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89)

축제

창 밖의 풍경을 보니 아비규환. 학교가 이토록 넓은데 어떻게 점거할지 궁금했던 게 바로 해결되었다. 이

구교사를 제외한 다른 건물의 외벽을 무너트리는 것. 농성은 구교사에서 하고, 외벽이 무너진 저 건물에

서 다른 빌런들이 숨어서 히어로의 뒤를 노리지 않을까.

“으하하, 학생 치고는 요리를 잘 하네… 아아, 안 죽인다니까. 아직 쫄지마 이 새끼들아, 미래의 히어로들

이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되겠냐?”

내가 창 밖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두 빌런 여성들은 가까운 교실 하나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지고 놀

고 있었다. 남학생을 희롱하고, 여학생들을 걷어 차거나 부려 먹으면서. 이미 가드들의 목을 뜯어버리고

칼로 찌르는 두 명의 잔혹한 행동을 본 학생들은 그저 말없이 복종했다.

“그래, 이렇게 어? 이런 눈빛 정도는 보여 줘야지.”

“아아아악! 누, 내 눈!”

처음 덤벼든 학생의 양 다리를 부러트리고 창 밖으로 던지는 모습에 공포에 완벽히 먹혀 버린 것이다. 지

금도 바라보는 눈빛 핑계를 대며 눈꺼풀을 엄지로 살살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사람 목을 뜯어버릴 근력

이라면 그보다 더 연약한 눈이 버틸 리 없는데. 비명을 더 질러보라는 듯 천천히 엄지를 밀어 넣는 걸 보니

이런 힘조절이 꽤나 익숙한 모양.

“이봐, 거기까지 만해. 몸 성한 애들 몇은 있어야 협상이 되지.”

“말 그대로 몇 명만 멀쩡하면 되는 거 아녀? 원래 이런 건 남자애들만 멀쩡하면 되는 거야. 카메라 앞에서

옷 좀 찢어 놓고 울려 두는 게 효과가 제일 좋다니까.”

최면에 전혀 저항하지 못한 두 명은 참으로 막무가내였다. 남학생의 옷을 벗기고 낄낄거리다, 그걸 바라

보는 여학생의 눈을 짓뭉갠다. 그러더니 과장된 포즈로 남학생을 넘어트리고 그대로 찍어 눌러 강간했

다.

“이야, 미래의 히어로님 자지를 내가 따먹는다 씨빨!”

“으햐하! 야! 맥주는 없냐? 없어? 뒤지고 싶냐?”

마치 나에게 자랑하겠다는 듯 역 교배 프레스 자세로 남학생을 찍어 누르며 강간하지를 않나, 힘자랑을

하는 애새끼처럼 여학생의 머리를 툭툭 쳐서 사람을 벽에 처박는다. 학생들 대부분이 C급 강화 능력자인

지라 죽지는 않았겠지만 병원에 꽤 오래 처박혀 있겠네. 짓뭉개진 눈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살아만 있다

면.

‘동화 속 주인공들은 참 대단하네. 공주님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몇 년을 기다린 건가.’

누구는 여친 기다리는 20분도 지루해서 뒤질 것 같은데 탑에 감금당해 몇 년은 어떻게 버텼을까? 오히려

혼자 있으면 나으려나? 특히 라푼젤, 머리카락 길러 땅에 닿을 정도로 오래 감금당해 있을 정도면 그 전

에 그 머리카락으로 목 매달아 죽었을 텐데.

분명 20분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병신들 옆에 껴 있으니 15분이 150일 같다는 기분이 들

었다. 사실 100배속이 적용된 게 아니라 0.01배속이 적용된 게 아닐까? 멍하니 온갖 생각을 하며 책상에

걸터 앉아 있으면 슬금 슬금 두 명이 내 몸을 쓰다듬으며 희롱하다가 서로 눈치를 보며 슬쩍 물러나 다시

학생들을 건드린다.

최면이 통한다 해서 복잡한 최면은 불가능했기에, ‘나를 소중히 여겨라’ 같은 단순 암시를 집어넣었기에

이런 걸까. 지금 성기 골절이 일어났는지 바닥을 빌빌거리는 남학생들 다루듯 덮치고 싶겠지. 아마 어정

쩡한 최면 때문에 머리가 멍해서 저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어정쩡하게 걸린 반 쪼가리 최면은 30분이면 풀린다지만, 소희가 오기로 한 건 20

분. 그중 15분의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 5분만 보내면 된다. 벌써 최초 목표의 75%에 도달한 것이다.

나를 사이에 두고 교실 양 쪽에서 눈치를 보는 두 병신. 아마 ‘내가 이 남자애를 따먹을 때 등 뒤에서 쑤시

면 어쩌지?’ ‘내가 이 남자애를 따먹으면 저 새끼가 내 목을 꺾지 않을까?’ 같은 의심이 생겼을 것이다. 원

래 이런 빌런, 범죄자 새끼들의 ‘소중하게’는 그런 식이니까.

슬며시 시계를 보았다. 11시 56분. 그 기나긴 생각을 끝마치자 1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째깍, 디지털 액정이 11:55라는 숫자를 보여준다. 시계 바늘 따윈 없지만 귓가에 선명하게 시간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귀여운 애인과의 약속은 12시. 학교에서 늘 보는 사이지만, 사복을 입고 학교

축제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아 씨, 진상 작작 부리고 꺼져요, 좀!”

“소희야!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좀 데려가 줘라!”

