐
릭터.
솔직히 게임 세상에 떨어지는 것은 상관 없지만, 내 몸의 자유를 빼앗기는 것 만큼은 사양하고 싶으니까.
순식간에 게임 난이도가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천사나 악마는 계약만 하고 직접적인 개입이 없지만, 마
왕은 여차하면 침공해오니까. 소희를 키워서 빨대를 꼽는 게 아니라, 소희를 키우지 않으면 당장 내 안위
가 위험할지도 모른다.
무너진 교실 하나의 잔해를 들추고 파고든다. 창 밖 벽은 무너져 잔해에 깔리고, 복도 전등이 나가 어둑어
둑한 교실. 교탁과 앞 쪽 책상 서너개만 멀쩡하고 나머지는 발 디딜 수 없을 수준이지만 그 정도 좁은 공간
이면 되었다.
“여기 있으면 히어로들이 올 거야. 그 때 까지만 참자.”
“네 누나.”
“하하, 즐거워야 할 축제가 이게 뭐람… 오랬 만에 하는 데이트인데.”
이어 붙인 책상 위에 걸터 앉아 어깨에 기댄다. 낮게 두근거리는 그녀의 심장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또렷
하게 들려온다. 갑자기 훼까닥 돌아서 악당들을 썰어버리겠다고 달려나가는 게 아닐까 두려워 손을 꼭
잡는다.
“하하, 괜찮다니까.”
내 손등을 어루만져오는 그 부드러운 손길 너머에 잠든 성검이 안 괜찮아서 그래. 누나가 저거 컨트롤을
1초만 삐끗해도 나는 녹아버린다고.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릴수록 내 심장도 같이 두근거린다.
“괜찮아, 오면서 보니까 히어로 협회에서 이미 포위하고 있어. 이하린씨도 교문에 있었고… 또 우리 할머
니도 곧 움직이실 거야.”
…할머니? 그러고보니 그 때 봤던 그녀의 능력은 고작 중급 흡혈귀로서 측정조차 불가능할 레벨. 더군다
나 영웅이라는 것이 대부분 혈통을 따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 또한 무시할 수 없으리라.
창 밖에서 커다란 이명이 들린다. 끼이긱하고 마치 물에 젖은 나무끼리 비벼지는 불쾌한 소리. 옆에서 어
깨를 빌려주던 그녀가 그대로 내 머리를 다시 껴안아온다. 코 끝에 닿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에 심각한
상황임에도 기분이 풀리려고 한다.
“미친 할망구가… 하늘아, 꽉 잡아!”
그 직후, 세상이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