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89)

생존본능

빌런들은 지능적이었다. 육체 강화 능력자들이 바리케이트를 쌓았고, 무너진 건물 곳곳에 있는 이들은

감각 교란계로 파악. 원거리 방출계 빌런들은 인질을 조준하고 있는 상황이며 총을 들고 창문에 자리 잡

은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 파악되지 않은 이 일의 주동자들은 구 교사에서 탈출 못한 민간인과 학생들을 인질로 잡았을 것이

고... 더군다나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보니 총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폭약까지 확인 되었으니 부비트랩 또

한 고려하게 생겼다.

빌런의 수가 조금이라도 적었더라면.

빌런이 습격한 곳이 일반 학교였다면.

빌런이 침입한 것을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심지어 학교 이사장인 전희민의 능력까지 파악했는지 인질들을 데리고 교실 안에 들어 있는 게 아닌 창문

에 매달려 있기까지 하니, 공간과 공간을 이어 제압 부대를 들여보낼 수도 없었다. 능력의 전조 때문에 조

금이라도 주변 풍경이 일렁거리면 학생들이 죽을 테니까. 지금만큼 통유리로 화려하게 치장된 학교 건물

이 원망스러울 일이 있을까?

전희민이 공간 이동을 시도한다면 낌새를 눈치챈 저들이 자폭하거나 인질을 공격할지도 모른다. 이하린

이 돌진한다면 바리케이트를 파괴하는 순간 학생들이 죽겠지. 육체 강화 능력자들이 잠입하자니 건물 외

벽을 다 무너트려 놔서 들키지 않을 방법이 없었으며 은신 계열이 침입했다가 부비트랩이 하나라도 건드

리면 히어로와 인질이 동시에 죽는다.

교내가 과도하게 혼잡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학교 밖에 있던 이하린은 그저 이빨이 깨질 듯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가 알기로 가장 가까운 A급 히어로는 4구역에 있으니까. 옆 구역에서 이곳으로 전력으

로 이동한다 치면 10분 조금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교직원의 단말기가 탈취되어 초

능력이 파악된다면? 지금만 해도 전희민의 S급 공간 조작을 알아차리기 위해 인질을 붙잡고 통유리창에

매달려 있는 빌런들이다.

초능력이란 그런 것.

인간의 심장이 하나인 것과 같이 초능력의 근원인 코어도 하나. 한 명의 초능력자, 하나의 코어, 하나의

초능력… 그리고 무수히 많은 대처법.

초능력이 등장하여 민간에 녹아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반인들이 초능력자를 두려워하며 그들과의 전쟁

을 대비했는가? 히어로가 빌런이 될 까봐, 초능력자들의 전쟁이 초능력자와 일반인과의 전쟁이 될까 얼

마나 많은 과학자들이 고민했는가?

빠르게 제압하면 학생들이 죽는다. 빠르게 제압하지 않으면 한국의 히어로에 대한 약점이 빌런 조직에

퍼져 나간다. 이런 끔찍한 딜레마 속에서 이하린은 교문 앞에서 빌런들과 대치하고 있었고, 카메라들은

그 광경을 실시간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영웅 학교를 습격한 빌런들의 조직은 아직 파악중이며,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은 채 대치중입니다! 이에

A급 풍계 조작 히어로 이하린양은…!”

“학교 내부에서 온 연락에 따르면 이미 꽤 많은 피해자-“

“적어도 백 명은 될 법한 무법자들이 도심 한 복판에서 끔찍한… 저기를 보십시오! 카메라! 뒤로!”

그 때, 오피스 룩을 곱게 차려 입은 남성 앵커가 커다란 마이크를 휘두르며 허공을 겨냥했다. 이 날카로운

목소리에 카메라맨의 시선이 먼저 돌아갔고, 황급히 커다란 카메라 렌즈들이 휙 소리가 나게 돌아갔으

며, 구경중이던 시민들이 마지막으로 그 것을 목격하였다.

“저건, 저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영이 건물 잔해 속으로 파고듭니다! 새로운 빌런이 합류한 것일까

요?”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A급 능력자인 이하린만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든 ‘그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평소의 흐리멍텅하고 게으른, 팔불출 같던 인상 따위는 온데간데없어진 상태로 무언가 중얼거리

는 그녀의 모습.

‘…죽인다? 혹시 그 하늘이란 학생과 연락이 닿았나?’

잔해에서 올라오는 먼지바람을 거칠게 치워버린 이하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인질을 붙잡은 빌런들의 주

의를 끌기 위해 거칠게 바람을 움직이며 무력 시위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아마 아주 어린 시절이었을 것이다.

6살? 5살? 어쩌면 4살? 기억한다고 말 하기도 힘든 유년기. 희미해진 기억 속 떠오르는 상냥했던 오빠의

목소리. 그래, 소희는 씩씩하구나. 약한 사람은 도와줘야 해. 나쁜 사람은 무찔러야 해. 악당을 무찔러줘

꼬마 영웅님.

나른한 오후에 햇빛 머금은 이불 속에 파고드는 것처럼, 그 상냥한 목소리에 반한 그녀는 그러하겠노라

고 언제나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나뭇잎 사이로 파고드는 햇빛. 맴맴 우는 시끄러운 매미. 새하얀 셔츠에

밀짚모자를 눌러쓴 고운 자태.

한 가지 이상한점은, 그녀가 나고 자란 구역에는 그런 깊은 숲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누, 누구냐!”