“나 지금 교직원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학생 손님으로 가는 거라 추가로 못 데려간다고! 저번에 축제

이야기할 때는 잠잠하다 오늘 왜 지랄이에, 아 놓으라고!”

하지만 들뜬 마음도 잠시. 문자 폭탄을 보내오다가 집 앞까지 찾아온 진상 때문에 기분이 슬슬 나빠지려

한다. 머리 만져 둔 거 망가지지 않게 학교로 가려면 3분 정도 천천히 뛰어가야 하는데. 버스나 택시를 타

면 20분에서 30분 거리라 차를 타기엔 늦은 시간.

“지난번 그 감자튀김 집에서 맥주 마실 때는 애들 축제 보러 안 간다며? 고등학생은 이성으로 보이질 않

는다고 나한테 쿠사리 존나 넣더니?!”

“아니, 고등학생 노리는 게 아니라 이하린 보러 가는 거야!”

“…아 씨발, 잠깐만, 놔 언니, 놔 봐. 취향이 그런 쪽이야?”

“미친년아! 나도 풍계 능력자니까 그렇지 어딜 그런 쪽으로 몰아! 클럽에서 너랑 나랑 남자 꼬시다 뺨 맞

은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딸깍, 디지털 숫자가 5에서 6으로 변한다. 귀중한 준비 시간 1분이 이딴 실랑이로 사라진 것. 짜증이 몰려

와 밀쳐내지만 다리에 달라붙은 껌 딱지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여자라지만 데이트 준비

에 20분 정도는 써야하는 거 아니겠는가? 그것도 사귄 지 1년이 안 된 풋풋한 연인 사이인데.

‘풋풋한 사이… 라 하기에는 좀 그렇지.’

새침하면서도 풋풋하게, 그러다 침대 위로 올라만 가면 요염하게 달라붙어오는 그 아리따운 나신을 생각

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그 덕에 다리에 붙어 있던 선배 비슷한 웬수가 떨어져 나갔지만. 이 웬수랑 엮이면

입이 험해 진단 말이지. 그래도 하늘이 앞에서는 말 곱게 쓰고 있는데.

“어휴, 알겠어요 좀. 걔 친구 중에 티켓 남는 거 있냐고 물어볼 테니까.”

선배가 하나, 반장 부반장이랑 친하니까. 선배 턱주가리를 부쉈다지만 그 정도면 교우 관계가 양호하지

않을까? 아니다, 늘 대련이랍시고 이하린이랑 1:1로 싸우니까 축제 말고 이하린을 소개시켜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는데. 나랑 하늘이, 이 진상이랑 이하린 넷 이서 뒤풀이를 하다 두 명을 두고…

찬 맥주를 마실 때 마다 슬쩍 보는 걸 보니 하늘이도 맥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미성년자 애인이라지만 고

작 맥주 한 캔으로 잔소리할 마음은 없었다. 나도 초능력 각성하기 전에 선배들이 담배는 안 된다고, 술을

먹인 적 많으니까. 술 마시면 취할까? 흐트러질까? 흐트러지면 침대에선…

으히힛, 하고 나도 모르게 음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진짜? 축제는 어찌 되도 좋으니까 이하린이랑 비벼, 아 씨… 뭔가 어감이 이상한데.”

“언니, 그 방송 보고 온 거지?”

“니 고딩 애인이랑 이하린이랑 대련하는 거? 당연히 봤지.”

이 초능력 오타쿠는 귀찮더라도 인연은 인연이니까. 같은 여자 연예인의 초능력에 반해서 팬클럽 활동을

하는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단말기를 건드린다. 약속 시간까지 4분. 전력으로 뛰면 2분이 안 걸리

고, 이 짐덩이를 매달고 가면 5분 정도 걸리지만… 어차피 이하린만 만날 거면 안 데려가고 저녁에 불러

도 되지 않을까?

-띵! 띠띠띵! 띵! 띠띠띵!

“어?! 재, 재난 경보 문자가 왜…”

그 때, 휴대폰에서 들려서는 안될 소리가 들려온다. 폭염이나 지진, 해일을 경보 하는 음과 다른 고음의

찢어지는 벨소리. 히어로 협회에서 모든 초능력자에게 보내는 빌런 경보 메시지. 오늘 같은 축제에 대체

누가… 같은 생각을 하던 찰나, 먼저 휴대폰을 열어본 선배가 신발을 신고 거실로 뛰어들어간다.

“소, 소희야! 저기가 저그, 그 고등학교! 너네 학교!”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 들어가니 뉴스 속보가 흘러나온다. 무너진 교문, 깨지고 부서진 건물의 외벽.

외벽 잔해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그 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노끈에 묶여 창문에 매달려 울부

짖는 학생들.

“아… 이 씨이발…”

“소, 소희야? 소희야?”

“개 씨발,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호래새끼들이.”

마루 바닥에서 들려선 안될 폭음이 들려온다. 발 밑에서 터지는 폭발음. 깨져 나가는 창문. 유리조각이 햇

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거리로 흩어진다. 아파트 사이로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게 느껴진다.

딸깍, 선배의 목소리가 저 멀리 사라지고, 아래에서 시민들의 비명이 들려오다 희미해진다. 그 사이로 들

리는 환청과도 같은 딸깍거리는 소리.

11:58

약속 시간까지 2분.

[작품후기]

친구가 술 먹다 말고 여친 전화가 오니까, 목소리가 변하는게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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