“쓰, 쏴아! 일단 쏘라고! 우리 쪽 사람 아니야!”

어찌 보면 첫사랑이라고 볼 수 있겠지. 아니면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이 미화되다 못해 왜곡되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 숲 속이 아니라 도시의 공원일지도 모르고, 이름 모를 꽃밭이 아니라 잘 손질된 잔디밭일지

도 모르지.

“너, 너는 누구, 으아아악!”

“내, 내 팔! 내 파알”!

“여기는 C-12! 지원 부탁한다! 히어로가 아니야! 다른 조직 놈들이 온 것 같다고!”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 생각을 해서? 어째서인지 달리다 보니 세상이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 들었다. 냄새도 소리도 시야도 멍하니 새하얀 빛에 먹혀버려서… 하늘이. 곧바로 생각은

다른 쪽으로 옮겨간다.

“하, 항복! 항복한다고! 항복하니까 제아아아아악!!”

새로 산 운동화인데 발 밑이 질척한 게 기분이 나쁘다. 미용실에서 다듬은 머리카락은 젖어서 뺨에 달라

붙는다. 소년의 여린 피부를 할퀼까 짧게 깎은 손톱 밑에 낀 살점이 기분이 나쁘다. 머리 속에서 울리던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점차 사라져간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한 소년.

“괴, 괴물, 괴물 새끼야아아아!”

“총탄, 총탄이 안 먹힌다! 에너지 필드 장비를 전개한 것으로 보인… 맨 몸이라니까 무슨 소리야!”

“주, 주먹을 뻗어 원거리 절삭 공격을 확인, 아마 풍계 조작 능력자 같아! 살려줘! 지원은 언제 오는 건

데?!”

“그,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능력자는 들어본 적 없-“

“초, 총알을 맨 손으로 잡았어, 육체 강화 능력자 놈들은 언제 오는데! 교문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

저, 전멸?”

뒷골목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주장하는 소년. 흡혈귀라는 특이한 초능력 때문에 성적으로 착취당했다가,

나를 의지하고 마음을 터놓기 시작한 그 가녀리고 사랑스러운 존재.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은 몸으로, 연

인이 밤 생활에 질릴까 여러 모양새로 노력하는 걸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

“고막이 터진 시체를 확인했다. 음파 계열 능력자로 보인, 뭐? 정보에 혼선이 오니까 좀 제대로 전달하라

고!”

“1층부터 4층까지 전원 연락 두절. 시체가 찢겨 나간 모습을 보니 히어로는 아닌 것 같은데.”

“사이코 메트리가 침입자를 확인했다… 히어로 협회 데이터 베이스에는 없는데.”

같은 B급인 내가 못 미더웠을까? 보여주는 사랑이 사실은 보금자리를 얻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그가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게 아닐까? 밤마다 깨어나서 몰래 돌아다니는 게 나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모든 걸 말해 줄 거라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사실 그냥 무심한 게 아니었을까?

“이봐! 어디 조직에서 보낸 거지? 너 정도 되는 녀석은 처음 보는데.”

온통 새하얗던 세상이 여러 색으로 덧 칠 된다. 금이 간 액정 너머로 보이는 디지털 시계는 12:00으로 변

해 있었다. 간만에 하는 데이트인데 늦었네. 쓴 웃음이 절로 새어 나온다. 이러니까 못미덥지. 망상 속의

남자가 무슨 상관이냐? 지금 당장 몇 시간 전까지 침대에서 피부를 부빈 연인이 기다리는데.

“…비켜.”

“으하하, 그럴 순 없지. 상도덕도 없이 남의 무대를 가로채려고 하나! 하긴 빌런이 상도덕 따지는 것 또한

웃기긴 하네!”

근육질의 여성이 쿵쿵 복도를 울리며 달려든다. 뻗어진 주먹을 피하니 코 끝을 간질이는 향기. 다시 한 번

세상이 새하얀 색으로 물드는 것이 느껴진다. 뜨거운 격류가 가슴을 간질이며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처

음 이능력을 각성했을 때 느꼈던 그 기묘한 감정.

“너, 이 개새끼가, 학생한테…”

“학생? 아 뭐… 반반한 놈 몇 개 따먹었지. 어려서 그런지 몸보신이 쥑여주더라!”

정면에서 달려드는 여성의 어깨를 짚고 위로 뛰어올라 천장을 디딘다. 손 끝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

본능이 시키는 대로 내리 그어버리자 새햐안 궤적이 아름답게 피어오른다.

“어, 어…이게 무어…”

불쾌하게 고기 타는 냄새와 함께 반으로 갈라지는 여성이 녹아내린 단검을 놓친다. 시체가 반으로 갈라

졌음에도 피 한 방울 튀지 않는 기묘한 모양새.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덩치 큰 여성이 다시 달려든다.

“그러게… 이게 뭘까?”

“이, 이 새끼가!”

복도를 박살내며 달려드는 여성의 맞은편에서 새하얀 빛이 다시 복도를 비춘다. 바닥에 쓰러지는 두 덩

이의 시체. 고장 난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교실 안 벽걸이 시계를 확인한다.

12시 5분.

“…늦었네, 미안?”

“…어서 와요.”

[작품후기]

이 글의 제목이 '살아남는 법' 인 이유가 나올겁니다.

글 재주가 별로라 마음껏 표현되지 않는 게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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